문맥 (context)
원균(元均, 1540년 2월 12일 (음력 1월 5일) ~ 1597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중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원성백파(原城伯派), 자는 평중(平仲)이다. 무인 가문으로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남원 양씨로 양성지의 후손 양희증(梁希曾)의 딸이다.
과거 급제 후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남해안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597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고 거제도로 퇴각했다가 왜적에게 사살되었다. 임진왜란 발발부터 칠천량해전까지 참전해 사후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칠천량 해전 패배 등 뚜렷한 공적이 없음에도 조선 선조의 의해 선무공신에 녹훈되었다. 불천위로 매년 7월 15일에 시제를 지낸다. 인류의 해전에 관한 모든 역사를 다룬 책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 이순신은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매장한 최악의 부패하고 무능한 제독으로 평가된다. 충청도 진위현 출신.
생애 >> 생애 초반 >> 출생과 가계
원균은 1540년 음력 1월 5일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서 무인 원준량(元俊良)과 남원 양씨의 아들로 출생했다.
원주의 호족이자 고려 태조 왕건 때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병부령, 원성백에 봉작된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그의 선조들은 강원도 원주군에서 충청도 진위현으로 이주했다. 원주 원(原州元)씨의 경기도 입향조(入鄕祖)는 세종 때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던 원임(元任, 또는 원몽이라고도 함)으로 알려져 있다. 도일동의 원주 원씨 가문은 대대로 무인(武人) 집안으로 이름이 났다. 입향조였던 원임도 세종 때 무과에 급제했던 무인 출신이며, 원준량도 홍문관 교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무인이었다.
외가로는 외조부 양희증(梁希曾)은 세조, 성종때의 학자인 양성지의 후손이었다.
변방 근무
1564년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은 아들을 무과 초시에 규칙을 어기고 응시하게 했다는 죄로 탄핵당한다. 둘째 원연이 문과라는 것을 볼 때 이때 비리에 연루된 아들은 원균으로 추측된다. 이에 따라 원균은 무과합격이 취소되고 다시 무과를 준비한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후 그는 오위에 입대하여 충순위(忠順衛)에 병력으로 배치된다. 이후 무과에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 무과에 을과(乙科) 2위, 1575년(선조 9년) 잠시 거제현령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함경도 일대에서 조산보만호에 재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7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부락을 토벌한다. 조산보만호로 참여한 공으로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진했다. 이어 종성부사를 지냈고, 1591년(선조 24)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전라좌수사에 제수되었다는 사간원의 비판으로 체차되었다.
그 뒤 병마절도사 이일을 따라 우위 부대를 지휘한 위장(衛將)인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해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이 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1월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변방 근무시 여진족을 토벌한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을 하였다고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나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부령부사로 특진을 한 것은 기록에 남은 확실한 사실 이어서 어떠한 군공을 세웠다는 추측과 혹은 그의 친인척들이 당시 조정의 중진이었기에 이들의 지원으로 승진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또한 시전부락전투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투에서 그는 예비대로서 참전을 해 딱히 군공을 세울 만한 일은 없었다. 시전부락 전투에 참여한 이들은 후에 조선군의 중추로 성장하였고 이중에는 당시 원균과 동급의 신분으로 참전한 이순신 또한 있다.
임진왜란 >> 전란 초기
동래에 부임했을 때 전쟁 장비와 수군은 부족했고 기강은 해이해져, 주변에서 수군을 모집하고 군대를 정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592년(선조 25년) 2월에는 가배포에서 73척의 군선 지휘를 맡았다.
김성일은 초유사로 있으면서 경상도의 전투 상황을 보고했는데 원균은 배 한 척으로 곤양에 숨어 있으며 고성의 빈 성을 탈환하라고 명령해서 나아갔다가 적이 오자 다시 후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원균이 군영을 스스로 불태운 사실과 김준민이 거제도를 지키고 있어 거제도에 아직 적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확인할 수 있다.
부산과 동래가 차례로 모두 함락되자 그는 경남 남해안에서 왜군을 상대했으나 수하에는 다만 4척의 전선뿐으로 전황이 불리하여 퇴각,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을 남겨 본진을 지키고 급한대로 왜적을 막아 진입을 지연시키고,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남해현감(南海縣監) 기효근(奇孝謹)과 함께 삼천포, 사천군 곤양(昆陽), 진해 해구(海口) 등으로 후퇴하여 매복시켰다. 이때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에게 보내 힘을 합쳐 적을 막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각자 지키는 지역의 한계가 있다며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원균은 계속 5·6차례나 부하들을 전라좌수영에 보냈다.
