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이범석(李範奭,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겸 저술가이다.
이력
그는 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1945년 조선 광복 직후 귀국을 시도했지만 강제로 상하이에 억류 조치 처분되었다가 이듬해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호상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반공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김구의 남북협상에 반대하여 이승만에 협력, 단독 정부 수립에 동참하여 1948년 7월 31일에서 1950년 4월 20일까지 제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하였고 8월 15일부터는 국방부 장관도 겸임하였다. 이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52년 제2대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1956년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의 견제로 낙선하였다. 1960년 이후에는 야당 정치가로 활동하다가 탈당,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초기 시대 나치 연구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조선 세종대왕의 5남이었던 광평대군(廣平大君)의 17대손이며 이문하의 아들이다. 호는 철기(鐵驥), 자는 인남(麟男)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왕운산(王雲山), 인남(麟男), 철기(哲琦), 이국근(李國根), 이국진(李國鎭) 등이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생애 >> 생애 초기 >> 출생과 가계
이범석은 1900년 10월 20일 대한제국 한성부 용동에서 이문하(李文夏)와 연안 이씨(延安 李氏)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조선 왕족으로, 세종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광평대군의 후손이었고 광평대군의 셋째 손자인 청안군 이영의 셋째 아들이었던 정안부정 이천수(李千壽)의 15대손이었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15대조 정안부정에서 끝났고, 14대조 이한(李漢)은 음직으로 출사하여 배천군수(白川郡守)에 이르렀다. 이후 줄곧 벼슬을 배출하여 한성 근교에서 거주하였다. 그 뒤 증조부 이목연(李穆淵)의 대에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으로 이주하였으나 관료 생활을 하던 아버지 이문하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상경했다.
증조부 이목연은 형조판서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양자로 들어온 종조부 이인명(李寅命)은 예조판서와 의금부 판사를 역임하였다. 할아버지 이인천(李寅天)은 서자였으며 부사용과 학관을 지냈다.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교촌리에는 종조부 이인명 대부터 거주하던 집이 있으며,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버지 이문하는 구한말의 관료로 농상공부 참의와 궁내부 참사관을 역임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이문하는 당시 대한제국 관료였으며 농상공부의 비서관으로 근무하여 외근이 잦았으며, 어머니 연안 이씨는 심장병으로 와병중이었다. 위로는 형 이범홍, 누나 이범호, 누나 이범숙이 있었고, 후에 계모 김해 김씨에게서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기도 제물포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풍족한 가정 환경과 개화 성향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나 불행하게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게 되었다. 1911년 아버지는 강원도 이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이범석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이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년기
개화 사상에 감화된 아버지 이문하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러나 당시 20여세 되던 노비 정태규(丁太圭)는 이범석의 집을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정태규는 어린 주인집 장남 이범석과의 정이 들어 집을 떠나기를 주저하였다 한다. 노비가 아닌데도 집에 두게 되어 지탄을 받게 되자 아버지 이문하는 정태규를 오씨 성을 쓰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의 대대에 병사로 넣어 주었다. 정태규는 이후 박승환 대대의 전투병으로 근무하며 군복 차림으로 종종 이범석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정태규가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되는 것을 보고 이범석은 항일을 결심하고 16세이던 1915년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경성고보 시절 중국으로 망명했다. 1907년 8월 1일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군대 해산명령이 하달되었다. 구한국 군대 해산령에 불복한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하면서 대대 병력은 서울 시내의 일본 군대에게 돌격하여 교전하였으나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경성의 민가에 무차별 난입하여 구한국 병사의 색출작업에 나섰고 이범석의 집에도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그날 초저녁 병정이 쓰러졌다는 마을 주민들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누이 이씨와 함께 마을 어귀로 나갔다가 검은 바지에 붉은 동을 맨 군복차림이던 정태규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정태규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그는 복수심에 불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게 되었다. 그는 후일 이를 신의 계시인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하였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집안에 훈장을 초빙하여 한학(漢學)을 배웠다.
10세에 부친 이문하의 재혼으로 계모 김해 김씨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 20년 연하의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유년기의 이범석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구쟁이였으나, 그를 독립운동가로 키워 낸 것은 계모였다. 되었다.
강원도에 있을 당시 그는 강원도 산골에 은신해 있다가 잡혀가는 의병들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의병들의 은신처를 밀고하거나 수색에 앞장서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헌병보조원이었다. 그 중에는 무장해제 후 변절한 한국군도 있었다 하며, 이범석은 후일 헌병보조원들을 가리켜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라며 개탄하였다. '공을 세웠다고 어깨 밑에 빨간 사람 인(人)자 모양의 견장을 달고 우쭐대는 헌병 보조원들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1913년 3월 이범석은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다.
