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김종수(金鍾秀, 1728년 ~ 1799년 1월 7일)는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字)는 정부(定夫), 호는 몽오(夢梧)·진솔(眞率)이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개요
한성부 출신. 김구의 증손이며 김치만의 아들이고 김재로의 종손이자 김치인의 5촌 조카이며 김종후의 동생이다. 사도세자의 정적이었던 김상로, 우의정을 지낸 김약로는 그의 재종조부였다.
175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 음서로 출사하여 세손이던 정조를 보필하였다. 1768년 과거에 급제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1795년에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세손 시절의 정조의 스승으로 당론에 반하여 세손을 옹호하였으며, 그 뒤 정조 즉위 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조에게 도의정치를 역설하며 임금이면서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스승이 될 것을 건의하였다.
당색은 노론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강경파였던 선조들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당숙 김치인과 함께 노론온건파에 가담하였다. 세손 시절의 정조의 사부이기도 했다. 대의명분에 입각한 군사부일체론을 주창하였다. 뒤에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며 임정의 부주석인 김규식의 종고조부이기도 하다.
생애 >> 생애 초반 >> 출생과 젊은 시절
김종수는 1728년(영조 5년) 의정부우의정을 지낸 김구(金構)의 증손자이자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이고, 진위장군(振威將軍) 행세자익위사시직(侍稷)을 지낸 김치만(金致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풍산 홍씨는 홍석보(洪錫輔)의 딸이다. 부인은 홍문관교리를 지낸 윤득경(尹得敬)의 딸이다.
그는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형 김종후는 산림의 대학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가계는 노론 벽파였고 재종조부 김상로와 김양로는 정승을 지낸 노론벽파의 거두로서, 특히 재종조부 김상로는 사도세자의 정적이자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선 인물로 단죄되었으나, 그의 종조부 김재로, 당숙 김치인과 그는 노론 청명당으로 전향하였으므로 정조 즉위 후 벽파는 타격을 받았으나 그의 가족들은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외가쪽으로는 홍석보의 동생이 홍현보로, 홍봉한과 홍인한은 그의 외종조부 홍현보의 아들들로 그의 외당숙뻘이었다. 혜경궁 홍씨와는 내외종 6촌간이었고, 그와 함께 세손시절의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은 12촌이 되는 외가 친척이 된다.
1750년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생원과 진사가 되고 곧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1766년(영조 42) 11월 영조가 친히 낸 과차에 수석하여 바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해 음서로 출사하여 세손궁에 보직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세손의 스승과 대의론
그 뒤 세손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1768년(영조 44년) 군수(郡守)로 재직 중 그 해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보직되었다. 이때 세손사부가 되어 세손이었던 정조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종수는 정조가 왕세손일 때부터 정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그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다. 김종수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어 요순시대의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군주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며 군주 스스로 학문과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세손에게 만인을 포용하는 어버이가 되어야 하며, 항상 높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것을 이룩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종수는 세손에게 임금이면서 스승이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는 또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잘못이고, 학자의 해석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허목과 윤휴를 비난하면서도,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정조 역시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동시에 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받아들였다.
