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산출물 · 도서자료 기계독해

2014 정책연구과제 1

uuid
2e2abd23-5d61-5140-9b66-10dddb693c5a
content_id
PCY_201506230912112681
doc_id
PCY_201506230912112681_30
발행기관
국립외교원
발행연도
KDC
34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1983년 아르헨티나와 영국 간의 포클랜드 섬 영유권을 둘러싼 무력충돌은 그간 걸어온 반서방, 반식민지 노선의 절정이자 변곡점이었다. 이 시점까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핵개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국민 정서를 이런 방향으로 모는 데 기여한 것은 무엇보다도 군사독재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와 미국과의 비대칭적 관계였다. 영토나 잠재력으로 보면 스스로 강대국의 꿈을 꿀 수 있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었지만, 대륙 북쪽의 세계적 초강대국에 비하면 여전히 보잘것없었고 정치·경제적 침탈을 걱정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런 구조적 한계를 비집고 들어가 자주성을 모토로 정권을 잡은 세력이 군부였으며 핵기술과 핵무장은 국가적 자주성을 지키는 주요 수단으로 쉽게 국민에게 정서적으로 호소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다른 핵보유국은 미국의 주도로 핵확산을 금지하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핵 평화안으로 시작된 미국의 관대한 대외 핵 정책은 이 시점부터 인색하게 변하였고 급기야 남미 국가들에 협조적이었던 핵 기술 공여마저 제한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에 브라질은 먼저 쿠바와 함께 아프리카 비핵화 지역을 제안하여 미국 주도의 비확산 노력과는 독자적인 핵 평화 방안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적극적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브라질은 다시 자신의 지역인 남아메리카를 비핵지대화 하자고 하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 것이 1962년의 유엔 제안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브라질이 뜰라텔롤코 조약을 제안한 것은 미국의 핵질서 주도권에 맞서 독자적인 핵 구상을 만들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며, 미국의 주도권에 맞서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만든 조약을 스스로 거부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미국에 맞설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지속적으로 핵을 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주도의 핵비확산 노력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1967년에 드디어 두 나라는 NPT에 반대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브라질이 독일로부터 공여 받은 기술 및 시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계약으로 꼽힌다. 브라질이 1957년 미국으로부터 최초 연구용 원자로 IEAR-1을 증여받고 이후 좌파 정권으로 바뀌면서 미국과 잠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고 1964년 군사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이런 관계가 지속되었고, 브라질이 뜰라텔롤코 조약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 역시 좌파정권과 연관되어 있음도 이미 기술하였다. 군사정부 들어서서 미국과의 관계가 진전되어 1971년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으로 첫 핵발전소인 ANGRA-1을 설립하였다.25 그러나 이후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인하여 웨스팅하우스가 더 이상 핵 기술을 공급하기를 거부하자 1975년 독일과 획기적인 계약을 체결하고 1,300 메가와트급 경수로 2개 우선 공급, 후에 6개를 더 추가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농축시설과 초보적인 재처리 시설까지 계약에 포함해 마침내 핵 공정의 전체 사이클을 포함하는 기술을 전수받기로 하였다. 셋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핵을 개발한 시기는 두 나라 간에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진행되며 반복하던 시기였다. 먼저 두 나라의 경쟁 관계는 식민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1825년과 1895년에 실제로 두 나라는 물리적 갈등을 경험한다. 핵 개발 과정을 통하여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경쟁구도를 유지하였다. 1970년대 이르러 브라질은 경제개발에서나 국제사회에서의 위치 등에서 아르헨티나를 압도하였으나, 유독 핵개발에 있어서만은 아르헨티나에 뒤처지는 형국이었다. 실제로 핵 문제에서는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을 이끌었다고 볼 수도 있다. 1968년 첫 원자로를 들여오기까지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을 훨씬 앞서 있었고, 1975년 브라질이 독일과 빅딜을 성사시킴으로써 겨우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그래서 농축이나 재처리 시설은 두 나라가 서로 엇비슷하게 발전시켜 1970년대 후반에 모두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후 브라질이 한 발 더 앞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무기개발 프로젝트였다. 이런 경쟁 관계는 1990년 말에 있었던 양국 공동성명(이과수 선언)까지 암암리에 계속되었다. 한편, 두 나라는 동시에 핵 문제에 관한 국제적 공조도 함께 발전시켰다. 1960년대 들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미국 주도의 비확산 노력에 반대 입장을 같이 표명하였으며, 이후 군사정부 시기를 지나면서 두 나라의 핵 문제에 대한 공조는 지속되거나 아니면 오히려 강화되었다. 여기에는 미국이 군사독재와 인권박해에 대한 규범적 반대와 두 나라가 미국의 핵 주도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함께 기여하였다. 이런 협력의 기초 위에 1990년에 이르러 두 나라는 핵 포기 공동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긴 시간을 통하여 쌓인 신뢰관계가 없었다면 서로 경쟁심리가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핵 포기를 위한 공동 전선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 의미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핵 협력은 1970년대 후반 들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79년 두 나라는 이타이푸(Itaipu) 댐 분쟁을 타결하면서 공식적 협력의 길을 텄고, 곧이어 1980년 평화적 핵 이용과 에너지 발전 및 적용에 관한 협력(Agreement on Cooperation for the Development and Application of Peaceful Nuclear Uses of Nuclear Energy)을 체결하였다. ③ 핵 포기: 1990년 11월 28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이과수(Foz de Iguazu) 선언을 발표하였다. 두 나라가 공히 핵개발을 중단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어 1991년 7월 두 나라는 상호 핵사찰 절차를 제도화(ABACC) 할 것을 조약(과달라하라 조약)을 통하여 성사시켰다. 단순한 구두 선언을 넘어서 상호 핵개발의 의심을 없애기 위한 제도까지 만듦으로써 완전한 핵 포기를 상호간에 합의한 것이다. 이후 두 나라가 이룩한 비핵화를 위한 상호간의 노력은 획기적이라 할만큼 급속히 진행되었다.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뜰라텔롤코 조약을 비준하였다. 무려 25년이란 세월을 지나고 나서야 두 나라는 마침내 뜰라텔롤코 조약을 비준하였다. 더 나아가 두 나라는 1994년과 1998년에 각각 NPT에 가입, 비준을 마쳤다. 어떤 계기로 두 나라가 1990년을 열면서 동시에 핵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는 몇 가지 경로를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민주화를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핵개발은 군부 독재와 이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경제발전과 정책의 일관성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핵보유국들이 국제적 규약(NPT)을 통하여 핵 기술을 독점하려는 시도를 보이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태도는 급변하여 독자적 핵개발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핵 문제를 놓고 두 국가가 공히 반서방, 혹은 반식민지적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에 두 국가는 서로 라이벌이라는 생각을 잠시 접어 둘 수 있었다. 미국이 이 지역의 핵개발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보일 때마다 두 국가는 오히려 연합하여 여기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군사정권에 의한 독재를 영유하던 두 국가의 정치 엘리트들은 상당 부분 이에 동조하여 반미, 혹은 반서방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후 핵개발에 크게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오히려 거부하고 싶었던 역내 국가들은 리더 격인 이 두 거대 국가들의 핵 야망에 묻혀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지역 비핵화를 겨냥했던 뜰라텔롤코 조약과 같은 시도는 이런 연유로 당분간 실효성이 없는 명목상의 조약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고, 덩달아 남미 지역 전체가 미국과 서방 주도의 국제사회와는 독자적인 길을 걸어갈 운명이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브라질이 1975년 독일과 체결한 핵 기술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결과로 얻게 된 기술적 범위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브라질이 1975년 독일과 체결한 계약의 상세 내용과 이를 통해 확보한 기술적 범위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브라질의 독일과의 계약 시점과 계약 조건을 추출한다.