중학교 재학 시절
1913년 이범석은 집을 떠나 경성으로 유학, 당시 중학교이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추천으로 입학하였다. 이때 박헌영, 심훈 등을 만났고, 그들은 이범석의 동창생이 되었다. 경성고보 1학년, 2학년 재학 중 이범석은 명랑한 성격으로 교내 8선녀로 뽑히기도 했고, 경성 청년회관에 다니며 유도를 배웠다. 2학년 겨울 때에는 스케이트를 배우기도 했으며 경성고보 3학년 재학 중에는 글짓기에 흥미를 두었다. 3학년 재학 중 그는 학교에 한시(漢詩)를 지어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글을 잘 지었던 그는 한문선생인 여자정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는 늘 이범석에게 신동이라 칭찬하면서 앞날에 훌륭한 인물이 되라며 격려하였다.
경성고보 재학 당시 그는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등, 하교하였다. 일본인 재학생들은 그를 수시로 무시하였고, 3학년 1학기 초기에 사소한 말다툼이 감정이 되어 패싸움을 하였다. 교무실에 끌려간 그는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성질이 야만스러워 남을 존경할 줄 모른다는 모욕적인 꾸중을 듣게 되었다. 그 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하고, 이후 중국 항주체육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초 그는 북로군정서의 무기 구입을 담당하였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러시아를 떠나 자국으로 귀국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 체코 군대가 각자 자기가 소지한 무기를 팔겠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자신의 전재산과 교포들의 모금과 모금결사대의 활동의 성과로 체코군으로부터 다량의 탄환과 소포, 중기관총, 포탄, 화약 당을 사들였다.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한 뒤 그는 사관생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1920년 봄 그는 소수의 병력으로 마적과 합세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 일본군의 러시아군 대토벌 작전을 입수했다. 일본군 13사단과 14사단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된 체코군을 석방한다는 구실로 남으로 진군하였고, 21사단은 토문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만주철도수비대는 송화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한다는 것이었다.
청산리 대첩 =
1920년 3월 그는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의 부름을 받고 수천리를 도보로 강행군하여 왕청현에 있는 북로군정서로 가서 연성대장(硏成大長)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중국은 중일(中日) 외교상 부득이 독립군을 간섭하게 되자 길림성의 행정관장은 중국군 영장(營長) 멍푸더(孟富德)를 시켜 1923년 10월에 독립군 부대 및 항일 단체에 대하여 국도(國道)변에서 멀리 옮기라고 교섭함에 그들과 타협하여 앞으로 국내 진입전 전개에 편리한 장백산(長白山) 산속으로 이동해가기로 했다.
8월 23일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학생 3백 수십명을 졸업시키고 그 중 150명과 사령부 경비대원 및 새로 모집한 병사들로 북로군정서 보병 1개 대대를 조직하여 이동했다.
9월 7일 이범석과 김좌진은 병력을 이끌로 청산리로 이동했다. 탄띠와 소총으로 무장 옥수수 가루와 콩가루로 만든 떡과 추위를 견디고 이동 중 천보산(天寶山) 근교에서 일본인 광산을 지키는 광산수비대대를 만났으나 더큰 적을 섬멸하기 위해 그들을 살려두고 진격하였다. 훈춘 일본영사관 습격 당시 도와주었던 마적 대엄귀(戴嚴鬼)의 연락과 정찰대의 보고로 일본군 동지대의 이동경로와 동정을 접하였다.
산맥을 타고 1개월간의 도보 이동으로 20년 10월 5일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산리에 도착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의 토벌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개편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사령관 부관 박영희(朴英熙) 등으로 개편 편성되었으며, 이때 이범석은 다시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隊長) 겸 중대장이 되어 본대인 보병부대 1개 대대를 송림평의 진을 쳤다가 백운평(白雲平) 숲속의 지형에 매복시켰다.
첩보원으로부터 왜병이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은 이범석은 산꼭대기에 올라 망원경으로 일본군의 이동을 지켜봤다. 정탐군을 보내 보병, 포병, 기병, 공병을 합친 병력이 1만 명으로 5만 대군의 선발대라고 하였다. 이범석은 근처 한인 교포와 사냥꾼을 모은 뒤 마을의 부녀자와 노인들에게는 독립군은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총을 가진 병사 수가 적어서 몇 안 되고 굶주려 지쳤다고 증언하도록 사전에 지시했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그는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10월 20일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오래된 말똥을 뿌린 뒤, 일본군의 척후병이 나타나 말똥을 채취하여 오래전에 지나간 것으로 알고 일본군 주력부대 5만이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설을 했다. 10월 21일부터 10월 23일 화룡현내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습격, 독립군 전사자는 20여명이었으나 일본군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다.
