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따라서 조세제도의 개혁이나 징세행정의 혁신은 단순히 기술적 가능성이나 기계적 방법론만을 기초로 접근될 수 있는 성질의 국가정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도의 정치적 리더십을 토대로 이해관계 집단에 대한 설득과 조정을 통한 국민적 합의과정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제도로서 차질 없이 집행하기까지는 장기간에 걸쳐 세부 제도설계를 위한 연구와 반복적 시뮬레이션과 보정과정에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조세개혁을 구상하는 정부는 1970년대 한국의 부가가치세 제도 도입 사례에서 좋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 초반 한국정부는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위한 중화학공업 투자를 촉진하는 데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조달을 위한 수단으로 부가가치세 제도를 도입하였다. 당시 한국정부는 경제개발과 함께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중화학공업화를 집중적으로 추진하였고, 이러한 정부 주도적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재원조달을 위해 다양한 조세제도를 개발⋅운영하였다. 그 결과 조세체계는 매우 복잡해지고 세무행정이 불투명해져 탈세 등 세무비리가 빈발하는 가운데 재정투자 소요를 충당할 만큼 충분한 세수증대 효과는 없이 국민의 조세저항이 거세지게 되었다.
1980년대 전반기 재정긴축을 통한 재정건전화에 성공한 한국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한국과 유사한 정치경제적 환경에 처한 외국에 매우 유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잠재 협력대상국에 자문할 때 유의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한국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파퓰리즘적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재정파탄의 전형적 사례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브라질의 경우,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중주의 체제, 배제적 권위주의 체제, 재민주화 체제 등 다양한 정치체제를 거쳐 오면서 한결같이 경제안정화를 도모하고자 했지만, 실패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정치체제의 유형은 다양했지만, 사실상 모두가 경제성장을 전제로 하는 체제 정당화에 역점을 두어, 재정적자(민중주의 체제와 재민주화 체제)나 외채(군사정부)에 의존함으로써 정부부채는 늘어나고 인플레이션 수속에도 정책상의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1980년대 전반기 한국은 정치적으로 권위주의 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최고통치권자로부터 관료, 현장 일선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책에 대한 학습과 교육에 힘쓰고 정책 관계자와 이해당사자들 간의 소통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영업세법에 따르면 과세표준과 세액을 예외적으로 추계 결정하는 경우에도 세무공무원의 자의적 판단을 배제하기 위하여 합리적인 방법으로 추계조사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업세는 대부분 과세표준이 추계조사로 이루어지고 이를 토대로 세액이 결정⋅부과되었다. 이처럼 세무행정이 과학적이지 못하고 추계조사를 토대로 인정과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성숙하지 못한 국민의 납세의식과 전근대적인 기업경영 행태를 극복하지 못한 사회적 환경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납세자의 기장을 유도하고 이를 토대로 납세신고를 하도록 지도해 나가고 있었다. 영업자의 성실한 기장 행태를 정착시키기 위해 성실 기장이행자에 대해서는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하고 불이행자에 대해서는 가산세를 부과하였으며, 녹색신고제도를 도입하여 성실한 신고자에 대해서는 녹색신고자로 지정하고 서면조사로서 실지조사를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개인 납세자는 대부분 무기장 사업자로서 이들의 성실신고를 기대할 수 있을 만큼 국민의 납세의식이 성숙되지는 못한 실정이었다.
여러 기금들 중의 하나인 곡물관리기금은 가장 규모가 큰 기금인 동시에, 한국은행으로부터의 대출에 가장 크게 의존했다. 농민의 소득을 안정화하기 위해 정부는 미리 설정된 가격에 쌀과 호밀을 구입하기 위해 전념했다. 문제는 구입가격이 항상 시장가격보다 높은 수준에서 설정되는 데 있었다. 이 같은 ‘이중가격정책’은 공공 자원을 통해 농부들의 수입을 보조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곡물관리기금은 필연적으로 구매와 재판매 가격 간에 증가하는 차이로 인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대되었다. 1976년에 두 가격 간의 차이는 구매 가격의 50% 이상을 초과했고, 기금 적자는 2천5백억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세금 수입이나 채권 발행으로 기금의 적자를 메우는 대신에, 정부는 전적으로 한국은행 대출에 의존했다. 경제기획원(1977)에 따르면, 1972년에서 1976년까지 5년 동안 한국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기금의 누적 액수는 6,260억원이었다. 이는 1976년의 후반부에 이르러 대략 본원통화의 절반에 해당할 만큼 커졌다. 실제로 1976년 한 해의 적자는 2,500억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는 본원통화 증가의 60%를 초과하는 수준이었다.
양곡관리기금의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은 1981년부터 시작되었다. 1981년 추곡수매가 인상과 관련된 논란을 중심으로 그 추진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부는 1981년 1월 27일 물가대책회의를 통해 정부미 가격 및 공공요금 인상률을 각각 5%와 15% 이내로 억제하기로 했다. 1981년 5월 21일 1980년도 양곡기금특별회계 적자액은 2,419억원으로 발표했다. 1981년 6월 16일 1981년도 보리 수매가격은 1980년보다 12.5% 올려 2등품 기준 76.5kg들이 가마당 29,700원으로 확정하고, 7월 1일부터 8월 말까지 2개월간 500만섬 범위 안에서 수매했다. 추곡수매를 몇 달 앞두고 임양택 한양대 교수는 매일경제 칼럼(1981. 6. 26)을 통해 81년도 상반기의 경제상황을 요약하면서 경제안정을 위한 국내정책으로서 이중곡가제 폐지를 언급하고 양특 적자폭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소개했다.
KDI 정책협의회 다음날인 10월 8일 하오 정부와 민정당은 중앙청에서 중요간부 회의를 열고 추곡수매가 책정 등을 협의했다. 정부 측에서는 신병현 부총리, 이승윤 재무부 장관, 고건 농수산부 장관이, 민정당 측에서는 권정달 사무총장, 나석호 정책위의장, 이종찬 원내총무 등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민정당 측은 ‘추곡수매가 확정은 생산비의 인상 등 농촌의 사정을 감안, 조금 무리가 뒤따르더라도 상당 수준 인상해서 농촌의 풍년 경기를 유지’해주도록 요청했으나 정부 측은 ‘현재의 재정사정으로는 대폭 인상이 어렵다’는 입장을 표시했다(경향신문, 1981. 10. 8). 집권 여당마저 추곡수매값의 상당한 수준 인상을 요청하고, 논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사설(1981. 10. 12)을 통해 KDI의 주장을 지지했다.
추곡수매값 인상폭에 대해 경제기획원과 농수산부의 입장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경제기획원은 1982년도 물가를 10%선에서 안정시키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1981년 추곡수매값도 10%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농수산부는 1980년 8월부터 1981년 8월까지 도매물가가 21.2%, 농가구입 가격지수가 27.7% 인상된 점을 들어 20% 이상 올려야 한다고 맞섰다(동아일보, 1981. 10. 21). 국민당은 10월 23일 상오 1981년도 추곡수매가 문제에 관한 당직자 회의를 열고 1981년도 추곡수매가를 1980년 대비 30% 인상하고 농민이 희망하는 쌀을 전량수매할 것을 정부에 촉구키로 결의했다. 국민당은 이날 이만섭 부총재 주재로 총재단⋅정책위의장단⋅총무단⋅국회경과⋅농수산위 소속 의원 연석회의를 열고 농민들의 인건비를 비롯해, 생산비가 작년 대비 25% 올랐으며, 농가에 최소한 5%의 이윤이 가도록 해야 하므로 1981년도 추곡가 인상률은 30%가 돼야 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경향신문, 1981.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