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포함한다. 그 밖에 필리핀과 태국,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일본 제국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징발되었다. 생존한 사람들은 하루에 3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증언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가운데 유일한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는 1990년에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살고 있던 얀 할머니(얀 루프 오헤른)는 KBS 다큐멘터리 KBS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의 성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일본군에게 잡혀왔다는 증언을 한 바가 있다. 얀 할머니의 고백 이후 엘른 판 더 플루흐머니도 일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1991년 8월 14일에는 김학순이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고백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도이하라 겐지가 만주에 있는 러시아 여자들에게 아편을 중독시켜 매춘을 강요시키고 대규모 매춘 집단을 만들었던 것처럼 일본군의 군자금은 아편이였고 조선의 기생이나 위안부를 아편과 히로뽕으로 중독시켜 매춘을 강요시켰다.
2004년 11월 29일에는 심미자 등이 일본 대법원에서 일본군위안부로 인정되었다.
1994년 8월 31일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 富市) 내각총리대신(총리)이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담화를 낸 바 있다. 또한 1996년에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역시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아울러 이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나 양국간 각종 조약(한일기본조약 등) 따위로 법적으로 해결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일본 측은 대한민국 정부 또한 미군을 위해 위안부와 비슷한 것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와 진상 규명 및 적절한 배상, 책임자 처벌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1992년부터 현재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항의하는 수요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명칭
한국 내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이다. ‘위안’이라는 단어가 일본군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작은 따옴표를 이용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일부에서 ‘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인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여자정신대는 일본 정부에 징용되고, 일반의 노동을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 반면 일본군 ‘위안부’는 일반의 노동 대신에 성적인 행위를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다. ‘정신대’의 ‘정신(挺身)’은 ‘솔선하여 앞장선다’는 뜻으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대한민국 관계 법령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이 제도를 통해 ‘성적 위안’을 받은, 가해자 일본군 중심의 용어라는 문제가 지적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고 있어 일본군 또는 정부의 개입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라는 의미도 있다. 피해 여성 입장에서 본다면 이를 ‘성노예’로 부를 수 있으나 강한 어감 때문에 피해 여성들은 ‘성노예’라는 명칭에 부정적이다.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 육군 소속의 전쟁 정보국(영어판, 약칭 OWI)의 심리 작전반(Psychological Warfare Team)은 1944년 10월 1일 청구서로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 49호)를 작성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군 정보부 심리작전반에 의해 버마에서 포로로 한국인 위안부 20명 및 일본 민간인 2명을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종군’이라는 말에 내포된 자발적인 의미가 부적절하며 일본 극우 세력에서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옳지 못한 명칭이라는 지적이 있다.
개요
당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구타, 가해는 일상다반사로, 칼 등으로 몸을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등 가히 고문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 수십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 후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으며, 배식량은 극도로 떨어져서 영양실조도 많았다고 한다.
성노예 여성들은 간신히 전쟁이 끝나도록 살아남았으나, 태평양전쟁 이후 패전국으로서 일본의 전후보상 문제가 관련당사국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던 것에 비해, 위안부는 국내에선 오히려 "일본군과 놀다온 더러운 여자들"이란 잘못된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며 질타를 받기도 하다가, 나중에나 진실이 밝혀지고 육체적 및 정신적 피해 등을 포함해서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기에 지금도 일본 정부에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심하게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게 문제가 있다. 일본 측의 입장은 크게 3가지로서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 '문서상의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성일보 등의 기사 보도에 의하면 월 300원에서 최고 3천원 이하의 수당을 준다고 보도돼 있다.
자발적 참여의 근거로는 여성들의 서명이 담긴 문서와 일본 여성 참여의 증거 등이 있는데, 일부 여성들은 취업 서류로 알고서 서명했다가 끌려간 경우도 존재한다.