퇴각, 이승만과의 만남
청산리에서 성과를 올린 뒤 그는 따로 병력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이주, 새벽 2시에 천수동 골짜기에서 19사단을 공격하고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구출했다. 마록구(馬麓溝)에서는 2천 명의 군사로 일본군을 상대, 한인 교포들이 탄환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90명의 독립군 전사자를 내고 수 백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이후 매년 이범석과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고, 선물과 피복을 보내 왔다. 1920년 이승만은 그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이제는 나도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라며 격려하였다.
1921년 1월 26일 간도참변의 참화를 피해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 이 연합부대는 러시아로 넘어오기 직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서일의 북로군정서, 신흥학교 교관 지청천, 광복단 등 몇 개의 부대가 모인 것이다. 1933년 중국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한인특별반이 편성되자 한국인 특별반 장교대장에 선임되었다. 8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고 8월 18일 미군 중국전구 총사령관 고문 자격으로 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했다가 일본군에 의해 저지당하여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일본군의 저항으로 상하이로 되돌아온 뒤 그는 광복군의 잔여 사무정리로 바쁜 나날을 보냈고, 일본군 및 만주군 패잔병들을 설득, 귀순시켜 광복군에 받아들이는 활동을 지도, 전개하였다. 한편 그는 각국의 중흥사와 근대국가 건설에 관련된 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하였고, 청년운동과 중국 손문의 삼민주의 이념에 관련된 서적도 구하여 독서하였다. 1946년 초 이범석은 비밀리에 광복군 간부 중에 유능하고 동작이 빠른 인물을 비밀리에 한국에 먼저 파견하여 국내 정세를 정탐하게 했다.
1946년 초 미군정청 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가 보낸 밀사를 만났다. 한국 국방경비대의 한국인 책임자를 찾던 하지 중장은 미군 주둔군 경비대 사령관이었던 당시 현역 미국 육군 대령 버나드를 상하이로 보내 그에게 한국 국방경비대의 한국인 책임자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정에 참여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의 거부로 군정청 통위부장직은 류동렬에게 넘어갔다.
광복 이후 >> 광복 직후의 정치활동
1946년 봄, 귀국시에 광복군 육군 중장으로 귀국하게 되었다(그러나, 미 군정은 광복군들도 군인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하였다). 1946년 6월 이범석은 정식으로 귀국할 수 있었는데, 이는 김구가 아닌 이승만의 부름을 받아 귀국할 수 있었다. 6월 22일 비행기편으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귀국 당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를 환대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공식, 비공식 행사에 그를 대동하였으며 내외 귀빈을 만날 때마다 이범석을 소개하였다.
귀국 직후부터 이범석은 청년단체 조직을 추진하였다. 6월 말 미군정청 군정청 사령관 하지와 군정장관 아서 러치를 방문, '청년운동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하지와 러치 장관에게 그가 계획한 청년운동의 목적과 의의를 설명하고 그 운영을 위한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범석은 장준하를 불러서 도와줄 것을 청하였고 이후 여러 청년 및 광복군 인력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들은 민족청년단 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귀국 직후 이범석은 국방경비대의 고문직을 5개월간 맡았다가, 11월 국방경비대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귀국하여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화하고 훈련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 판단,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청년단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날 10인협의회에서 선출한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에 지명됐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그는 미군정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의 광복군 활동과 투철한 반공주의에 투철함을 인정, 도움 요청을 받아들인 하지와 러치는 일본 도쿄에 주둔중인 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에게 원조계획을 상신했고, 맥아더는 하지와 러치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미군정으로부터 원조를 받게 되었다. 한편 이승만, 김구, 김성수가 주도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는 다소 소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청년 운동
1946년 10월 8일자 대동신문에 귀국 소감을 발표하였다.
