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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인문정책연구총서_갑오년의 동아시아와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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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Y_20150812040810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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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발행연도
KDC
0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100주년기념사업회 주비위원회의 연원은 1988년 5월의 ‘문화저널’의 전적지 답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의식하는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여 1989년 6월 문화저널에 신순철 교수가 ‘갑오농민전쟁 100주년을 준비하자’는 칼럼을 게재하였다. 역사의 현장에 거주하는 시민이라는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지역의 대학 교수와 지식인들의 연구모임인 호남사회연구회와 문화저널을 통해 이런 논의가 진전되면서, 주비위원회가 결성되고, ‘범시민적 기념사업회’로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2년 4월 6일, 이들은 기념사업회의 명칭에 관한 논의를 하여 ‘동학농민전쟁’ 대신 ‘동학농민혁명’을 채택하기로 하고, 조직을 준비위원회로 개편하였으며, 1992년 6월 13일, 동학 농민혁명기념사업회(약칭 동백사)를 출범시켰다. 동백사는 대중적인 시민단체로 전국적인 조직과 활동을 하여, 각종 문화이벤트와 학술 및 출판활동 등, 종합적 기념사업의 실질적 중심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역사문제연구소의 백추위는 학술사업, 출판사업, 대중사업을 하기로 하고, 첫 번째 학술사업으로, 1990년 6월 30일, ‘동학농민전쟁의 용어 및 성격 토 론회’를 열었는데, 많은 토론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이 연구 모임은 매년 학술토론회를 열고 그 성과를 1894년 농민전쟁이라는 제목의 단행본 시리즈를 출간하였다. 최초의 성과는 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관한 연구로 1991년에 출간되었다. 여기에서 이영호는 당시의 지배적인 연구 시각을 동학운동론과 농민전쟁론으로 구분하고, 후자의 입장에서 ‘변혁주체’를 규명하는 것을 연구의 목표로 삼았다. 이후 한국역사연구회는 제2집으로 18-19세기의 농민항쟁, 제3집으로 농민전쟁의 정치사상적 배경, 제4집으로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으며, 마무리인 제5집은 농민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다루었으며, 1997년 출간되었다. 또한 1994년 사료대계 1차분을, 1995년 2차분을 발간하였다. 또한 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을 1994-95년에 걸쳐 간행하였다. 이 연구모임은 1994년 초 증언록을 제작하기로 하였는데, 증언자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19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유족회가 결성되었다. 이와 궤를 같이 하는, 당시로서는 좀더 민중주의적 원칙에 충실한 연구가역사학연구소(1994)의 공동연구이다. 이 연구소도 ‘1894년 농민전쟁’이라 는 용어를 채택하였다. 이 연구소의 ‘1894년 농민전쟁연구반’은 1994년 자신들의 연구성과를 출판했는데, 여기에서 김선경은 ‘1894년 농민전쟁’이 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이 사건을 ‘계급투쟁’과 ‘반봉건투쟁’의 맥락에서 다루고, 전쟁당사자들을 농민군과 정부군, 민보군, 일본군으로 설정하였다. 김선경은 농민전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1895-1910년, 1910-45년, 1945-50년대, 60-70년대, 1980년 이후 등의 시기로 구분하고, 각 시기별로 남북한에서의 연구를 자세히 검토하고 있는데, 그녀는 농민전쟁의 역사적 위상을 ‘후진종속사회의 근대 변혁운동의 한 형태로 고찰하여야 한다’는 정 창렬의 지적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동학농민혁명을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한 대표적 사례는 2001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동아시아 평화-인권 한국위원회와 공동으 로 개최한 국제회의였다. 이 학술회의는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 라는 제목으로 열렸는데, 이 학술회의에서 정창렬교수는 “‘동학농민운동’ 연구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기조발표에서 동학농민혁명 연구들을 근대결핍으로 보는 경향, 근대지향으로 보는 경향, 근대극복의 계기로 보는 경향으로 유형화하고, 연구경향이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근대극복의 계기를 사상사적 맥락보다는 사회경제사적 맥락에서 접근하는 연구들을 주목하면서, 앞으로 동학농민혁명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진혼의 역사학’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창렬교수는 논문에 제목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반따옴표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의 관점, 즉 ‘농민전쟁론’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이 글에서 청일전쟁과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문병학은 기념사업을, 기념사업단체, 기념물, 문학작품 등으로 나 누어 그 전개과정과 성격을 분석하고 있다. 