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1851년 카프카즈 북서쪽에서 일어난 샤밀의 총독, 무하메드-에민이 이끈 체르케스인들의 봉기가 진압되었고, 1853년 봄 샤밀은 체첸을 떠나 산악 다게스탄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의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다. 1853년에 발발한 크림 전쟁은 산악 민족들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크림 전쟁(1853-56)동안 샤밀은 술탄과 연합한 항전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전쟁이 끝난 후 내분을 틈타 20만의 러시아군이 산지 다게스탄을 공격하였다. 마침내 1859년 샤밀은 그의 마지막 거주지였던 다게스탄의 구닙(Gunib)마을에서 400명의 무슬림과 함께 체포되었다. 러시아의 카프카즈 점령군은 여세를 몰아 북서 카프카즈로 진격하였다. 이렇게 해서 카프카즈의 네 번째 시기는 크림전쟁의 발발과 샤밀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며, 기간은 크림전쟁이 발발한 1853년부터 샤밀이 패배한 1859년까지가 된다.
또 다른 쪽에서는 자신의 독립을 위한 그들의 투쟁에 매료되는 낭만적 인식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19세기 푸쉬킨으로 시작되는 “카프카즈 문학”에서 잘 나타난다. 이렇듯 당시 카프카즈 민족들에 대한 러시아 사회의 인식은 객관적인 이해에서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사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카프카즈 진출이 시작되었던 19세기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의 카프카즈 인식의 대한 문제는 많이 연구가 활성화 되지 못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 들어서서 러시아가 치렀던 체첸 전쟁이나 그 이후 러시아 사회를 불안에 떨게 했던 일련의 테러리즘의 결과 현 러시아 사회에서 카프카즈 문제에 대한 관심은 많이 고조되었고, 카프카즈가 러시아에 가지는 역할에 대한 많은 논의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따라 19세기 카프카즈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병합되던 시기에 대한 인식에 대한 조망도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카프카즈를 병합할 당시 러시아는 카프카즈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인식의 과정은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으며, 또한 그렇게 형성된 카프카즈에 대한 인식은 당시 러시아의 정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조망하는 것은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19세기 당시 카프카즈에 대한 러시아의 사회인식이 변함에 따라 카프카즈 전쟁의 경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듯이, 현 러시아 언론매체와 사회인식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카프카즈의 이미지와 그 역할은 현 러시아 정부의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카프카즈 이미지”는 지리적 대상이나 그 곳에 거주하는 산악민족들의 생활이나 전통, 문화를 총합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또한 카프카즈 이미지를 대별해 내려면 이 이미지를 만든 주체인 러시아인의 의식구조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 카프카즈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역할을 했던 당대의 지식인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들은 카프카즈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고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카프카즈에 대한 저술을 하면서 카프카즈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카프카즈에 대한 작품을 써냈던 문학가들, 여행가들, 그리고 카프카즈에서 복무했던 상위층의 군인이나 카프카즈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 등 다양한 집단이 있다. 또한 러시아 사회에서 카프카즈 이미지의 발전은 이러한 다양한 지식인 그룹에서의 이룬 정보의 축척과 학문적 성과들이 이루어 낸 결과이다.
한편, 타슈켄트 주민의 도움을 받는 코칸드 군은 1864년 12월 19일에, 도시 투르케스탄의 한 부분에 진입해 이틀 동안 접전을 벌였다. 코칸트군을 지휘한 알림쿨(Алимкул)은 짜르 군에 항복과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제안했으나 러시아군은 응하지 않았고, 식량이 없는 채로 포위되어 결국 57명 사망, 23명 치명적 부상, 나머지는 패주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러시아제국 군대가 중앙아시아로 팽창하던 시기에 일어난 전투 전체로 볼 때, 이것은 토착민들의 최초의 승리라고 할 정도로 토착민들은 군사기술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1865년 5월, 체르냐예프는 다른 군사작전을 폈다. 5월 10일, 그는 타슈켄트에서 25km 위치에 있는 니야즈벡 요새쪽으로 다가갔는데, 4월 28일과 29일 양일에 걸쳐 격전이 있던 곳이었다. 짜르군대는 포병이 특히 강했는데, 몇시간 동안 요새의 벽을 향해 대포를 쏘자, 타슈켄트의 수문이라 부를 수 있는 요새가 무너졌다. 그 후, 체르냐예프 사령관은 도시 안으로 유입되는 식수를 차단하기 위해 치르칙 강둑을 붕괴시켰으며, 타슈켄트 주민들은 10일 동안 식수가 없는 채로 남겨졌다.