대가론의 경우 당시 '지불됐다'라는 임금 자체도 여성들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았을 뿐더러 강제성과 인권 모욕의 경우는 대가로 어떻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점에서 논점이 이탈된다.모호 하지만 실제 당시 여러 기록이나 증언들을 보자면 위안부의 징집 절차에는 친일파 조선인이 다수 협력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사실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배경과 강제 징집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 7개 사단 가운데 1개 사단이 성병 환자로 폐인이 되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소모를 막기 위하여 1931년 9월 만주사변 당시에는 군용 공창가(公娼街)가 고정화되어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위안소가 생겼다. 최전선 수비대를 위해서는 출장 위안부가 파견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위안부를 본격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위안부 모집은 공개 모집, 광고 등을 통한 모집이었다. 일본군의 병사 위안이라는 전통은 1938년 1월의 중일전쟁 때는 상하이 부근 공창가에 육군 위안소를 열었다. 24명의 일본 여자와 80명의 조선 여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는데 조선 여자들은 대부분 남선 출신이었다. 위안부 징발 담당 중에는 한국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일본인 관리들이 위안부 징발에 관여한 일도 있었다.
1939년 위안부를 경영하는 상인인 오쿠다 진자부로와 후쿠다 요네자부로는 기업의 거액 융자를 획득한 후에, 동년 5월 17일 대척회사공사에 같은 방식으로 하타마 도모시치에게 1만8천엔을 대출해주었고, 이 세 명의 상인은 바로 1939년 4월 28일과 5월 24일에 각각 위안부를 소집하여 총독부의 어용선 금령환 호에 탔다. 위안부 징발책의 운영은 이와 같은 민간인 업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한편 2001년 한국의 위안부 증언집 조사 결과 한국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인 데 반해, 일본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한국 여성은 16.0%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관헌이 이에 가담한 경우를 인정하였다.
1993년 일본의 내각관방장관 고노 요헤이(河野 洋平)는 관방장관 담화에서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다."는 점과 "관헌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 일본군이 타이완 총독부의 타이완 무관에게 위안부를 추가로 공급해줄 것을 요구하고, 조선에도 대량으로 위안부를 차출하기를 요구하였다. 외에도 네덜란드의 여성들도 존재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운동가가 위안부 모집에 앞장서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일본군의 점령이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 보고 일본군 협력과 일본군을 상대로 하는 인도네시아인 위안부 모집에 앞장섰다.
차출 방법과 대상 그리고 규모 >> 가난 & 가족의 빚 청산
가난한 집안 환경 또는 가족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지원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1942년 5월 초순 일본이 새로 정복한 동남아시아에서의 위안 서비스를 위해 한인 위안부를 모집하려고 일본인 주선인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이들 주선인들의 조건은 '많은 돈, 가족의 부채를 없이 하는 기회, 쉬운 일'이었다.
일부 여성은 가족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위안부에 자원하였다. 그리고 위안부가 되기 전에 먼저 '사전에 돈을 가불받아 가족의 빚을 청산 1956년에 중국에서 행해진 일본인 전범 재판으로 스즈키 히라쿠 중장의 자필진술서에는 일부 조선인과 중국인 여성을 유괴해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진술도 적혀 있다.
교토시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전쟁의 진실을 말하는 모임’에서 1942년 싱가포르에서 육군 헌병대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나가세 다카시(永瀨隆·89) 씨는 “조선 위안부들은 모두 군용선에 실려 왔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당시 상부 명령으로 한반도에서 온 여성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러 와 있던 그에게 그 여성들은 “싱가포르의 일본군 식당에서 일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곳에 도착하자 (일본군이) 위안부를 할 것을 강요했다”라고 하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고 증언했다.
현지 여성 조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던 일본인(아오치 와시오, 1967년 야스쿠니에 합사)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소의 재판에서 "아오치는 1943년 6월 2일 군 간부로부터 매춘업소를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차 지시를 받은 후 이를 수용했다"라고 군이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음을 인정했다.
