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산출물 · 도서자료 기계독해

2014-03인문정책연구총서_갑오년의 동아시아와 미래한국

uuid
3c28ee1a-4699-55b8-a0d4-c49f990c4267
content_id
PCY_201508120408101551
doc_id
PCY_201508120408101551_15
발행기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발행연도
KDC
0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더 이상 속방자주로는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할 수 없으며 독립자주를 통해서만 온전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인식은 과거의 천하적 세계관에서 국제 정치적 세계관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과의 전통적 속방관계 지속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자주권은 침해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곤 했다. 중국과의 오랜 사대관계 속에서도 내치 외교는 자주권을 행사해 왔다는 논리이다. 속방자주론은 동아시아의 유일한 초강대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국제정치를 사고할 수밖에 없었던 근세 조선의 전형적 발상법이었다. 당시 속방자주론은 동아시아 세력균형에 대한 판단을 기초로 중국의 힘에 기대어 조선의 안보를 확보하고자 하는 전략적 고려의 소산이기도 했다. 유길준의 양절론도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의 우월적 지위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조선의 자주권 행사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다. 유길준의 논리는 '속방독립론'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속방자주론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이 변하면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는 한시적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속방자주론을 핵심으로 하는 김윤식의 초기 외교노선은 박규수의 것을 답습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규수는 일찍이 미국의 개항 요구시 중국 정부에 보내는 회자문「美國封函轉遞咨」에서 “무릇 인신은 의리상 외교를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중략)...그 나라 사람 중에 혹시 호의를 품지 않고 와서 능멸하려고 한다면 이를 막아 제거하는 것도 역시 천조를 지키는 번방의 직분이다.”라고 하여 전통적 속방관계를 서양제국과의 수교를 거부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다. 박규수는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중국과의 속방관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는 청으로부터 일본의 조선침략설에 관한 자문을 받은 이후 연행시 교류했던 만청려에게 서신을 보내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청의 지원을 요청했다. 즉, 청일수호조규에 있는 중국의 속방은 일본이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의거하여 일본의 침략을 저지해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수천년간 한중관계에서의 맥락에서만 자주를 고민해 온 조선의 전통에서 속방과 자주는 결코 모순적 관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속방이라는 지위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사고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황토재가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적 상징공간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의 제2차 상징적 장소화의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직후인 1981년 12월, 전봉준의 생가가 보수되었고, 1983년에는 45,000여평의 용지를 확보하고, 그해 말에 황토현전적지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듬해에는 황토현전적지관리사무소가 설치되어 전적지 관리 및 보수·정화를 정부가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기념관에는 1984년에 제작된 이의주의 동학동민 혁명 기록사 연작이 전시되었다. 1986년에는 황토현전적지 주위의 진입로가 포장되고, 그 이듬해에는 전봉준의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그해 12월 9일에는 동학농민봉기 당시의 각종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기념관이 개관되어 황토현 전적지정화사업이 마무리되었다. 1980년대에 이루어진 1894년에 대한 기념이 국가주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1980년 광주항쟁의 충격은 한국사회에 대한 ‘변혁’의 상상력을 키웠으며, 그것은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농민혁명을 새롭게 재현하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1985년 오윤의 판화 ‘칼노래,’ 1989년 송기숙의 장편소설 ‘녹두장군’은 이를 대표한다. 그렇다면 이 기념관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이 기념관의 전시실은 이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은 ‘무명농민군’ 위령과 함께 19세기 농민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주고 있으며, 2층은 동학혁명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2층 전시실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서사는 농민혁명의 배경과 조짐, 혁명의 시작과 끝, 농민항쟁 그 이후로 구분된다. 각각의 제목은 ‘동학농민혁명을 향하여,’ ‘고부에서 전주성까지,’ ‘무르익은 혁명의 희망,’ ‘폭풍우 몰아치는 조선산하,’ ‘일본군에 가로막힌 꿈,’ ‘끝나지 않는 함성,’ ‘희망,’ ‘농민군들이 꿈꾼 세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는 동학의 창도와 공인운동, 동학의 경전, 농민혁명 주체세력의 형성이 언급되고, 농민혁명의 서사로, 사발통문과 고부농민봉기, 무장기포와 백산봉기, 황토재 전투와 황룡촌 전투, 전주성 점령과 완산 전투, 폐정개혁안과 전주화약, 집강소설치를 다룬다. 이어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삼남 각지의 척왜봉기라는 제목 하에 재봉기결정과 준비, 퇴각 그리고 해산, 농민군 지도자의 희생과 일본군의 토벌, 최후의 항쟁을 다루고 있다. 전시의 후반부에 전봉준 공초의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갑오개혁 이전 김윤식의 자강정책 모델이 된 것은 영선사행을 통해서 목격하게 된 청의 양무운동이었다. 중체서용 식의 인식에 입각해 화포, 화륜선, 무역 등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용하여 서양을 제압하겠다는 발상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스승 박규수가 연행사행을 통해 청의 양무운동이 성과를 거두어 서양이 누리던 이점이 상당 부분 상쇄되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인식은 김윤식에 이르러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청의 양무모델에 대한 선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대조된다. 