체르냐예프 사령관은 타슈켄트 점령계획을 준비했는데, 부하라 에미리트에서 새로운 증원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재빠르게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타슈켄트에는 10만의 주민이 살았고, 그들이 순순히 도시를 내놓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도시의 12개 성문의 상태를 알고 그는 가장 약한 고리인 카말론스크와 코칸드 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1865년 6월 26일 밤에, 부대의 일부가 카말스크 문으로 다가가 27일 이른 아침에 대포로 공격하고 도시로 들어갔다. 결국 이틀간의 접전을 마치고 29일에 체르냐예프는 타슈켄트를 점령하였다. 1865년 9월에, 타슈켄트가 러시아에 병합되었음이 공표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1864년 코칸드 칸국에 대한 군사행동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코칸드 칸국의 한 부분에 속했던 타슈켄트가 점령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2단계에 이루어진 점령과정은 특히 타슈켄트 점령으로 인해 훨씬 수월했다. 즉, 러시아제국은 이곳을 발판으로 하여 중앙아시아 전 지역으로 팽창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대는 1866년 5월에는 호젠트(Ходжент), 10월에는 유라-튜 베(Ура-Тюбе), 쥐작(Джизак), 그리고 1868년에는 사마르칸트와 카타쿠르간(Каттакурган)을 점령 하였다.
러시아제국은 타슈켄트 정복에 뒤이어 식민지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1867년에 이곳에 투르케스탄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초대 총독으로 카우프만(К. П. фон Кауфман, 1867-1882년 봉직)을 임명하였으며 그의 지휘 하에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 후, 러시아제국은 투르케스탄 정복에 더욱 박차를 가해, 앞서 보았듯이 1876년 코칸드 칸국이 붕괴되었고, 부하라 에미라트와 히바 칸국은 보호국의 형태로 러시아에 예속되었다. 식민지 총독부의 수도라는 상황은 타슈켄트를 매우 다르게 변모시켰다. 전통적으로 타슈켄트의 토착민들은 단층 또는 2층의 점토 주택에서 거주했으며, 길은 구불구불했고, 도시에는 크지 않은 운하들로 구성되는 관개식 거리의 망들이 펼쳐져 있었다. 주민들은 관개수로를 통해 식용수를 얻었고 일상적 필요를 위해 그 물을 사용하였다. 또한 타슈켄트는 전체적으로 4구역(даха)으로 나뉘었는데, 각 구역에는 그 우두머리(хаким)가 있었다. 전통도시의 중심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으며, 건축계획에 따른 중심지의 기능을 하였다. 도시의 중심은 중앙시장 주위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고대도시의 광장처럼 시장들(Ходра, Иски-Джува и Чорсу)이 삼각형으로 흩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점령 직후에 러시아제국은 현지 토착민들의 기본 생활, 규범, 종교 등을 침해하지 않았으며,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토착민들이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살도록 허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1865년 8월 6일, 알렉산드르 2세는 “투르케스탄 주의 행정에 관한 임시법(Временное положение об управлении Туркестанской областью)”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군민(軍民) 합동행정시스템으로서 중앙에서 군사령관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며, 그의 손에 군민 권력 전체가 집중되는 일종의 군정체제였다. 각 행정부서의 자리에는 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군권을 지니고 토착민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일반적인 감시를 하였다. 지방행정은 토착민들에게 맡겨졌는데, 앞서도 지적했듯이 악사칼이 토착민들을 통치했다. 도시의 모든 구마다 악사칼들이 있었는데, 악사칼은 가옥소유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라이시(раисы)는 경찰기능을 담당하며, 바자르 시장에 대한 감독과 공공질서를 감독하였다. 자캬치(закячи)의 직무는 세금징수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지방토착민에게 카지예프(казиев)법. 특히 유목의 토착민들에게 비예프биев법이 보존되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타슈켄트 점령 이후 설치된 투르케스탄 총독부의 초대 총독인 카우프만이 임기 동안 수행한 구체적인 정책들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
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질문은 투르케스탄 총독부의 초대 총독인 카우프만이 재임 기간 동안 시행한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요구한다.
-
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문맥에서 카우프만이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과 그의 임기(1867-1882년)에 대한 정보는 확인할 수 있다.
- 초대 총독으로 카우프만(К. П. фон Кауфман, 1867-1882년 봉직)을 임명하였으며
-
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카우프만의 임명 사실은 언급되어 있으나,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활동 내용은 문맥에 나타나 있지 않다.
- 초대 총독으로 카우프만(К. П. фон Кауфман, 1867-1882년 봉직)을 임명하였으며 그의 지휘 하에 군정이 실시되었다.
-
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문맥에는 군정이 실시되었다는 포괄적인 언급과 알렉산드르 2세가 제정한 임시법에 대한 설명은 있으나, 이것이 카우프만 개인의 구체적인 정책 리스트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또한 카우프만이 수행한 개별적인 정책 사례는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
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카우프만의 임기와 군정 실시라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정책들'에 대한 정보는 문맥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
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주어진 문맥만으로는 카우프만의 구체적인 정책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답변 불가능 판정을 내린다.
근거 (evidence)
- 초대 총독으로 카우프만(К. П. фон Кауфман, 1867-1882년 봉직)을 임명하였으며
- 초대 총독으로 카우프만(К. П. фон Кауфман, 1867-1882년 봉직)을 임명하였으며 그의 지휘 하에 군정이 실시되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카우프만이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군정을 실시했다는 사실만 명시되어 있을 뿐, 그가 수행한 구체적인 정책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문맥 외부의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