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네덜란드는 6·25전쟁 때 대한민국에 해군과 육군을 파병해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란에 휩쓸렸던 네덜란드는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이에 네덜란드는 전후 군사적·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엔안보리 결의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미국의 서유럽부흥계획의 일환으로 실시된 마셜플랜(Marshall Plan)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기꺼이 군대를 파병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출동이 가능한 해군 구축함 1척을 먼저 한국 해역으로 보냈다.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트센(Evertsen) 함이 1950년 7월 19일, 전쟁발발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한국해역으로 달려와 서해안에서 작전활동에 들어갔다. 네덜란드 군함은 영국 앤드루스 해군소장이 지휘하는 서해안지원전대에 배속돼 해상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네덜란드 해군은 맥아더 원수가 주도한 ‘세기의 작전’이자 6·25전쟁의 최대의 분수령이 됐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됐다.
해군 파견에 이어 네덜란드 정부는 한국에 파견할 지상군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바로 1950년 8월 11일이었다. 한국전선에서는 낙동강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네덜란드 정부는 모병을 실시하고, 8월 28일에 1개 보병대대의 파병을 결정했다. 네덜란드의 지상군 부대는 10월 26일 로테르담 항을 출발해 한 달간의 항해 끝에 11월 2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후 네덜란드 대대는 대구로 이동하여 유엔군수용대에서 10일간에 걸친 현지적응훈련과 부대정비를 실시했다. 적응훈련을 마친 네덜란드 대대는 12월 5일 수원으로 이동해 미 제2사단 제38연대에 배속됐다. 네덜란드 대대의 첫 임무는 유엔군의 보급로에 대한 경비였으나, 얼마 후 전선으로 이동해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네덜란드 대대는 1951년 1월에 강원도 횡성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횡성전투는 네덜란드 대대가 겪은 첫 전투였다. 당시 네덜란드 군은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지형에 익숙하지 못했고, 강원도의 추운 날씨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동양인인 국군과 공산군을 구별하는 것도 어려울 때였다. 중공군은 이 점을 노리고 1951년 2월에 네덜란드 대대를 급습했다. 이른바 중공군의 2월 공세였다. 한국군으로 가장한 중공군들이 네덜란드 대대를 급습하여, 부대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다음 대대지휘소를 습격했다. 이때 지휘소에 있던 대대장 오우덴(M.P.A. den Ouden) 중령과 티멘스 대위를 비롯한 17명이 전사했다. 네덜란드 대대로서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 대대는 선임자인 화기중대장 지휘 하에 밤새도록 중공군과 혈전을 벌이며, 다음 방어진지로 침착하게 이동했다.
이후 네덜란드 대대는 홍천 북방의 한계지역에서 인해전술을 앞세워 거대한 파도처럼 압박해 오는 중공군의 5월 공세를 투혼을 발휘해 격퇴했다. 그리고 강원도 인제까지 밀고 올라갔다. 네덜란드 대대는 이곳에서 멈추지 않고 중동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던 중동부전선의 ‘펀치볼(Punchbowl) 전투’에 참가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펀치볼 지역의 산악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쳤다. 펀치볼에서 험준하기로 이름난 1120 고지와 가칠봉에서도 전투를 치렀다. 인접해 있는 단장의 능선에서도 그 용맹성을 잃지 않으며, 공산군을 전율케 했다. 네덜란드 대대의 뛰어난 전공과 감투정신에 미국 정부는 두 번째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했다. 네덜란드 대대의 활약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2년에는 전장무대를 중부전선의 철의 삼각지대로 옮겨 전초진지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며 중공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때 치른 전초진지 전투가 아스널(Arsenal)고지, 이리(Eerie)고지, 요크(Yoke)고지, 엉클(Uncle)고지 전투이다. 전초진지 전투에서 네덜란드 대대는 중공군의 끊임없는 기습을 막아내며 진지를 사수했다.
네덜란드 대대가 점령한 방어진지는 원주 방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만종역 앞의 325고지였다. 325고지는 횡성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도로의 중심에 있는 곳으로, 유엔군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될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만약 이곳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유엔군의 원주방어선이 위태롭게 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현 전선에서 수 십km 떨어진 후방으로 물러나 전선을 다시 조정해야 될 위급한 상황이었다. 상급부대에서는 이러한 중요성을 고려해 네덜란드 대대에 단호하면서도 비장한 지시를 내렸다. “죽든, 포로로 잡히든 고지를 사 수 하 라 !(Killed or captured but you take that hill!)”는 것이었다. 치열한 격전 끝에 네덜란드 대대는 325고지를 사수했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 대대는 또 다시 10명이나 희생을 당했다. 사투 속에 벌어진 혈전이었다.
전쟁 당시 이 씨의 부모님은 목하 열애 중이었고 이철 선생이 종로의 연인 집을 첩보기지로 쓰면서 세상에 다시 없는 연애 스토리가 탄생했다.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이 씨의 어머님 최상렬 여사도 국가유공자가 됐다. 두 분은 전생이 잠시 소강상태이던 51년 11월 서울시가 주최한 합동결혼식에서 전우들과 함께 식을 올리고 정식 부부가 됐다. 생전 ‘혼자 살아있는 것도 수치스럽다. 이름도 군번도 없이 사라져간 동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싶다’고 늘 말해왔다던 고 이철 선생은 국가가 주는 훈장도 거부하고 켈로부대원들의 명예회복에 힘쓰다 2년 전인 지난 2013년 운명했다. “아버지의 임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의 의미가 여러 이념적 다툼 때문에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어 그는 모두가 반대한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해 전황 반등의 계기로 만든 것은 맥아더 장군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광복군 창군 제75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달 17일 오전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렸다. 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김우전) 주관으로 열린 이날 기념식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광복군동지회원, 시민,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와 축사, 광복군 창군 선언문 낭독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기념식 후에는 김우전 광복군동지회장의 강연과 학술회의가 이어져 광복70년과 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 가릉빈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국군으로 창설됐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주축으로 정식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한국광복군은 당시 ‘광복’이라는 간행물을 발간하는 한편 방송과 함께 선전지를 전후방에 배포함으로써 애국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돼 온 한국 청년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도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