    • 1975년 독일과 획기적인 계약을 체결하고
    • 1,300 메가와트급 경수로 2개 우선 공급, 후에 6개를 더 추가하기로 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계약의 구체적 수량과 포함된 기술적 범위를 명시한 문구를 선택한다.

    • 1,300 메가와트급 경수로 2개 우선 공급, 후에 6개를 더 추가하기로 하였다.
    • 여기에 더하여 농축시설과 초보적인 재처리 시설까지 계약에 포함해 마침내 핵 공정의 전체 사이클을 포함하는 기술을 전수받기로 하였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계약 내용(경수로 공급 수량)과 그로 인해 달성한 기술적 성과(핵 공정 전체 사이클 기술 확보)를 결합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브라질은 1,300 메가와트급 경수로 2개를 우선 공급받고 향후 6개를 추가하기로 했으며,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포함한 핵 공정 전체 사이클 기술을 전수받게 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추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1975년 독일과 획기적인 계약을 체결하고
  • 1,300 메가와트급 경수로 2개 우선 공급, 후에 6개를 더 추가하기로 하였다.
  • 여기에 더하여 농축시설과 초보적인 재처리 시설까지 계약에 포함해 마침내 핵 공정의 전체 사이클을 포함하는 기술을 전수받기로 하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브라질은 1975년 독일과 1,300 메가와트급 경수로 2개를 우선 공급받고 이후 6개를 추가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계약에는 농축시설과 초보적인 재처리 시설이 포함되어 있어, 결과적으로 핵 공정의 전체 사이클을 포함하는 기술을 전수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