음력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홍(朴泓)이 이끄는 경상좌수영군이 박홍의 도주로 병력들이 흩어진 후, 원균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1만 명의 군사로 부산포로 나아갔으나 적이 너무 많아서 후퇴해야 했으며, 이때 적선이 아닌 어선을 보고 후퇴했다는 설도 있다. 이때 경상우수영의 적선과 물자를 불태운 후 본영을 우후 우응진에게 맡기고 곤양으로 가서 도주하려 했으나 옥포만호 이운룡이 반대해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원균은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
재야사학의 오류 =
재야사학에서는 이때 원균이 10척을 분멸하였다고 말하나 위에 나온 실록 및 다른 공식기록과 모순되는 점이 많다. 원균의 초기 전공에 대해서는 왜란 기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인정받지 못 했으며, 선조도 이순신을 부른 공을 강조할 뿐 초기에 승리했다는 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10척 분멸을 확인할 수 있는 이순신에게 보낸 장계 역시 승전 소식이 아닌 10척을 격파하고 100여 척을 잃었다는 패전 소식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원균행장밖에 없다.
또한 원균행장록에서는 원균이 직접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이순신이 주저하며 거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당시 출동을 위해서는 '경상우수사→경상감사→조정→전라감사→전라좌·우수사'와 같은 절차에 의해서 조정과 전라감영의 승인과 지시가 필요했다. 변방의 수사들끼리의 협의로 출병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순신은 원균의 공문을 받자마자 조정의 구원요청이 있을 경우 바로 출동할 수 있게 관내 기지 함대들에게 본영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차 출동 >> = 옥포 해전 =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고 1592년 5월 3일 출전을 결정한 이순신 함대는 5월 4일 전선 24척 협선 15척으로 출전해 5월 6일 전선 4척 협선 2척의 원균함대와 합류하였다. 이로써 전체 세력은 전선 28척 협선 17척으로 늘어났다. 작전회의후 7일 새벽에 출발해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김완 등이 일본 군선을 발견하고 보고를 해 임진왜란의 첫 번째 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약탈 중이던 소속불명의 30여척의 함대는 응전에 나섰으나 함대의 총통 등 우세한 화기와 궁시를 이용한 공격에 격파되었다. 결국 조선함대는 일본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모두 26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중 이순신 함대의 전과는 21척 원균함대의 전과는 5척이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이 공을 세우기 위해 왜군들의 수급을 베는 일에만 너무 집착한다고 비난하였다.
박홍이 먼저 달아나는 바람에 싸우기 극히 힘든 상황이었다.
4월 말 거제도 옥포에 나타난 왜군을 보고 맞서 싸웠다. 그러나 박홍 등의 도피와 부하들이 탈주하여 세가 불리해지자 그는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한다.5월 2일 조정의 출전 명령을 받은 이순신이 지원하자 5월 6일 이순신과 계획을 세워, 5월 7일 합동하여 옥포(玉浦) 등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5월 7일 왜군이 옥포 앞바다로 집결하자 원균이 직접 북을 울리며 전선을 이끌고 돌진하자, 왜군이 원균 선박에 집중하는 사이 매복해 있던 이순신 등이 일시에 힘껏 공격하여 옥포 앞바다에서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다 계산할 수 없었다. 원균은 적선 안에서 빼앗은 것으로 금칠이 된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측근에게 준 부채로, 도요토미의 친필 서명이 담긴 것이었다. 그는 곧 동생 원전(元㙉)을 보내 사로잡은 왜군 포로 몇명을 왕에게 바치니 왕이 특별히 가상하게 여겨 동생 원전에게 선전관을 제수한다.
원균행장에서는 5월 6일 이순신, 이억기와 만난 후 원균이 직접 북을 울리며 돌진, 이순신 등이 이에 따라 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원균이 적선 안에서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측근에게 준 부채였다고 기록돼 있다.