일본 국회도서관 보관되어 있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문서 중에 [https://web.archive.org/web/20070907144838/http://dokdo.naezip.net/ComfortWomen/CW11.htm#4 인도네시아 모어섬에서의 일본 육군중위에 대한 심문조서]에는 일부 현지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독신여성 조달
일본군에서는 독신여성들을 위안부로 조달하기도 했다. 속임수로도 그 수요를 채울 수 없게 되자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만들어 만 12~40세의 독신녀 전체를 정신대의 대상자로 규정하였다. 정신 근로대 영장을 받고 차출된 여자 정신대에서도 일본군 위안부가 충당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정신대는 군수공장에서 일한 여성들을 말한다.
첫째는 종래의 색주가, 사창가의 매음녀가 충당된 경우였으나 이는 극히 소수였다. 두 번째는, 일반 여성을 상대로 공공연하게 작부를 모집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많은 경우는 아니었다. 상하이 시 보백로 자운별리 2호에서 위안업을 경영하던 정기천(일본 이름 永川光星)은 함경북도 길주군 웅평면 출신으로 1918년 5월 5일에 중국으로 입국했고, 두강지로 보덕리 60호에서 위안업을 운영하던 한차례(일본 이름 大原光江)는 경상남도 마산부 오동동 13번지 출신으로 1937년 11월에 입국하였다. 위안부들은 매달 평균 1500엔을 벌었지만 수입의 최소 750엔을 식비, 화장품비 등으로 떼였다. 또한 수당 외에 선불금 3천원을 받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관계를 뒤흔드는 중요한 쟁점으로 발전한 것은 직접적인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거나 고령이며 또한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이룬 뒤 4년 만인 1991년 8월 김학순(1924~1997)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는 역사적인 증언을 내놓은 것이 계기이다.
한편 일부 일본군에서 조선인 부녀자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일부 위안부를 강제로 징집했음을 뒷받침해주는 판결 이 내려지기도 했다.
2014년 8월5일, 아사히 신문은 차내에서 독자적으로 검증한 결과로서, 그것까지 게재한 「종군 위안부」문제에 관한 많은 기사를 취소했다.
아사히 신문이 취소한 것은, 199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연재한 「종군 위안부」문제의 캠페인 기사 (이것은 조선인에 대하여 동정적으로 취급한 기사로, 합계16회의 연재이었다)에 붙어서다.
이것들은 아사히 신문이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의 증언(일본군이 여성을 유괴한 것을 목격했다)을 증거로서, 당시의 일본군을 단죄한 기사이었지만,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 바로 그것이 허위이었던 것을 인정하고, 기사를 철회한 것이다.
아사히 신문은 해당 기사를 취소하면서 독자에게 대한 사죄는 일체 하지 않았다.
또, 아사히 신문 사장의 기무라 다다카즈(木村伊量)는 독자에게 사죄를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진술했다.
그 때문에, 일본 국내의 매스컴(mass communication)에서 미디어로서의 설명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라는 비판이 일어나고, 지상논쟁이 되풀이되었다.
많은 일본인이 화나 있는 것은 아사히 신문사에 대해서였으며 한국인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의 혐한 정서는 단순한 '사실 왜곡'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한국인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로까지 발전하고 있어 논란이 있다.
많은(온건한) 일본인의 의견은, 마이니치 신문사가 2014년 8월 7일 발표한 사설로 대표된다.
2014년 9월12일, 아사히 신문사 도쿄(東京) 본사에서 기자회견이 행하여져, 아사히 신문사 기무라 사장은 자신의 급여를 0이라고 해서 주요한 간부도 교체한다고 발표한 뒤에서, 독자에게 전면적으로 사과했다.
이 기자회견의 전반으로 말하고 있는 요시다에게는 2011년3월에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현장책임자이었던 요시다 마사오(吉田昌郞) 소장에 대해서, 엄하게 책하는 기사를 쓴 것을 사죄하고 있다.
그리고, 기자회견의 후반으로 말하고 있는 요시다에게는 「여성을 유괴해서 위안부로 되게 했다」라고 하는 허위의 증언을 한 요시다 세이지에 관한 기사에 관한 사죄다.