1946년 10월 9일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을 창설한다. 11월 24일 경기도 수원부(水原府)의 수원역 근처에 대지 5만평을 마련하고 건평 2천평의 건물을 완공하고 전국 각지에서 선발한 청년 2백명을 1기생으로 입소시켜 교육을 시작하였다. 설비는 부족하였으나 군정청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역 유지들의 기부로 숙사, 교사 건물, 강당, 극장 등을 우선적으로 구비하였다. 이범석은 족청의 학과 담당 교수로 강의하였고, 안호상, 정인보, 배성룡(裵成龍), 강세성(姜世聲) 등을 강사로 초빙하였고, 객원 강사이자 정신훈화 교육으로 김활란, 이철원(李哲源), 현상윤, 조소앙 등을 위촉하였다.
그 밖에 김관식, 김활란, 이철원(李哲源), 현상윤, 이용설 등 32인을 족청 전국지역 위원으로 위촉하였고, 이사에는 최규동(崔奎東), 백낙준 등 12명, 상무이사에 김형원(金炯元), 노태준, 박주병(朴柱秉), 설린(薛麟), 김웅권(金雄權) 등을 위촉하였다. 군사 훈련과 이론 교육이 병행되었으며, 1개월간의 과정을 수료한 뒤에는 각기 사회에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여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그는 7기생 부터는 특별히 여성 대원들도 수용하였다.
이후 청년단체를 운영하며 안호상·장준하 등과 민족청년단을 이끌었으나 이범석과 안호상의 노선에 반발한 장준하는 족청을 탈퇴한다. 이후 이범석은 반공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민족청년단은 서북청년단, 백의사 등과 함께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좌파 진영에서는 그의 민족청년단을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비난하였고, 그를 도조 히데키와 비슷하다며 비꼬기도 하였다. 또한 족청이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것을 들어 좌파 진영에서는 그를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1948년 3월 좌우대립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두한에 감형을 위해 지청천 등 존 하지에게 진정을 하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교육 활동
1945년 10월 조선유도협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귀국 후 그는 조선유도협회의 회장직을 흔쾌히 수락하였으며 대한유도학교의 창립을 적극적으로 후원, 도와주었다. 1950년 11월 대한유도연맹과 대한연무관이 통합하여 대한유도회로 개편되면서 대한유도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53년 9월 이범석은 이승만으로부터 족청계 제거라는 압박을 받게 되었고 이는 이범석이 대한유도회 회장직과 대한유도학교 학장직을 수행하기 힘들게 하였다.
내각 조각 전 김성수, 조소앙, 이윤영 등과 함께 국무총리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서울 출신인 윤치영과 안면이 있었고 그의 후처인 이은혜와는 같은 지역에서 자랐으며 먼 인척간이었다. 그는 한민당 인사들을 꾸준히 방문하고, 한민당 관계자들의 행사에도 꾸준히 방문하여 친분관계를 쌓아 두었다. 그가 총리로 지명되었을 때 한민당의 반발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총리 지명 =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회 주최의 정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에게 국무총리직이나 국방장관직을 제의하거나 언질을 주지는 않았다.
7월 29일, 국회에서 총리서리 이윤영에 대한 총리 인준 거부로 이범석이 총리에 지명되었다. 7월 29일 총리로 지명되자 그는 바로 이화장으로 달려갔다. 이승만은 그에게 총리로 지명했음을 알리고 국방부도 겸할 것과 남들보다 바삐 움직일 것을 주문했다. 그가 총리에 지명되자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가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김성수는 한민당 당원으로 민족청년단의 간부 훈련을 받은 조영규(曺泳珪)를 통해 방문 연락을 제의했고 평소에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그는 직접 방문을 약속했다. 김성수를 방문하기 직전, 김성수는 조영규를 통해 그의 총리 인준을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7월 29일 저녁 만찬에서 김성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내각의 각료배석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한민당 내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총리 인준은 무난히 통과되었다. 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지 못하고 이윤영이 퇴짜맞다가 이범석을 지명하니까 한민당 쪽에서도 더이상 반대할 수 없고, 무소속 쪽에서도 일부가 동의를 해주어서 초대 국무총리에 당선될 수 있었다.
제1대 국무총리 시절 =
7월 29일 오전 그가 국무총리에 지명되자 29일 낮 기자들은 우이동의 족청 훈련소를 방문하고 귀가하던 그에게 총리직 사전교섭 여부를 질문하였다. 그러나 그는 '본인으로서는 교섭받은 일이 없고 따라서 국회의 인준 여하를 고려한 일도 없다. 이 시국에 있어서 국사를 담당하려면 누구나 정당정파는 물론이요 국민 전체의 협조를 얻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7월 30일 다시 이승만을 찾아가 김성수가 천거한 8명을 장관으로 입각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철기, 그사람 언제부터 알고 있어?', '그 사람 보다 좋은 사람을 내가 의중에 두고 있네.', '왜 하필 그사람인가?' 이승만은 그가 인사청탁을 받은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러나 총리를 대통령의 ‘비서실장’ 정도로 여긴 이승만 대통령 아래에서 초대 총리 이범석도 총리의 역할과 위상을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국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자마자 “국무총리의 정견이라는 것은 대통령을 보필하여 대통령의 정견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고 총리의 역할을 규정했다. 부완혁은 뒤에 장준하 등과 사상계에서 일하기도 했다.