옥포 앞바다에서 원균은 왜선 30척을 침몰시켰으며, 다시 사천만 앞바다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5월 8일 선조의 어가가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장(諸將)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전군(全軍)이 그의 충심에 감동하였다.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 =
5월 7일 전투를 마치고 영등포로 이동하던 조선 함대는 대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척후장의 첩보를 받고 추격을 시작하여 합포에 이르렀다. 다급해진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 함대는 뭍으로 올라 도망한 일본 수군의 빈 배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거두었고 밤중에 건너편 창원 땅 남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틑날 또다시 군선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수색후 적진포에 이르렀을 때 대·중선을 합쳐 13척의 군선이 포구에 나란히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갑작스런 조선 수군의 공격에 놀란 일본 수군은 군선을 포기하고 육상에서 조총으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이번에도 조선 함대는 그들의 빈 배를 공격하여 대선 9척과 중선 2척을 깨뜨리는 등 13척 모두를 분멸하였다.그 후 5월 9일 이순신은 선조 임금이 관서 지방으로 피난한 소식을 들었고 이후 뱃길을 돌려 5우러 9일 정오 무렵에 전라좌수영으로 귀향하였다. 이번 1차 출동으로 조선 수군은 대선 26척 중선 9척 소선 2척 기타 7척 등 도합 44척을 분멸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이순신·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합포(合浦)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아직 옥포 해전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왜군의 소함대(5척)를 전멸시켰다. 이후 적진포(赤珍浦)에서 다시 왜군을 격퇴한 뒤로 사천(泗川), 당포(唐浦)에서 승리를 거뒀다.
92년 6월 전에 당포에 이르니 적선이 해안가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다. 대선(大船) 한 척은 선상에 3층의 누각(樓閣)을 설치했는데 바깥에는 홍라장(紅羅帳)을 드리웠고, 그 장막 가운데 한 명이 금관(金冠)을 쓰고 비단옷을 입고서 여러 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제장(諸將)들이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달려들어 순천부사 권준이 아래서 화살을 올려 쏴 한번에 명중시키자 금관을 쓴 자가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니 나머지 적들은 놀라 흩어져 서로 물에 뛰어들어 죽는데, 갑자기 적선 40여 척이 뒤따라 와서 습격하니 우리 수군도 배를 돌려 힘껏 싸워 저녁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원균은 급히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적들은 밤을 틈타 도망갔는데 이 날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또 도착하였다. 이억기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동도(東島) 바다로 돌진하여 적의 다섯 장수가 함께 탄 배를 붙잡았다. 율포(栗浦)·가덕(加德)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율포와 가덕 전투 당시 그가 붙잡은 적선이 55척이고, 왜적 수급 103급을 베었다.
재야사학의 오류 =
위에서 원균이 옥포해전 때 부채를 노획한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조선 수군이 이 부채를 노획한 것은 옥포 해전이 아닌 2차 출동 때의 당포 해전으로 난중잡록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행장에서는 원균이 연명 장계를 올리자고 했으나 이순신이 이를 거절하고 단독으로 장계를 올려서 원균의 공을 빼앗았다고 돼 있지만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나온 전과는 21척으로, 원균행장의 기록대로 100여척을 불태운 것이라면 그 중 사분의 일도 되지 않는 21척만 자기 공으로 삼았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옥포해전의 공식적 전과는 전부 합쳐 26척이다. 마지막으로 원균은 원균자신이 올린 장계에서 자신의 공적은 30척이 아닌 5척이라 보고하였다. 또다른 오류점으로는 수군의 1차 출동에는 참가하지 않은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이 참전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원균행장록에서는 원균이 이 해전의 주역인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형식적으로 이순신과 원균은 동급으로 둘이 같이 지휘를 하였으며 실제적으로는 전력의 차이가 6~8배에 달한다.
1차 출동과 2차 출동 사이
원균이 "왜군 선발대가 사천포와 곤양까지 쳐들어왔고 자신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인 노량해협까지 밀려났으니 급히 출동해 달라"라는 구원요청을 하자 이순신이 출동하여 조선 수군의 2차출동이 되었다. 이 기간에 원균이 자신이 전공을 올렸다고 보고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요청을 받아 지원한 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전라좌수영으로 되돌아갔다. 5월 21일 왜선(倭船)이 당포로부터 남해바다로 나오자 원균은 수군이 바다 어귀로 나가 교전했다. 그러나 여러 섬에 있던 왜적의 무리가 사방에서 일제히 지원하자, 이순신 등은 이미 본진으로 돌아갔기에 원균은 왜군을 육지로 유인, 육지에 올라서 그들의 칼날을 피하고, 다시 사람을 보내 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고 노량(露梁)으로 옮겨 정박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신이 또 주사를 이끌고 와서 모여 곤양(昆陽) 땅에서 적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사천(泗川) 바다에 이르러 연달아 싸워 모두 부수었다.