한국인의 인신 매매
또한 일부 한국인들에 의해 인신매매당하거나 속임수에 끌려간 위안부 여성도 존재했다. 동원 과정에서 한국인도 관여한 사실이 있다. 세종대학교의 박유하 교수는 그런 "가해성에 대한 책임은 확실히 한국에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가 인터뷰한 한 한국인 위안부 피해 여성은 당시 의붓 아버지에 의해 팔려갔고 일본군보다 아버지가 더 밉다고 말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여군이 되려고 했던 이 여성은 업자들의 농간으로 위안부가 되고 말았다.
박유하 세종대학교 일문학 교수는 일본의 한 강연에서 했던 발언이 지난 6일 몇몇 언론을 통해 "위안부 문제, 한국도 책임 있다"는 제목으로 알려지면서 누리꾼의 맹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누리꾼은 박 교수뿐만 아니라 세종대 홈페이지를 찾아가 항의성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일본 우익은 '유가증권' 개념인 '군표'(軍票)를 사용한 것을 들어 위안소 제도를 일종의 공창제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창제와 비교해서 군 위안소는 전시라는 상황에서 군이 관리·운영함으로써 위안부 여성의 인권을 더 보장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운동가가 위안부 모집에 앞장서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일본군의 점령이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 보고 일본군 협력과 일본군을 상대로 하는 인도네시아인 위안부 모집에 앞장섰다. 라며 비판하였다.
이러한 취지에서 심미자 등은 6명의 변호인들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통해 2004년 3월, 위 두 기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를 상대로 “모금행위 및 시위동원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고 한다.
북한의 위안부
2000년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약칭 종태위)에서 작성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실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조선의 위안부 218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종태위 보고서에 따르면 위안부에 대한 모집과 연행 방법은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공권력을 배경으로 네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거주지에서 강제 연행하거나 여행 중에 납치되어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경우로 218명 중 96명(44%)이 해당된다. 두 번째는 좋은 일자리를 주선해 준다고 속여 위안소에 데려가 억류한 다음 '위안부'를 강요한 경우로 74명(34%)에 해당된다. 그 나머지는 일본군 지령으로 위안부 모집에 나선 민간업자에게 빚에 팔려가거나 '근로정신대' 명목으로 모집되었다가 나중에 위안부로 다시 연행된 경우다.
북한의 종군위안부 중 12~15세인 34명은 전부 미혼이었고, 16~19세 92명 중 6명은 기혼이었다. 20~24세 54명 중에는 1명만이 미혼이었고, 30세 이상 2명은 2명 전원 기혼여성이었다. 한편 일본인 종군위안부들의 연령은 조선인 종군위안부들보다 평균 10살이 더 많았다. 미야자와 총리는 "정신대 문제는 관계자들이 체험한 쓰라린 고통에 마음이 미어지는 심정이다. 글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분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충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한다."라고 사죄하고, "하루 빨리 진상을 규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를 고노 담화라 부른다. 일부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사과와 동시에 위안부 피해자 등에 대한 보상과 지원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일본의 우익 인사들은 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고 이에 한국의 위안부들을 비롯하여 타이완, 필리핀 등의 위안부들은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유엔 공식입장
일본 정부는 유엔에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공식 입장을 제출했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 소송
한국인 등을 중심으로 위안부였던 사람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 완료 등을 이유로 패소했다. 현재 일본 사법부에서는 전쟁 전 국가간의 배상이 법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인정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일부 법조인과 국회의원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을 변호하거나, 배상의 걸림돌인 전후보상법 개정을 시도하는 등 위안부 피해자들의 편에서 일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 배상 등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노령으로 사망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연금을 지급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시아 국민기금 문제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보상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8~9월 "(한국 내 단체가 군위안부 문제를) 한국에 뿌리깊게 내린 반일 문제로 방향을 틀었다"면서 "위안부 개인의 행복이나 그들이 놓인 처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위안부 지원 단체의 정의 실현을 위한 것으로 바꿔치기 된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의 국민기금 지원 약속
국민기금은 1995년 7월에 발족한 일본의 재단법인이다. 이는 당시 일본사회당(현, 사회민주당) 소속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 주도로 세워졌다. 일본 극우 인사들은 국민기금의 설립에 강력 반대하고 시위를 벌였지만 결국 국민기금 재단은 구성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식민지 국가의 위안부 여성들의 생계, 진료 지원 등을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시민단체와 와다 하루키 등의 지식인들이 참여하였다.