국무총리 취임 초기부터 그는 장관 승인 문제로 시달려야 했다. 그가 건의했던 김성수 천거 8명 중 3명만이 내각에 기용되고 나머지는 무산되었다. 이후 한민당에서는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비난하였다. 8월 총리취임 직후 국회에 첫 인사를 갔을때, 신익희를 먼저 방문하였다. 신익희는 그의 외삼촌 이태승의 친구였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충돌로 관계가 소원했고, 총리 취임 직후에는 바쁘신 국무총리가 국회에 인사하러 나오셨는데 이왕 왔으니 이자리에서 시정 방침을 듣겠다며 그를 시험하려 했다. 국회에서 시정연설 발표에 대한 사전 연락이 없어서 당황해하였으나 그는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총리의 단독적인 시정연설은 불가능하다며 둘러댔고, 국회의원들은 신익희의 발언에 어폐가 있다고 역지적했다.
7월 29일 결재서류에 내무부장관에 기용예정이었던 장택상과 외무부장관 기용예정이었던 윤치영의 직책이 서로 바뀌어 기록되어, 소식을 접한 윤치영, 장택상의 항의를 받았다. 윤치영과 장택상은 바로 그에게 항의했고 윤치영의 후처 이은혜의 인척이었던 관계로 윤치영의 불만은 곧 수그러들었으나 장택상은 계속 항의하였다. 이범석은 3개월만 참아달라고 거듭 호소하여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국방부장관으로 지목한 한민당계 인사가 승인거부되면서 8월 15일 그는 국방부 장관직도 겸하게 되었다.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게 되면서 행정실무에 익숙치 않았던 그는 초기에 바쁘게 움직였다. 미군정 청산과 미군 주둔을 위해 구 미군정청 관계자를 찾아가 설득을 했고, 총리실에서 결재를 하면서 동시에 하루 3시간은 국방부 장관실에 할당해 군사업무를 보았다. 국방부 장관으로 그는 국방부의 정훈공보 담당 부서인 정훈국 설치와 비밀첩보업무를 맡을 제4국 설치를 건의했다.
그는 제4국을 끝까지 밀고 나갔고, 미군 쪽에서는 그를 꺼렸던 것 같다. 한민당에서도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계속 비난해 왔다. 대통령이 두 명인데 실제적인 대통령은 이범석이고 의례적인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승만은 그의 겸직이 문제된다며 국회에서 말이 많다며 언질을 주던 중, 그에게 겸직 중 한 자리를 사퇴하라고 하자, 그는 국방부 장관직을 사퇴하기로 했다. 한편 일본 육사를 졸업한 친일파 장교들이 한국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범석이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 중에 ‘참회하는 뜻으로 조국 군대에서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는 의혹도 있다.
1949년 3월 이승만의 생일 축하에 참석하였다. 이승만의 생일 때 이범석은 이승만의 탄신축하 연설에서 '각하의 영명하심과 언담원촉하시는 정치적 탁견은 오십 년간 겪으신 신산과 노고와 함께 결정되어 우리로 하여금 독립과 민주주의 정체하에 국가로서 영광과 자유와 평화를 구가케 하였습니다. 라면서 우리 국가민족의 원수이신 각하의 부단하신 평정체적 제분야에 있어서의 위대하신 영도는 우리 대한민국의 세계적 지위를 만방에 헌양시킬 것입니다.'라고 축하하였다. 1949년 주한미군 철수 논의가 나오자 그는 기일은 알수 없으나 언제고 남침이 있을 것이라며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반대에도 소용없이 1949년 6월 미군정 군사고문단은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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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주둔군 반란 사건
1948년 10월 19일 이범석은 4·3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군을 파견했다. '이 반란의 의도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또한 유엔 승인 이전에 전복하려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여수 주둔군 제14연대에서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제주도에 진압군으로 파견하기로 하자 제14연대 내의 좌익세력이 이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4·3 사건 진압 과정에서 그는 경찰권을 지휘하던 조병옥과 경쟁하기도 했다. 여수·순천 사건 소식을 접한 그는 강경 진압을 위해 공군을 추가로 증원, 파견하였다. 하지만 6.25전쟁전 제한된 장비만 지원받은 한국공군에 제대로된 전폭기가 존재하지 않아 L-4 연락기를 무장시킨 그는 연락기에 경기관총을 장착시키고, 연락기는 폭장창이 없어 폭탄을 설치할 수 없어, 폭탄 대신 박격포탄을 설치해서 공격케 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 고문인 로버트 장군은 그의 진압에 반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비행기가 원거리를 비행하기 어려워, 가로수를 베고 도로를 비행장으로 개설하고, 3·8선 주변 병력 일부를 빼서 진압군에 파견하기도 했다. 여수·순천 사건은 곧 진압되었고, 관련자들은 체포·사살되었으며, 육군 소령 박정희 등 군대 내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 당시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라고 주장했는데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 것이다.