그 뒤 예조정랑, 홍문관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세손시강원필선(弼善)으로 다시 세손을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때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역시 종조부인 김약로, 김상로는 왕실외척이 주도하는 탕평당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김종수는 외척의 정치 관여는 부패와 비리를 낳을 뿐이라며 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반면 김종수의 종백부이자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은 조카 김종수와 마찬가지로 탕평당 소속 부친의 정치노선에서 벗어났다. 즉 외척이 주도하는 탕평당에 대항한 청명당의 지도자로 변신한 것이었다. 이는 군주나 스승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그 둘을 겸함으로써 이른바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종수는 통치자가 바른 학문을 안다는 것은, 군주 자신이 진정으로 학문을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가능하다고 교육했다. 사도세자와 그 후손은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노론의 당론을 어기고 일부 인사와 함께 세손은 영조의 적법한 계승자라 주장하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이후 정조 즉위 후 개혁작업을 하면서도 같은 노론 인사들의 처벌을 묵인,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홍국영의 권력이 강해지고,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며 비판했다. 이후 김종수는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재야의 산림 유생들을 배후에서 홍국영 탄핵 상소를 올리도록 부추겼다. 정조는 김종수를 이용하여 홍국영을 실각시켰다. 정조의 뜻을 알게 된 김종수는 홍국영 탄핵에 앞장섰다. 비록 임금의 지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어제의 동지인 홍국영을 물어뜯는 김종수의 태도를 두고 혜경궁이 정조에게 "어쩜 저럴 수 있느냐?"고 말하자, 정조는 "지도 살아야 하니 어쩌겠습니까?"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래서 노론 붕당의 초대 당수 송시열의 위패를 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모신 반면, 영조가 되돌려준 소론 붕당의 영수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 부자의 관작은 다시 박탈했다. 그는 정조에게 "인륜이 무너지는 정도의 변고를 당하고도 올바름을 잃지 않아야, 순(舜) 임금이나 주공(周公)과 같은 옛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개인적인 효도는 효도로서 하고 정치원칙(의리)는 정치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처리방식을 제기했다.
저서 >> 사상적 측면 >> 왕도 정치
그는 대의명분을 중시하였다. 사후에는 음흉한 모사가로 묘사되었지만 생전에는 솔직하였다 한다. 그는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간주하고, 왕도정치를 재건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임금은 통치자이자 아버지이며 동시에 스승이어야 한다(군사부일체)는 이론을 주창했다. 동시에 그는 율곡 이이의 경장기에 대한 것을 설파하기도 했다. 남인의 채제공 등은 역적, 간신이라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이론 또한 국익을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임금은 통치자이자 아버지이며 동시에 스승이어야 한다(군사부일체)는 이론에 대해 남인과 소론에서도 그를 공격하면서도 그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다만 심환지 등은 현대의 지도자가 반드시 요순일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후 노론의 지도자로 몰리면서 고종 때까지 사실상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이며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매도되었다.
대한민국시대의 역사가 박광용에 의하면 "김종수의 보좌로 정조는 '통치자이면서 스승'이라는 시대에 정확히 부응하는 이미지 메이킹 그는 정조의 즉위를 인정하고 군주이므로 소임을 다해야 된다고 주창하였다.
그는 같은 노론이면서도 노론 벽파를 공격했다. 그는 문제가 있다면 김석주처럼 지친과 친분있는 자들과도 인연을 끊겠다고 공언,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김귀주, 김관주, 정후겸 등의 벽파 외척을 임금의 자리를 노리는 역적들이라며 공격하였고, 홍국영이 왕실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려 하자 산림 유생들을 동원하여 홍국영을 공격하여 몰락하게 했다. 한편 노론 시파와 소론 시파에 대해서도 공격하였다. 소론 시파 조재한 등이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주청하자 그는 이들을 영조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역신들로 공격하였다.
김종수는 정조 즉위 초반 노론 내 정조의 지지자로 활동하였다.
탕평책에 대한 반대
김종수는 정조의 탕평정치, 즉 각 당파의 강경파를 함께 써서 조화를 도모하는 대화합의 정치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지는 않았다. 군자이지만 결점, 병이 있는 사람도 많고, 소인배이지만 재주가 있는 사람도 많지만, 결점 때문에 군자를 버린다든지, 재주 때문에 소인을 쓰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에 따라 남인 채재공 등을 역적이라고 성토하면서도, 그의 의견도 나라를 위해서는 필요한 의견이라 하였다.
김종수는 소인배들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재주가 있다면 재주 대로 채용은 하되, 고위직이나 중요한 자리, 인사와 병권을 담당하는 부서로는 절대 보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소인배들은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에 두면 족하다는 것이다. 즉, 소인들은 조정이니 조화니 하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만 등용하면 된다는 견해다. 소인배라 하여 그 재주까지 무조건 내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계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남인, 소론은 물론이고 노론계 일각에서도 트집을 잡아 그를 비난하는 소재가 되었다.
