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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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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_id
A220623199258
유형
위키
출처
위키백과
연도
2022
분야
국제
문맥 (context)
한성(漢城)은 조선의 도읍지였다. 한성부(漢城府)는 지금의 한반도 서울시를 담당하여 관할하는 관청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청 격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조선 태조는 풍수 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였다. 3년 후에 경복궁을 쌓았고 창덕궁을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었다. 이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성곽의 사대문(四大門, 동서남북 방향)과 성곽 외부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데, 즉 현재의 서울시의 강북지역 대부분이 포함된다. 대한제국 고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도시가 확장되었다. 성곽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유교의 오상 인의예지신(五常 仁義禮智信) 이념을 구체화하여 성문을 건축하였다. 즉 중앙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보신각(普信閣)을 세우고, 동쪽에는 흥인문(興仁門, 보물1호), 서쪽에는 돈의문(敦義門), 남쪽에는 숭례문(崇禮門, 국보1호), 북쪽에는 숙청문(肅淸門)을 세웠다. 북쪽은 본래 소지문(炤智門)으로 하려 했으나 최종 낙점은 숙청문(肅淸門, 현재 숙정문)이 되었다. 또한 한성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변란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다.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 명 정도였다. 오늘날 서울의 중심 업무 지구 (도심)를 차지하였으며 바깥에는 성저십리가 있었다. 연혁 >> 천도의 배경 1392년에 개경(개성)에서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을 하였다.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군주인 이성계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태조는 한시라도 빨리 옛 왕조로부터 벗어나고 새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새 왕조가 하늘의 명을 받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정당하게 세워졌음을 세상에 널리 강조하였다. 태조가 천도를 한 이유로는 기존 세력의 근거지인 개경에 대한 정치적 불안과 심리적 갈등, 그리고 풍수 지리설의 영향, 민심의 쇄신 등을 들 수 있다. 새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무학국사와 하륜(河崙) 등 병신들의 의견에 따라 1393년에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1394년 11월 21일(음력 10월 28일)에 한양으로 천도(遷都)를 하였다. 천도의 기준은 풍수·도참설에 따르면서, 남쪽에 한강이 있어 교통상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기가 편리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몽주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에 천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편 풍수·도참설에 능했던 하륜에 따르면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무악 일대가 명당이었고, 이로 인해 수도의 위치에 대해 크게 논의가 일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러한 논거로 수도의 입지를 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풍수·도참설에 기반한 논의가 국왕의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사 자초(무학)가 인왕산에서 출발한 축을 따라 하여 도읍의 터를 잡자고 주장했다는 설은 야사로 16세기 말~17세기 초에 간행된 오산설림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다. 실록에는 전혀 전하지 않는 이야기로, 신뢰할 수 없다. 1395년(태조 4년) 6월 6일에 한양부(漢陽府)의 명칭을 한성부(漢城府)로 고쳤으며, 그와 동시에 한양 천도 당시에 궁궐과 관청이 세워진 지역에 살던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楊州)라 고친 바 있다. 한성의 건설 태조(太祖)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후시(左廟右社, 前朝後市)’라는 동양 고래의 수도 배치 원칙에 따라서 도읍을 건설하였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정과 시장 또한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었다. 성곽은 궁궐과 종묘가 완공된 이후에 건설되었다. 가장 먼저 서쪽에 사직(社稷)을 완공하고, 궁궐을 세운 뒤, 그 동쪽에 종묘(宗廟)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 육조관서(六曹官署)를 배치하여 관아가(官衙街)로 하고, 북쪽 신무문(神武門) 밖에는 시장을 두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조선의 정치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으로 태조는 한양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북악산과 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旺山)을 잇는 약 117km의 성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1395년에 한양을 한성(漢城)으로 개칭하고 1395년에는 한성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 그 행정구역은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시대의 500년 동안을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도성은 성 안의 땅으로 모두 국유지이며,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성저(성저십리)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 되는 한계선까지를 가리키는데, 북쪽은 북한산, 남쪽은 한강 노도(露渡), 동쪽은 양주 송계원·대현(大峴)·중랑포(中浪浦)·장안평, 서쪽은 양화도(楊花渡)·고양덕수원(高陽德水院), 모래내(沙川)를 따라 난지도(蘭芝島) 부근까지였다. 