재야사학의 오류 =
"원균은 왜군을 육지로 유인, 육지에 올라서 그들의 칼날을 피하고"라고 써져있으나 실제로는 싸워보지도 않고 밀렸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2차 출동
:원균의 구원요청을 받고 우수사 이억기에게 뒤따라오라는 공문을 남긴 채5월 29일 노량으로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그곳에서 원균과 합세하였다. 이 날 근처를 지나는 일본 군선 한 척을 추격하던 중 사천 선창에 나란히 배를 댄 일본 군선 12척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지세가 조선 함대에게 불리해 후퇴하는 척 유인작전을 펼쳤으나 통하지 않자 조수가 밀물로 바뀐 틈을 타서 이 해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거북선이 돌격하여 전열을 흩트리자 이 기회를 틈타 군선 13척 모두를 분멸하였다. 이 해전에서는 이순신을 포함하여 부상자가 3명 발생하였고 사상자는 없었다.
재야사학 기준 =
6월에 당항포(唐項浦)에서 승리를 거둔 뒤, 7월 6일 그는 이순신 등과 함께 또 노량(露梁)에서 모여 적선 63척을 불태우고, 안골포(安骨浦) 앞바다에 도착하여 적선 40여 척을 만나 교전했다. 이때 이순신과 번을 갈라 교대로 공격하자 왜군은 일단 거제(巨濟)·부산(釜山)으로 후퇴했다.
임금은 원균에게 특별히 상으로 말 한필을 내려 격려한다.
재야사학의 오류 =
원균행장에서는 한산도 대첩을 노량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2차 출동에 있었던 율포 해전이 이 노량 해전의 뒤에 와 있고, 해전이 일어나지 않은 가덕에서도 해전이 일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당항포 해전에 대한 내용과 '거북선+학익진'의 설명이 빠져있다. '적장 5인이 함께 탄 배'는 미끼배로 보인다. '공이 붙잡은 적선이 모두 55척'이라고 했는데, 원균 함대의 10배가 넘는 규모로 과장되었다. 또한 한산도와 안골포해전에 대해서는 7월 30일에 조서를 내렸다고 하였지만 〈선조실록〉에는 8월 24일에 원균의 장계를 처음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날짜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네차례의 장계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단 한 차례의 장계이다. 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실들을 왜곡하여 기록해 놓은 후 원균행장록은 이후 부산포 해전과 이듬해에 있은 해전들을 다 빼놓았다.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원균행장록에는 원균이 중앙으로 돌격해 들어갔고, 원균의 병선들은 층루선들과 충돌했으며, 원규의 장졸들은 왜선단에 올라가서 백병전으로 대승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원균 함대가 이렇게 해전을 벌였다면 옥포해전에서 이미 전멸했을 것이므로 원균행장록에 기록된 원균함대는 유령 함대가 되고 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실제로 그렇게 적군에게 중앙으로 돌격했다면 원균의 함대는 조총의 일제사격을 받아 원균함대의 갑판은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고 둘째, 왜선단은 학익진의 일시집중타를 맞아 화염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원균함대도 함께 불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의 장계에 나온 해전들이 다른 기록들에 교차 검증이 되는 데 반해 이 해전들은 원균행장에만 기록돼 있다.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이순신으로부터 병력 지원 요청이 있자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음력 7월 4일에 선박을 이끌고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군사들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이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들이자 원균은 뒤에서 추격하는 척 하며 일본군을 이순신이 파놓은 함정으로 몰아갔다. 이순신 등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순신군의 승전을 본 후 원균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경상우수영으로 되돌아왔다.
이순신과의 갈등
그러나 옥포해전에 대한 공으로 조정에서 이순신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그에게는 1품계 아래인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내렸다. 조정의 상신·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 다툼이 있었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하였다. 이때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해 음력 9월 자헌대부 중추부지사(知事)로 승진하였다.