정치 활동 >> 한국 전쟁 전후
이범석은 이승만의 측근 중 2인자격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범석의 성장을 경계하던 이승만은 그에게 족청의 강제해산을 권고했고,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의 통합을 통해 족청을 자연스럽게 소멸시켜갔다. 족청이 해산되자 그는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곧 주중화민국 대사로 전출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급히 귀국하였다. 6월 27일 이승만의 호출을 받고 경무대를 방문,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으니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현대전은 옛날과 달라 명성있는 장군의 호령으로 되지는 않음을 지적하고 과학과 질의 전쟁임을 강조했다. 이승만과의 면담 직후 동일 27일 국방부에 들렸다가 북아현동의 집으로 귀가하던 중 모윤숙과 박순천이 찾아와 나라의 위기가 닥쳤음을 호소했다. 그는 서울의 운명은 27시간 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귀가했다.
서울이 함락되자 그는 자결을 결심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을 보고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비밀리에 정부가 천도한 대전으로 내려갔다.
한국 전쟁 중 비상국무회의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인민군이 경기도 북부지역으로 진입하자 그는 한강 철교의 폭파를 건의하였다. 1950년 말부터 1951년까지 주 중화민국 대사로 부임하였고, 귀국 후 1952년 자유당이 창당되자 자유당 부당수가 되었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사사오입 발췌개헌이 발생했다.
당시 부산에서 발생한 땃벌떼, 백골단, 민족자결단이 국회를 점령하고 국회해산, 규탄집회를 수시로 열었다. 한편 그는 이들을 사주챘다는 의혹을 받았고 야당에서는 그가 땃벌떼, 백골단, 민족자결단을 배후에서 조종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땃벌떼, 백골단과는 관련이 없으며, 민족자결단은 다른 정치인이 조종했다는 것이다. 7월 내무부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정부통령 직선제가 통과되자 1952년 8월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후보자로 입후보하였다.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이범석은 민족청년단의 강력한 조직력을 활용하고 자신이 이승만박사를 잘 보필할 것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선거운동을 한 결과 당선이 유력시되었다. 경찰에는 그의 부통령 입후보 방해 지령이 하달되었다.
이승만과 국무총리 장택상이 8·5 정부통령 선거에서 개헌의 1등 공신인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의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데 앞장서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깊이 개입한 사실을 규탄하면서 선거에 개입한 장택상과 김태선을 고소하였다. 이후 이범석은 그럴수도 있다 고 생각하면서도 회한의 치를 떨었다 한다. 그러나 이승만을 대신할 마땅한 인물이 없는 상황에서 그를 유지시키는 대신 주변의 과격한 세력으로부터 그를 격리시켜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이 (이승만 주변에서) 위험하다고 본 인물로는 이범석, 원용덕, 임영신, 윤치영, 안호상 등이 있었지만 그 핵심은 이범석 장택상과도 뒤에 화해하지만 앙숙이 되었었다. 1954년 3월 자유당 내에서 이범석의 족청계 조직이 무너지고 등장한 것은 이기붕을 중심으로 한 전직 관료 출신이 당조직의 실권자로 등장 했다. 이후 그는 부당수에서 평당원으로 격하되고, 당내 부장직에 있던 이범석의 측근들은 축출되고 이기붕의 측근들로 대체되었다. 이범석은 1956년 1월에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야인 생활 >> = 야당 생활과 자유당 복귀 =
그는 자유당 탈당을 자의에 의한 탈당이 아니라 족청을 정적으로 보는 세력에 의하여 제거된 것이라고 봤다. 1956년 1월 자유당을 탈당한 이범석은 자유당 창당파인 배은희(裵恩希), 안호상(安浩相), 이갑성(李甲成), 지청천(池靑天), 탈당파인 장택상(張澤相) 등과 함께 신당 창당을 준비하였다. 신당은 당초에 민정당으로 정해졌다가 뒤에 3월 30일에 가서 공화당으로 당명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4월 1일부터 4월 4일 사이에 이범석, 안호상 등의 족청계와 장택상·배은희를 중심으로 한 비족청계로 분파되어 사태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범석의 부통령 입후보 고집으로 당은 와해되고 말았다.