이 지역내는 산림과 풍치의 보호를 목적으로 암장과 벌목·채석이 금지되었다.이 도성은 동·서·남·북·중부의 오부(五部)를 두고 그 밑에 52방(坊)을 두었다. 같은 해 9월에 성벽과 문루(門樓)가 완성되어 왕성은 주위에 견고한 성벽이 쌓여진 성곽도시가 되었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2년동안 수도를 개성으로 옮긴 일이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곧 한성으로 다시 환도하였다.. 물론 태종은 태조의 결정으로 지어진 수도를 버리는 데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새로이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데 대한 부담감 역시 컸을 것으로 보인다. 환도한 다음 해부터 궁궐을 수축하면서 도읍지로서의 여러 시설을 갖추어갔다. 노폭 56척(尺)의 (운종가(雲從街))를 비롯하여 노폭 16척, 11척의 각종 도로를 만들고, 그 양쪽에는 가가(假家)라고 부르는 상점을 만들어 번화하게 하였는데 상점이 들어서 있는 토지는 10년을 한도로 대여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선도로변에는 2척의 구거(溝渠)를 만들어 배수가 잘 되게 하였다. 또한 개천(開川)을 준공하여 배수가 잘 되게 하였고, 도읍지의 미관과 화재예방을 위하여 초가(草家)의 건축은 억제하였다. 조선 중기, 후기 1592년 선조 때의 임진왜란과 1624년 인조 때의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는 흥선대원군 때에 와서 많이 복구가 되었다.1876년 개항 이래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한성에는 새로운 문명시설이 갖추어져 가는 등, 현대화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전기, 전차, 수도, 전화, 전신 체계를 모두 동시에 갖춘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그 중 상당수는 미국과의 교역에 따른 것이었다. 근대적인 병원·학교·교회·신문사 등이 세워졌고, 1898년에는 서대문과 홍릉(洪陵) 사이에 전차가 부설되고, 1899년에는 경인선의 개통과 전화의 가설, 1900년에는 한강가교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계속하여 근대적인 상공업 발달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도성 안에 거주하는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성내에 모든 인구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즈음부터 성곽으로부터 십 리 바깥까지의 지역을 ‘성저십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성저십리로의 인구 이동도 일어났다. 결국 1461년 2월 27일 성저십리는 공식적으로 한성부에 속하게 되어, 한성부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관청으로서의 한성부 일정한 지역을 담당하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지방 기관과 같지만, 수도라는 점에서 중앙관청으로 인정하였으며 육조와 같은 격의 관청으로 대우하였다. 형조·사헌부와 함께 삼법사(三法司)라고도 불렸다. 서울의 호구, 시장 및 점포와 가옥 및 토지, 산, 도로, 교량, 하천 등의 관리와 재정 및 사법, 검시, 고실 등의 일을 담당했다. 한성부의 관할 영역은 한양과 성저십리였다. 행정 구역 >> 오부 동·서·남·북·중(中)의 오부로 구성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한성부 설치 당시에는 52방을 두었는데, 각 부의 방명은 다음과 같다. 52방은 세종 때 서부의 3방을 폐지하여 49방이 되고, 영조(英祖) 때는 동부 6방, 남부 11방, 서부 9방, 북부 12방, 중부 8방으로 5부 46방이었으며, 그 밑에 328계(契)를 두었다. 그 후 1865년(고종 2) 동부에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신설되어 47방이 되고, 계도 11개가 증가되어 339계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한성부 관할구역은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로 하였으나, 대부분의 인구가 도성 내에 집중되어 1428년(세종 10) 한성부 인구 10만 3328명 가운데 도성 밖 10리까지의 인구는 불과 6,044명 뿐으로, 도성 밖에는 서대문·서소문 밖에 2방, 동대문 밖에 2방, 남부의 2방 등 6방이 있을 정도였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조선 시대 한성부의 행정 구역 체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한성부의 행정 구역이 어떤 단위들로 구성되었는지 그 체계를 묻는 질문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한성부의 하부 행정 구역에 대한 정보를 본문에서 추출한다.

    •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 동·서·남·북·중(中)의 오부로 구성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행정 구역의 계층 구조를 나타내는 핵심 구절을 선별한다.

    •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최상위 단위인 오부와 그 하위 단위인 방, 계, 동의 관계를 정리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한성부의 행정 구역은 오부(동·서·남·북·중)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방, 계, 동이 위치하는 체계임을 도출한다.

    • 동·서·남·북·중(中)의 오부로 구성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추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행정 구역 체계를 기술한다.

    •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근거 (evidence)
  •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 동·서·남·북·중(中)의 오부로 구성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한성부의 하부 행정 구역은 동·서·남·북·중의 오부(五部)로 구성되었으며, 그 아래에는 방(坊), 계(契), 동(洞)을 두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조선 시대 한성부의 하부 행정 구역은 동·서·남·북·중의 오부와 그 아래의 방, 계,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