이순신이 남인인 유성룡과 권율과 친분관계가 있어 이원익 등 동인으로부터 호평을 얻자, 윤두수 등의 서인들은 원균을 옹호한다. 동인 중 아계 이산해 등이 이례적으로 그를 변호하고 그를 지원하였는데, 이산해는 정철의 처벌 문제와 우성전의 기생 첩 문제를 감싸는 문제로 유성룡, 권율 등과 알력이 있었고, 이들을 불신했다. 유성룡, 권율 등에 대한 불신은 원균에 대한 호평으로 이어졌고, 동인이 남북인으로 분당한 뒤에는 북인들 역시 원균을 옹호했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익은 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계속된 원균 탄핵을 두고 선조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사료를 살펴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1594년 1월 15일 이순신에게 광해군의 분부를 전달하는 서한이 왔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이튿날 17일 이순신은 광해군에게 장계를 띄워 보냈다. 2월 2일 광해군에게 올린 장계의 회답이 왔고, 4일 광해군의 명령이 내려왔다. 9일 이순신은 광해군이 문책한 데 대해 답을 보냈다. 위 기록을 살펴보면, 그해 1월부터 2월 사이에 광해군과 이순신은 최소한 세 번 이상 편지를 주고받았다.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라"라는 명령에 대해 이순신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광해군이 이순신을 여러차례 불렀는데 응하지도 않았다는 선조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선조는 이순신을 냉대하면서도 원균은 높이 평가했다. 이순신이 공을 세워 보고할 때는 장수가 싸워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냉대하고 오히려 중국에서 원병으로 온 장수들의 활약이 더 크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또한 원균이 부정을 저질러 사간원에서 탄핵을 받을 때나 이원익이 혹평에 가까운 평가를 하고 장수로서는 문제점이 있다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신임하고 옹호하였다. 전란후에는 선무공신을 정하는 자리에서 시작전 원균의 공이 크다고 하였고 본래 선무3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가 선조의 발언과 전사한 까닭에 선무2등공신으로 책정된 원균을 선무1등공신으로 올려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냉대와 원균에 대한 호평은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난 것에 대한 자괴감 이몽학의 난으로 인해 흔들린 왕권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군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하였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유명한 의병장은 낙향 혹은 사형을 당했고 유명한 예로는 김덕령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군권을 한손에 쥔 권율의 경우는 매일 같이 선조에게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지휘, 통솔능력 논란
1596년 7월에 이몽학(李夢鶴)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덕령 등이 하옥되는 등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이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좌병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북인들과 서인들은 유성룡과 권율이 이순신과 친한 점을 들어 남인에서 그를 모함한다고 성토했다.
위 사료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신료들이 원균의 지휘능력에 관해서는 불신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때 일본군 첩자의 주장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에서 믿었다. 위유사(慰諭使) 황신(黃愼)을 보내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비밀히 통보하였으나 이순신은 적에게 모계(謀計)가 있음을 알고서 여러 날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선조는 요시라의 말을 들은 김응서의 보고가 들어 오자 태도를 바꿔서 이순신이 일부러 나가지 않은 것처럼 주장하였고, 이것을 핑계로 통제사에서 파직시킨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고 옥에 갇히자 2월 그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원균은 이때 자신이라면 부산포 앞에 나갈 것이라는 상소를 올린다.
경상도의 주요 항구/포구 및 거점들이 왜군들에게 모두 점령되어 있는 데다가 왜군들이 곳곳에 왜성을 쌓아서 해로를 감제하고 있는 점을 완전히 배제해 실효성이 없는 주장이었고 실제로 원균은 수사로 임명되자 말을 바꾼다. 또한 이는 요즘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육군군단장 내지 야전군사령관급이 해군참모총장의 작전에 대해서 왈가왈부한 것으로 심각한 월권행위이다.
이후 조정에서 그를 수사로 재임명하자는 논의가 있던 중 1597년 정월 이순신이 순신이 두류(逗留)하여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군기(軍機)를 그르치게 되었다는 이유로 언관들의 탄핵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고 옥에 갇히자 2월 그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여 임시로 이순신이 맡고 있던 삼도수군 통제의 업무를 맡았다. 이때 류성룡 등은 이순신의 편을 든 반면 아계 이산해, 오음 윤두수 등은 흔들림 없이 원균을 지원했다.