1956년 5월 이범석은 제3대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에 다시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기붕의 세력이 이승만의 비호하에 확장되자 그는 국운을 우려하여 이기붕의 투표를 방해하고 표를 분산시킬 생각이었다. 부통령 후보 유세 중 강원도에 갔다가 의문의 청년들의 습격 미수를 당하기도 했다. 부통령에 낙선한 이후 이범석은 자유당으로 되돌아갔으나 이기붕 일파에 밀려서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몇 차례 안좋은 말이 오고 가다 김옥윤은 이범석의 인격을 문제 삼았고, 이범석은 여편네 운운하면서 대판 말싸움을 벌였다.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였다.
그 뒤 1963년 국민의당에 참여하여 1963년 국민의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
1965년 7월 22일 이승만의 시신이 비행기를 통해 김포공항 비행장에 도착하자, 오전 8시경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하였다.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國葬)을 요구하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의 국민장(國民葬)을 추진하였으나,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國葬)을 고수하였다. 4.19 관련 단체에서는 국장도 국민장도 안 된다며 대규모 시위, 집회를 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국민장으로 추진하려 했다. 이때 이범석은 장택상, 허정, 윤치영 등과 함께 박정희에게 이승만에 대한 국장(國葬)으로 예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묵살하였다.
1966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 행사에 참석하였다.
1966년 9월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집회에 참석하였다. 1966년 12월 24일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67년 1월에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회담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다.
2007년, 2011년, 중국의 중앙관영방송인 CCTV에서 항일 명장열전 방영시 외국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범석장군을 선정 방영하였다.
기타 이력 >> 저서 >> 학력 >> 명예 박사 학위 >> 상훈 >> 논란과 의혹 >> 청산리 전투 관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과는 달리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자서전에서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 김좌진과 자신만이 참여한 것처럼 서술하였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으로 싸운 것이며, 김좌진과 이범석이 그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전투에 가담하여 싸웠다.
청산리 전투가 북로군정서 단독의 전과라고 알려진 것은 전투 참가자 중 한 사람인 이범석이 한국의 분노라는 회고록에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함께 싸웠으며, 그 중에서도 홍범도 부대의 활약도 특히 눈부셨다.. 한편, 파시스트라든가 권력 지향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이범석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이범석을 비판할 때 주로 사용한 주장이다. 특히 이범석이 국방장관 재직시 군의 사상통일을 기하기 위해 강력히 추진했던 국방부 제2국 정훈국과 정훈병과 창설, 대북첩보수집 및 교란 전담 제4국 창설을 국방장관의 파시스트적 독단이라고 당시 미군정고문단들과 일부 정치적 반대자들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우익, 좌익 등 잡다한 세력이 집합된 군의 인적구성과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적하기 위한 효율적 정책이었음은 그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정훈병과는 공산주의자와 대치하고 있는 대만과 한국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조직이다. 제4국은 후임 신성모 장관에 의해 해체되었다. 후일 625가 발발시 제4국이 있었다면 그렇게 기습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우둥불. 철기 이범석장군 재조명. (백산서당, 2016)358쪽> 장관 직속 대북첩보수집부대는 오늘날 국방정보본부와 국군정보사령부로 유지되고 있다.
그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비난도 있다. 역사문제연구소에 의하면 그가 민족을 많이 외쳤으니까 친일파 숙청을 열렬히 주장해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와 정 반대였다 비난하였다. 부산 정치 파동, 한강 철교 폭파에 관여하여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부산정치파동의 주역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도왔다는 점과 한강철교의 폭파로 희생자를 양산했다는 점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한편, 한강철교 폭파는 군사적 관점에서 당연한 것이고, 한강교폭파의 문제는 시행과정에서 육군본부가 시민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한강철교가 폭파됨으로 인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을 서울에서 지체하게 되었고 이는 차후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으로 귀중한 시간을 갖게 하였다. 부산정치 파동시 내무장관 이범석은 부임한지 1달이 채 되지 않은 상태이어서 업무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실제 당시 치안국장이었던 문봉제가 자신의 자서전 발간에서 부산정치 파동은 자신과 대한청년단 출신 김창민이 하였다고 밝혔다(증언청취자 김정례 전 보사부 장관)고 2008년 5월 9일 강영훈 前 국무총리가 철기 이범석 장군 추도식에서 밝힌 바가 있다.