특히 기념물의 경우, 총 68개의 기념물을 건립주체와 건립시기별로 분석하면서 1987년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기념사업의 민간주체성이 강화된 이후, 기념사업의 성격이 변화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기념사업의 과제로, 동학농민혁명과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연계하고, 근대극복을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 였다. 박준성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조형물의 변화상을 검토하기 위하여 1963년 세워진 정읍 항토현의 ‘갑오농민혁명기념탑,’ 1973년 공주 우금치에 세워진 ‘동학혁명군 위령탑,’ 1987년 황토현 전적기념관의 전봉준장군 동상, 1994년 고부 신중리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2002-04년 만들어진 삼례봉기 역사광장 등을 검토하면서, “과거의 기억을 몇몇 지도자로 한정하고 미래의 상상을 통제하는 동상, 민중의 기억을 국가의 통제로 가두려는 수직의 탑은 동학농민혁명의 상징물로 걸맞지 않으며,” 조형물의 높이와 규모의 경쟁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은 서로 다른 별개의 사건이 아 니라 밀접하게 연결된 하나의 사건이다. 특히 일본군은 조선정부와 관군을 장악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청군과 전투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청의 영향권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그것이 조선을 자신의 배타적 영향권 아래에 두는 선결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의 전모를 보여주는 박물관은 중국의 위해의 유공도에 있다. 그것의 명칭은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이다. 중국정부는 1982년 일본의 교과서사건을 계기로 항일전쟁과 관련된 지방과 도시 곳곳에 박물관을 세우고 역사교육을 시작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위해의 갑오전쟁박물관, 여순의 일아감옥 구지 박물관,’ 심양의 ‘9·18역사박물관,’ 북경 교외 노구교의 중국인민 항일전쟁기념관, 남경의 남경대학살 박물관, 하얼빈의 7.31기념관 등이다. 위해 유공도에 있는 갑오전쟁박물관은 청말에 세워진 북양함대의 근거지를 기초로 설립된 것이다. 청나라는 1888년, 북양해군을 창설하고 그 본부를 위해에 두었다. 청나라는 유럽, 특히 독일의 군함과 대포를 사들여 북양해군의 주력 함대를 구성했는데, 그 군비의 규모는 당시 아시아의 1위, 세계의 4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청 해군은 북양함대, 남양함대, 푸젠(복건)함대, 그리고 광동함대로 구성되었는데, 청일전쟁은 북양함대만 참가했다. 북양함대는 정원호와 진원호 등 7천톤급 군함 2척(선원은 각각 330명), 경원호등 2천톤급 군함 6척, 초용호등 1천톤급 군함 4척, 1천톤 미만의 군함 9척 등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청 해군의 주력이었다. 청은 여순과 위해위에 요새 항을 보유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동백사)가 출범하기 전, 조직의 명칭과 성격에 관한 논의를 통해 결정된 사항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출범 전의 조직 명칭 변경 사항과 결정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기념사업회 출범 전의 명칭 논의와 조직 개편에 관한 정보를 추출한다.

    • 1992년 4월 6일, 이들은 기념사업회의 명칭에 관한 논의를 하여 ‘동학농민전쟁’ 대신 ‘동학농민혁명’을 채택하기로 하고, 조직을 준비위원회로 개편하였으며
    • 1992년 6월 13일, 동학 농민혁명기념사업회(약칭 동백사)를 출범시켰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명칭 채택 내용과 조직 개편 내용을 핵심 근거로 선택한다.

    • ‘동학농민전쟁’ 대신 ‘동학농민혁명’을 채택하기로 하고, 조직을 준비위원회로 개편하였으며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논의를 통해 명칭은 '동학농민혁명'으로 확정되었고, 조직은 '준비위원회'로 개편되었다는 인과관계를 정리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명칭은 '동학농민혁명'을 채택하고 조직은 '준비위원회'로 개편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1992년 4월 6일, 이들은 기념사업회의 명칭에 관한 논의를 하여 ‘동학농민전쟁’ 대신 ‘동학농민혁명’을 채택하기로 하고, 조직을 준비위원회로 개편하였으며
  • 1992년 6월 13일, 동학 농민혁명기념사업회(약칭 동백사)를 출범시켰다.
  • ‘동학농민전쟁’ 대신 ‘동학농민혁명’을 채택하기로 하고, 조직을 준비위원회로 개편하였으며
최종 답변 (final_answer)
기념사업회의 명칭을 ‘동학농민전쟁’ 대신 ‘동학농민혁명’으로 채택하기로 하고, 조직을 준비위원회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