거제도 전투
그러나 원균은 통제사가 되자 역시 나가기를 주저했다. 원균은 '적이 거짓말로 속임을 미루어 살피고서 아군의 힘으로는 부산 바다로 들어가 토벌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조정에서 듣지 않자, 또 아뢰기를, '그렇다면 안골포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먼저 육군으로써 몰아낸 이후에야 들어가 싸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비변사에서는 나무하러 온 적을 잡아서 공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선조는 나무하러 온 적 역시 적이라면서 상을 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성 현령 조응도와 140여명의 병력이 전멸하고 판옥선을 뺏겼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일본에서 이것을 항의하면서 원균이 공격하지 않기로 해 놓고 각기 32명과 15명의 나무하러 간 병력을 죽였다고 하면서 포상은 흐지부지된다. 피해를 입은 측에서 주장하는 수가 더 적고 원균이 올려보낸 수급이 47급이었다는 것에서 일본측의 주장에 신뢰성이 있으며, 이 전투 아닌 전투에서 원균은 47명을 잡는 대신 140명과 판옥선 한 척을 잃은 패전이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부산 해전과 퇴각
1597년 7월 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수군에 첩자를 보냈다. 도요토미가 보낸 첩자 중 경상우수영에 파견된 요시라는 경상우수사 김응서를 속였다. '왜선(倭船)이 지금 연이어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주사(舟師)로 요격한다면 오히려 이득을 취할 것이오.'하였다. 이때 원균은 왜인의 말이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출전을 명하여 독전(督戰)하였다. 6월 말 원균은 수군을 이끌고 웅천(熊川) 앞바다로 나갔으나 평산포만호 김축과 보성만호 안홍국이 적탄을 맞아 전사했고, 수군은 별 성과 없이 돌아오게 된다.
이때 원균은 2월 초에 이순신이 동원했던 63척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판옥선 134척을 동원했다. 그러나 왜군의 추가 지원군이 나타나자 원균은 바로 군대를 물리고 지원군을 요청했다. 원병(援兵)을 더하여 다시 진격할 계책을 청하였다. 원균은 계속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육군이 없애 주기만을 고집했고, 권율은 원균을 잡아다 원문(轅門)에서 곤장을 쳤다. 원균은 어쩔 수 없이 부산포 앞바다로 향하게 된다.
1597년 음력 7월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이 조선 수군이 무서워서 도주하자, 원균은 급하게 추격하다가 적진 깊숙이 들어간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뱃사람들이 이미 수령(水嶺)을 넘었노라고 고하니 이때 놀라 급히 배를 돌려 퇴각했지만 파도에 의해 12척의 배를 잃게 된다. 후퇴 후 물을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급히 내렸는데 가덕도의 적이 공격해 왔고 원균은 400명의 병력을 남기고 급히 퇴각한다. 2월 이순신 역시 가덕도에서 공격받았지만 1명이 전사하고 5명이 생포되자 가덕왜성을 공격했고, 요시라가 급히 건너 와서 포로가 된 아군을 돌려 주는 조건으로 공격을 멈추기로 합의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결과였다.
이에 권율은 원균을 다시 불러 곤장을 치고 다시 부산포로 나갈 것을 종용한다.
패전 그리고 죽음
1597년 음력 7월 15일 원균은 다시 퇴각하여 그날 저녁 온라도(溫羅島)에 도착했다. 이때 원균은 죽음을 각오할 것을 부하들에게 주문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소.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않으니 오늘의 계책으로는 다만 한 마음으로 순국(殉國)하는 것이 있을 뿐이오. 이는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 온 정기수의 보고에도 드러난다.
또 칠천량 패전 이후 원균이 죽지 않았다는 목격담도 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사망 직후
시신은 정유재란이 종결된 후 수습되어 경기도 진위현 도일리에 안장되었다. 후일 원균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 후 그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아 조정에서는 그가 숨었을 것이라 단정하고 그가 나타났을 때 처벌을 건의하는 상소가 올라가기도 한다.
1603년(선조 36)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공신들을 선정할 때 그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나, 패전을 이유로 공을 깎는 것은 부당하다는 선조 임금의 지시로 선무공신 1등으로 책정된다.
그 뒤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증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元陵君)에 추봉된다.
사후
사후 불천위로 지정되고 부인 파평윤씨는 1642년 6월 홍성군 홍주에서 사망했으나 시신을 거둘 이 없었는데, 그해 7월 호노(戶奴)인 백종(白從)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예장하였다.