그의 일본관은 위정척사론의 ‘왜양일체’ 관념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명치유신이 중국의 양무운동과 같이 서양의 장기만을 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서양화하였다는 논리이다. ‘개화’라는 말에 대한 김윤식의 거부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개화설이 정삭과 복색을 바꾸는 등 서양을 일방적으로 모방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대안적 개념으로 ‘시무’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시무란 ‘당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를 일컫는 것으로 ‘시기와 나라에 따라’ 시무는 다른 것이다. 김윤식이 개화정책 추진에서 개화당과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갑신정변에 반 대한 것은 주로 영선사행시 형성된 식견과 청과의 커넥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윤식은 일찍이 박규수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인연도 있어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운 편이었으며, 갑신정변시 발표된 내각에 예조판서에 임명되는 등 심정적 동조인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시 일본의 개입을 상당히 우려하여 청군의 파병을 요청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일본의 개입과 일본식의 근대화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끌어들인 갑신정변의 명분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신정변 후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등 중간파 개명관료들은 원세개 등 청과의 커넥션을 토대로 민씨척족 세력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일시적으로 정국을 주도하는데 성공하였으나 한러밀약사건 등을 거치면서 실각에 이르게 된다. 일본인들의 각별한 환대에 루스벨트는 기쁨을 멈추지 못했다. 그가 일본의 지도자들을 너무나도 경외했기 때문이었다. 포트 아서(Port Arthur, 뤼순)에서 러시아 함대를 순식간에 수장시켜버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기습 공격은 이미 대통령에게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총을 든 정의로운 사나이”가 권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는 그의 생각에 걸맞게, 루스벨트는 함대를 통해 일본인들이 미국의 새로운 권능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일본은 그때 이미 강력한 해양국가였다. 이렇게 미국 해군이 역량을 과시하는 모습을 감상하기에 딱 적당한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함대가 1909년 2월 햄튼 로즈(Hampton Roads)에 돌아올 때쯤, 퇴임이 며칠 남지 않았던 루스벨트는 당당히 자신의 성과를 자랑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전임 대통령보다도 해군에 큰 기여를 했다. 미 해군은 이제 미국의 강력한 전력이었고 1,096명의 장교와 44,5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해군이었다. “백색 대함대(Great White Fleet)”는 어떤 해군 강국이 했던 것보다 긴 항해를 하면서 각지에 선을 보였다. 비록 미국은 하나의 대양만을 방어할 수 있는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마치 두 대양을 제패할 해군이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16척의 전함은 항해 도중 리우 데 자네이루, 부에노스 아이레스,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 등 가는 곳마다 큰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공격사건 때문에 일본 방문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16척의 백색 군함은 요코하마 항의 짙은 안개를 가르고 나타나 일본이 몇 개월 동안 준비했던 성대한 환영회를 맞이했다. 지역 주민들은 앞다투어 나서서 선원들에게 장관을 선사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천 명의 대학생들이 그들을 안내했고 수만 명의 학생들은 미국 노래를 불렀다. 그 사이 고위 장교들은 덴노를 알현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또한 반중 연대를 꾀하는 외교전략 역시 21세기 중국경제의 확장성과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 강화의 추세를 볼 때 지극히 1894년적 사고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평가하게 된다. 1930년대 중일전쟁 전후 일본의 지배 엘리트들은 중국을 품지 못하는 동아공동체는 성립될 수 없음을, 나아가 일본의 활로를 개척할 수 없음을 지적한 바 있다. 21세기의 동아시아 역시 중일간 협력 없이 평화와 번영을 기대하기 어려움은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미국, 중국, 일본이란 세 대국이 서로 다른 꿈을 갖고 있는 속에서 한국은 이들이 평화적으로 경쟁하며 협조할 수 있도록 돕는 중견국의 꿈을 키워야 한다. 한국은 어느 한편에 기대어 이득을 보려는 약소국 외교로는 더 이상 커진 덩치에 비례해 다면화된 국익을 성취할 수 없다. 중견국으로서 강대국간 신뢰구축을 돕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협력을 촉진하는 중개자 역할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동아시아 미래에 대한 비전을 마련해야 한 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김윤식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김윤식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구체적인 논리적 근거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김윤식의 일본관과 메이지 유신에 대한 서술을 추출한다.

    • 청의 양무모델에 대한 선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대조된다.
    • 명치유신이 중국의 양무운동과 같이 서양의 장기만을 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서양화하였다는 논리이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부정적 인식의 핵심 원인이 되는 '서양화'에 대한 김윤식의 관점을 선택한다.

    • 명치유신이 중국의 양무운동과 같이 서양의 장기만을 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서양화하였다는 논리이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김윤식은 서양의 장점만을 수용하는 양무운동과 달리,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바꾸는 메이지 유신의 방식이 일방적인 모방이라고 판단했음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메이지 유신이 서양의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서양화한다는 점이 부정적 인식의 이유임을 정리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추론된 내용을 바탕으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청의 양무모델에 대한 선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대조된다.
  • 명치유신이 중국의 양무운동과 같이 서양의 장기만을 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서양화하였다는 논리이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메이지 유신이 중국의 양무운동처럼 서양의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서양화하였다는 논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