이범석에 대한 비판은 주로 좌익 측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정부 출범과 군 창설시부터 강력한 반공을 주장한 이범석을 견제하고 하야시키기 위한 음모로 인식되고 있다.
역대 선거 결과 >> 가족 관계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이경하와 외교관 이범진은 그의 먼 일족이었다.
기타
그는 심장병인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어머니 연안 이씨, 아내 김마리아 역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재정적으로 가난함과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중국에 있을 당시에도 '아편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아 치부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민족청년단 운영 과정에서도 자금부족으로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고, 의연금이나 기부금에 의존해야 했다.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직을 마친 후 야인시절에는 서울의 변두리인 약수동과 신당동, 대방동을 전전할 정도로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시 고위층들은 일본 적산가옥이나 사업체 한둘은 그저 당연한 것처럼 자기 차지를 하였던 것에 비하면 지도층의 품격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13대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이찬구의 자서전 <비화>(상상나무, 2011. 38쪽~52쪽)에 의하면, 516군사정변 이후 정변세력들이 이범석장군 측근들이 이범석장군의 생활을 지원하던 것을 끊음으로해서 식량이 부족하여 4일을 굶은 뒤, '내가 일제하고도 30년을 죽지않고 무장투쟁을 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동족 손에 압박을 받으니 분하고 창피해서 살수 없다'고 하면서 부부가 자살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이범석의 민족주의를 몹시 싫어하였다.. 미국의 이범석에 대한 평가는 국방장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진다. 광복군 2지대장과 민족청년단시는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국방장관 시절 국방부 제2국 정훈국 창설과 제4국 대북첩보수집 및 교란국 창설과정에서 격렬히 부딪친 결과 이후 미국은 이범석을 경계하였다고 평가된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이범석의 국방부 장관 재직 시절에 대한 미국의 평가와, 그 이전인 광복군 2지대장 및 민족청년단 활동 시기에 대한 미국의 평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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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이범석의 활동 시기를 '국방부 장관 재직 시절'과 '그 이전(광복군 2지대장 및 민족청년단 시기)'으로 나누어 미국의 평가 차이를 비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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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시기별 미국의 태도 및 평가 정보를 추출한다.
- 광복군 2지대장과 민족청년단시는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 그러나 국방장관 시절 국방부 제2국 정훈국 창설과 제4국 대북첩보수집 및 교란국 창설과정에서 격렬히 부딪친 결과 이후 미국은 이범석을 경계하였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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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시기별 상반된 평가를 보여주는 핵심 구절을 선별한다.
-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 미국은 이범석을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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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지원과 경계라는 상반된 관계를 시기별로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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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이전에는 지원 대상이었으나, 장관 재직 시에는 경계 대상이 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광복군 2지대장과 민족청년단시는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국방장관 시절 국방부 제2국 정훈국 창설과 제4국 대북첩보수집 및 교란국 창설과정에서 격렬히 부딪친 결과 이후 미국은 이범석을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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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맞춰 두 시기의 평가 차이를 명확히 기술한다.
-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 미국은 이범석을 경계하였다
근거 (evidence)
- 광복군 2지대장과 민족청년단시는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 그러나 국방장관 시절 국방부 제2국 정훈국 창설과 제4국 대북첩보수집 및 교란국 창설과정에서 격렬히 부딪친 결과 이후 미국은 이범석을 경계하였다고 평가된다.
-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 미국은 이범석을 경계하였다
- 광복군 2지대장과 민족청년단시는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국방장관 시절 국방부 제2국 정훈국 창설과 제4국 대북첩보수집 및 교란국 창설과정에서 격렬히 부딪친 결과 이후 미국은 이범석을 경계하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이범석이 광복군 2지대장 및 민족청년단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미군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나, 국방부 장관 재직 시절에는 정훈국 및 제4국 창설 과정에서 격렬히 충돌한 결과 미국이 그를 경계하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미국은 이범석이 광복군 2지대장 및 민족청년단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나, 국방부 장관 재직 시절에는 정훈국 및 제4국 창설 과정에서 충돌한 결과 그를 경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