원균의 묘소 뒤에는 선조가 하사한 말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택당 이식이 쓴 이순신 장군 시장(諡狀)과 정조가 찬한 이순신 장군 신도비명, 오성 이항복이 쓴 전라좌수영대첩비, 우암 송시열이 쓴 명량묘비, 잠곡 김육이 쓴 신도비명,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 기록 등이다. 그 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인 현석 박세채와 송시열의 다른 문인인 후재(厚齋) 김간(金幹, 1646-1732) 등이 행장을 썼다.를 보면, 원균은 만여 명의 대군과 160척의 배를 이끌고 진격하다 야간에 기습한 단 2척의 적을 보고 전군을 이끌고 후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완은 기습을 받은 당시에 원균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후 관작
1603년 음력 6월 선무공신 훈1등에 녹훈되었고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편찬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 있다.
전사 직후 그의 전사 사실이 바로 통보되지 않아 선조실록에는 8월의 기사에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책임을 물어야 된다는 기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인조 반정 이후 기록된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그는 7월 16일 전사한 것이 기록된다.
후일 원균의 선무공신 교지는 후손들에 의해 기증되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
원균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뛰어난 무인(武人)들이었다. 원준량의 차남이었던 원연(1543년 ~ 1597년)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향리에 은거하다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며 정유재란 때에는 적성현감을 제수받아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또 셋째 원전은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당시 고성현감으로 있다가 원균 부대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또 원연의 아들이었던 원사립(1569년 ~ 1610년)도 무과에 급제한 뒤 진주목사, 김해부사 등을 지내며, 여진족과 왜군의 토벌에 공을 세웠다. 원균의 부하에도 남해현령 기효근,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 등이 있다.
부인 윤씨의 친정 가계 >> 평가와 비판 >> 종합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인이었음에도 지나치게 폄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학계에서는 거센 반론을 받고 폐기되었으나 소설과 드라마 등에서 계속 다뤄지고 있다.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탐욕스럽고 잔혹함이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관련 사료들 >> = 실록 기록들 =
1. {{인용문|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겨 제수하였다.
균이 이순신의 차장(次將)이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기고서 절제(節制)를 받지 않으니 순신은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면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누차 도원수로 하여금 공죄(功罪)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균은 더욱 거침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어 하는 말이 모두 추악하였으며, 순신 또한 균이 공상(功狀)이 없음을 말하는 가운데 실상과 다른 한 조목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대부분 원균을 편들었으므로 마침내 모두 탄핵을 당했다.
6.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왕명으로 이순신의 업적을 기린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도록 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정조의 윤음(국왕이 관인과 인민을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문서)이 실려있다. 정조는 원균을 1등공신으로 임명하여 그를 칭송한 선조를 비판하는 위험성까지 감수하여 이순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충무공전서』는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허겁지겁 도망치다 왜군에게 붙잡히자 목숨을 구걸하다 목이 베이는 비굴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정조 집권기에 국책사업으로 이순신을 기리는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당시 정조집권기 조정은 서인계열인 노론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같은 서인인 원균이 아닌 동인 계열의 이순신을 기리는 전서를 펴냈다는 건 당시 사람들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의미있는 증거다.
하였다.
그외의 기록들 =
1. 기록에 의하면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에게 위임받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오던 조선인 여성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여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 속였다. 이후 난중일기에 의하면 두번 더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2. 난중잡록에도 그에 대한 비판이 나와있다.
『은봉전서』의 저자 안방준은 이항복이 더 강한 어조로 원균을 비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따지고 있다. 안방준은 경상도에서 활약한 의병장으로, 원균과 같은 당파인 서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원균과 친인척 사이였고, 현장에서 직접 활동했기에 원균에 대해 있지도 않은 험담을 지어낼 가능성은 없다.
4. {{인용문|원균은 나의 중부 동암공(안중홍)의 처 원씨의 친족이다. 그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중부를 찾아와 인사하고 말하기를, "나는 이 직책에 오른 것이 영광스럽지 않고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값은 것이 통쾌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원균이 이순신을 몰아내고 삼도 수군통제사로 부임하기 전 먼친척 되는 안중홍을 찾아가 나눈 이야기로서 여기 나온 조괄과 기겁은 중국 전국시대 장수로서 자신의 전임자를 몰아내고 싸웠다가 대패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6.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기록들이다.
2월 8일. 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였다. 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는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온 진중이 바라보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2월 22일 (중략) 곧이어 진도(珍島) 상선(上船)이 또 적에게 둘러 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돌아서서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 때문에 경상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수사 때문이다.