국민기금의 전무이사를 지낸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경향신문 기고문을 통해 국민기금이 “1965년 협정을 전제로, 법적 책임론이 아니라 도의적 책임론에 기초한 국민적 보상의 길”이라고 밝혔다. 국민기금은 와다 하루키 교수를 비롯한 16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민간으로부터 기금을 모아 필리핀, 대만,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284명에게 총 5억6500만엔(약 82억9250만원)을 지급했다. 1인당 200만엔(약 2900만원)가량을 지급한 셈이었다.
경과 >> 각국의 위안부 결의안
2007년 11월 8일, 네덜란드 하원은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캐나다에서도 같은 해 11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책임을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으며, 12월 13일에는 유럽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2008년 3월 11일에는 필리핀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
위안부의 존재에 대한 일본 일각의 부정, 비판은 유엔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2008년 10월 30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하여 일본이 위안부 동원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 보상하여 피해자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야 하며, 이를 학생과 대중에게 알리고 부인하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수요 시위와 평화의 소녀상 >> 수요시위
수요시위는 대한민국 출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항의 시위로, 1992년 1월 8일에 10여 명으로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시위 참여 인원 3만여 명, 발표 문건 600여 건, 최고령 시위 참가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집회이며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위안부 기림비
2013년 3월 8일 미국 뉴저지주 해켄색에 있는 카운티 법원 앞의 `메모리얼 아일랜드'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희생된 위안부를 추모하는 기림비가 세워졌다. 기림비를 만든 주체는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정부다. 미국에서 한인사회가 주도한 기존 기림비와 달리 미국의 지방정부가 직접 만들었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버겐카운티 정부는 기림비 동판에 "2차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성노예'(sexual slavery)로 강요당한 한국과 중국, 대만, 필리핀,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출신의 수십만 여성과 소녀들을 추모하며"라는 글을 새기었다.
미군 위안부
주일 미군을 위한 미군 위안부도 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였던 사람이 미군의 조사를 받은 후, 바로 미군을 위한 위안부로 일한 경우도 있다.
2014년 6월 25일에 미군 위안부 122명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서 성폭행, 감금, 매춘 강요, 인신매매, 마약 투여, 강제 낙태 등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미군 위안부에대해 조선민주여성동맹와 북한 정부는 한민족에게 범한 반인륜적 의한 위안부 범죄사건 이라고 미국와 한국 정부에 사죄와 책임을 완수하도록 요구하고있다.
일본 정부는 1945년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키겠다며 미군을 위한 위안부 55,000명을 모으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패전 직후 일본 경시청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일본 경시청 보안과는 미군 점령군이 일본 부녀자들을 겁탈할까봐 두려움을 느꼈다. 경시청 보안과장은 "미군이 일본에 장기 주둔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일본 여자들을 겁탈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 일본의 부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종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였다. 군인들이 점령지에서 현지 여자를 강간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고, 패전한 일본으로서는 미군에 항의할 수도 없었다.'는 의견이 나왔고 곧 채택되었다. 내무성에서도 보안과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본의 요정과 사창가의 업주들을 불러들여 미군 상대 위안소를 만들 것을 요청했다. 요정과 사창가의 업주들이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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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유엔 인권소위원회 보고서에서 사용된 특정 용어('일본군 성노예')의 의미와 의의를 파악해야 한다.
-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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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해당 용어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본문에서 추출한다.
-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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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용어의 의의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을 선택한다.
-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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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용어의 명칭과 그 명칭이 갖는 기능(본질 규명 및 국제적 지지)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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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해당 용어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역할을 함을 결론짓는다.
-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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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본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완성된 문장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근거 (evidence)
-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해당 용어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 사용한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용어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