가족 관계
노론 벽파의 거두이자 사도세자 숙청에 앞장선 이 중의 하나인 김상로는 그의 재종조부였다. 부자 영의정인 김재로와 김치인은 각각 그의 종조부와 5촌 당숙이었다. 그 밖에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규식은 그의 4대손이었다.
성품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좀처럼 바꾸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관철시키는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김종수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였다. 이 때문에 순조 연간에는 정조의 치적을 파괴해버린 벽파 정치집단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몰려 심환지, 김관주, 김달순 등과 함께 역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조의 뜻을 전달받은 뒤에 남인과 소론에 대한 공격과 원칙론을 견지하면서도 그들의 의견도 국가를 위해서는 일부 취할 만한 필요한 여론이라고 보기도 했다. 사후 벽파로 몰렸지만, 그는 벽파 등 외척의 정치 관여를 강하게 부정, 비판하였다.
기타 활동
1779년(정조 3년)에 형 김종후(金鍾厚)와 함께 5대조 김극형의 시문집인 청풍세고 (淸風世稿)를 간행하였고, 그해 할아버지 김구(金構)의 시문집인 충헌공유고 (忠憲公遺稿)를 영인하였다.
연암유적
1777년(정조 1년) 그는 앞서 죽은 아들 김약연과 절개를 지키고 죽은 며느리 홍씨를 추모한 연암유적(淵庵遺迹)을 편찬했다. 연암유적의 전반부는 아들 김약연의 시문집 모음이고, 후반부는 며느리 홍씨가 친정부모에게 올린 편지에는 부모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용서하고, 마음 아파하지 말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홍씨는 시부모에게는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아서 시부모를 모시려고 하였으나, 슬픔을 도저히 풀 길이 없어 죽는다고 하며, 자신을 용서하여주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는 며느리 홍씨의 행장을 친히 썼다. 행장에는 홍씨가 남편을 잃고 오히려 시부모를 위로하던 모습들이 애절하게 그려져 있다. 연암유적을 편찬할 무렵 그는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정조 제거에 혈안이 된 벽파 세력 공격에 전념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김종수가 주장한 탕평책에 대한 견해에 따르면, 재주가 있는 소인배들을 어떤 범주의 직책에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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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김종수가 소인배(재주 있는 자)를 등용할 때 분류하여 배치하고자 했던 직책의 범주를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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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김종수의 탕평책 관련 견해와 소인배 등용 방식에 대한 내용을 추출한다.
- 재주가 있다면 재주 대로 채용은 하되, 고위직이나 중요한 자리, 인사와 병권을 담당하는 부서로는 절대 보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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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소인배가 배치되어야 할 구체적인 직무 범주를 명시한 구절을 선택한다.
- 소인배들은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에 두면 족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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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고위직/주요 부서(인사, 병권 등)는 배제하고, 말단직(문지기, 악사, 행정관리 등)으로 분류하여 배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통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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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소인배는 고위직이나 핵심 부서가 아닌, 한두 가지 재주만 사용하는 말단직에 배치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에 두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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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문맥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직책 범주를 포함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
근거 (evidence)
- 재주가 있다면 재주 대로 채용은 하되, 고위직이나 중요한 자리, 인사와 병권을 담당하는 부서로는 절대 보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 소인배들은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에 두면 족하다는 것이다.
-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에 두면 족하다
-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쓰는 말단직
최종 답변 (final_answer)
김종수는 재주가 있는 소인배들을 고위직이나 인사 및 병권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에 보내지 말고,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와 같이 한두 가지 재주만 사용하는 말단직에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김종수는 재주가 있는 소인배들을 문지기나 궁중악사, 말단 행정관리와 같은 말단직에 두어 재주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