2월 23일. 원 수사(원균)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2월 28일.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항으로 향하는데 우부장(김득광)이 변고를 알려왔으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군관의 배와 가덕 첨사(전응린)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수사에게 보냈던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
3월 2일.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
5월 14일. 선전관 박진종(朴振宗)과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복윤(福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우수사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렸는데 온 배 안 장병들로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5월 15일. 아침에 낙안군수 신호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尹東耈)가 그 대장의 장계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
5월 21일. 원 수사가 허위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5월 27일. 영남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5월 30일. 원 수사가 송 경략[36]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
6월,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었지만, 기효근과 원균은 병선에 '예쁜 색시'를 태우고 다녔다.
6월 10일. 새벽 2시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의 시기(猜忌)와 흉모(凶謀)는 형언할 길이 없다. 이날 밤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6월 11일. 아침에 적을 토벌할 일로 공문을 만들어 영남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라고 하였다.
7월 28일. 사도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보자기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하는 짓들이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경상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 곤장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8월 2일. 어두워질 무렵에 우수사가 배에 와서 전하기를 "원 수사가 허망한 말을 하며 나에 대하여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더라"고 하였다. 모두 망령된 짓이다. 무슨 상관이 있으랴.
8월 6일.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영공,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장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8월 7일. 저녁에 경상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公)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말 전하기를 잘 하니 믿을 수가 없다.
8월 26일.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 정 수사도 모두 모였다. 흥양(배흥립)이 오므로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8월 30일. 원 수사가 와서 영등(永登)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2월 11일. 식후에 활터로 올라가니 경상수사와 우수사 조방장도 왔는데, 같이 술에 취해 있었다.
10월 17일.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5월 2일[40]. 진흥국(陳興國)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원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에서 와서 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5월 8일.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음흉한 원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중략) 원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5월 28일. 늦게 출발하여 하동(河東)에 이르니 현감이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성 안의 별사(別舍)로 맞아들여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7월 7일.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꿈에 원공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그 주장[43]이 실책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원수(權慄)에게 붙들려갔다고 하였다.
7월 18일.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해군이 대패했는데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 등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고 하므로 통곡하였다.
7. 역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택당 이식(1584-1647)이 지은 시장(諡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덕수 이씨로 좌의정 이행의 현손이며 청음 김상헌과 함께 척화론(斥和論)을 펴다 심양으로 잡혀간 절신(節臣)이다. 그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한학사대가(漢學四大家)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이순신의 시호를 청하는 글에 이순신을 옹호하면서 원균을 비난하였다.
난중일기 전체에 원균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특히 휴전 기간과 백의종군 후 권율 휘하에 들어갔을 때에 집중돼 있다. 위의 인용은 2008년 충무공유사를 해석하던 중 발견한 내용이다. 원균은 엄청난 비만이였다. 이러한 원균의 체형과 무능함을 조합해서 전라남도 곡성에 사는 생원인 오천뢰(吳天賚)는 원균을 비꼬는 한시를 지었다.
원균은 못생겼다. 실록에 묘사한 원균의 외모를 보자면 몸매는 비만에 얼굴빛이 흙빛이며 입이 비뚤어져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임진왜란 당시 원균의 공적과 관련하여, 선조가 그를 선무공신으로 녹훈할 때 최종적으로 책정된 공신의 등급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
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원균이 선조에 의해 받은 선무공신의 최종 등급을 확인해야 한다.
-
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원균의 공신 책정 과정과 관련된 기록을 본문에서 탐색한다.
- 본래 선무3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가 선조의 발언과 전사한 까닭에 선무2등공신으로 책정된 원균을 선무1등공신으로 올려주기도 하였다.
-
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최종적으로 결정된 등급에 대한 문구를 선별한다.
- 선무1등공신으로 올려주기도 하였다.
-
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3등에서 2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1등으로 격상되었음을 파악한다.
-
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원균의 최종 선무공신 등급은 1등임을 도출한다.
- 선무1등공신으로 올려주기도 하였다.
-
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인 '선무1등공신'을 작성한다.
- 선무1등공신
근거 (evidence)
- 본래 선무3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가 선조의 발언과 전사한 까닭에 선무2등공신으로 책정된 원균을 선무1등공신으로 올려주기도 하였다.
- 선무1등공신으로 올려주기도 하였다.
- 선무1등공신
최종 답변 (final_answer)
선무1등공신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원균의 공적과 관련하여 선조는 그를 최종적으로 선무공신 1등으로 책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