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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문화재위원회 제11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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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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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70725_29
발행기관
문화재청
발행연도
2019
KDC
6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그 후 병란을 겪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불에 타버렸다.45) 병란은 정묘호란(1627년 1월 ∼ 1627년 3월)이나 병자호란(1636년 12월 ∼ 1637년 1월)으로 추정되는데 경상도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던 병자호란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중수는 건립자인 이말정과 교류하던 현주(玄洲) 조찬한의 친손자 조후(趙侯)가 태수로 부임하여 중수를 독려하여 1689년(숙종 15, 己巳)에 시냇가(溪邊)에 네 칸의 정자를 세웠다. 정자 의 위치는 지금의 감천 변으로 추정되는데 원 자리에 건립한 것인지 감천 변으로 옮겨 중건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후자로 추정된다. 중건 규모도 초축과 같은 규모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선조에 대한 추모와 학업을 익히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중건 이후 1727년(영조 3 丁未)에 공사 규모와 내용을 알기 어렵지만 한 차례 중수가 더 있었다. 중창 이후 38년 만에 중수이므로 크지 않은 공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해에 다시 병화(兵火, 이인좌의 난인 무신란(戊申亂)으로 추정)를 입어 재목이 불에 타고, 1736년(영조 12, 丙辰) 남아 있던 집마저 수해까지 입어 흔적 없이 사라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면에서 보았을 때 3칸 대청은 전체가 마당에 면하지 않고, 가운데 칸만 온전하게 드러나고 좌우의 칸은 3분의 2정도가 드러난다. 또 날개채의 입장에서 보면 앞뒤 길이 2칸에 좌우의 폭이 1칸반의 당당한 크기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대청을 약간 희생하여서 양 날개채의 다락방을 더 돋보이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칸치수를 보면, 몸채부의 전면 도리칸 치수는 2,800mm로 동일하게 5칸을 만들었고, 보칸 치수 역시 2,160mm로 2칸을 같이 하였다. 날개채는 두 칸이 서로 차이가 나는데, 앞뒤로 튀어나온 도리칸 치수는 몸채에 붙은 한 칸은 3,150mm, 그 다음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마지막 칸은 2,760mm로 하였다. 날개채의 보칸은 조금 더 작게 1,860mm로 하여, 전체 3,720mm의 크기를 둘로 나누었다. 즉 몸채는 9자 도리칸에 7자 보칸, 날개채는 10자반과 9자의 도리칸에 6자의 보칸 치수를 갖는다. 날개채의 보칸을 단위 크기를 줄여가면서 굳이 2칸으로 나눈 것은 팔작지붕을 받치기 위해서 충량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두 날개채의 마구리면 가운데 기둥 위에서 뻗은 충량이 들보 위에 있는 대공의 중간에 걸쳐 있다. 김상헌은 풍산으로 처음 낙향하여 1618년부터 1621년 봄까지 3년간 살았으며, 3년 간의 생활을 풍산 소요산(素耀山)에서 보냈다. 소요산은 본래 금산촌(金山村)으로 불렸으나 마을 이름이 너무 화려한 것을 꺼린 김상헌이 청렴결백의 의미를 지닌 소(素)자를 사용하여 소요산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김상헌은 1621년에 안동에서 석실로 돌아왔다. 그는 선영 아래 조상의 사당을 짓고 그 남쪽 언덕에 집을 지어 아들과 손자와 함께 살았다. 그는 생에서 좌절을 맛볼 때 안동의 풍산으로 낙향하기도 했으나 주로 기거했던 곳은 남양주의 석실이었다. 이조판서 이귀를 탄핵하다가(1633년) 실각하여 물러난 곳도 석실이다. 김상헌은 두 번째로 병자호란 이후 그는 병든 몸으로 하직 인사를 고하고 1637년 2월 7일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척화론을 굽히지 않았으며, 항복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삭탈관직을 당하였고, 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발각되어 심양으로 압송되어 유폐 생활을 했다. 이러한 일 이후 김상헌은 1637년 안동으로 낙향하여 청원루에 잠시 머물다가 이듬해 서미동 목석거(木石居)로 은거해서 1640년 11월 심양으로 압송되기 전까지 3년 9개월간 안동에 머물렀다. 청원루는 안동에서 풍산읍을 거쳐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안동김씨 동족마을인 소산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소산마을은 선안동김씨와 후안동김씨의 두 안동김씨가 함께 생활하는 마을로 전체적으로 남향하고 있으며 동서방향으로 길어서 주산이 서쪽에 있고 좌청룡이 북쪽, 우백호가 남쪽에 길게 산맥으로 이어져 있다. 청원루는 좌청룡 자락 끝에 자리하며 좌청룡을 배산으로 삼고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으로 좌향을 잡고 있다. 전면에는 5m 정도의 마을길에 접해 있고, 동·서·북쪽 모두 인가들이 배치되어 있다. 전면 중앙에 솟을삼문을 배치하였고 대문간 양 측면 중앙을 시작으로 사방에 담장을 둘렀고 대문간을 지나 마당을 2단으로 구성하여 외벌대로 구성한 한단 위에 본채의 마당이 구성되어 있다. 본채를 제외한 모든 시설은 1977년과 197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창건 당시에는 사랑채를 비롯하여 총 41칸의 살림집이 있었다. 현재의 배치구성 중에서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본채인 청원루뿐이지만 주변 환경이라고 볼 수 있는 마을전체의 구성은 조선 초 김상근이 입향하였을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변화과정을 담고 있다. 한편 조선 중기 16세기에는 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형성한 사림(士林)들이 어지러운 정세를 피해 낙향하여 산수가 빼어난 곳에 정사(精舍)를 지어 은거하며, 심신을 도야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당시 조선의 선비들이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가 그의 생애 대부분을 출신지 복건성(福建省)에 낙향해 은거하며, 노봉산(蘆峰山) 운곡(雲谷)에 회암(晦庵), 무이산(武夷山)에 무이정사(武夷精舍) 등을 경영하며 학문을 탐구하고 제자들을 교육했던 것을 본받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16세기 이래로 전국 각지에 많은 정사들이 건립, 운영되었는데, 조헌이 옥천 안읍에 건립한 후율정사나, 그를 기리기 위해 김만균이 주도해 지은 이지당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지당은 충북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 西華川가에있는 조선시대에 건립 된 서당이다. 충청도에서 그간 서당건축으로 꽤 주목을 받아왔고 현재 충북유형문화재 제 42호로 지정(1977년 12월), 보호 관리되고 있다. 이 서당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重峯 趙憲(1544∼1592)의 옥천 은거, 후진교육 등과 깊은 인연이 있고 아울러 宋時烈(1607∼1689)도 정자 건립에 관여를 했다. 조헌은 경기도 김포출신으로 1567년 문과 식년시 병과에 급제한 후 내,외직을 두루 거쳤지만 옥천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던 곳이다. 다만 계모 봉양의 이유로 보은 현감(1582년 8월 부임)을 자처한 것과 정치적인 이유로 2차례 (1차 : 1584년 겨울부터 1586년 10월, 2차 : 1590∼1592 임란 전)옥천으로 내려온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는 옥천에 은거하면서 후학교육에 몸담았고 그게 인연이 되어 이지당 건립이 이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당시 그가 교육에 직접 관여한 사실도 전해지는데 하나는 현이지당과 가까운 각신동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던 覺新書堂 현판을 그가 작성했고, 1584년 12월에는 그가 머물던 곳에 있었던 後栗精舍 상량문도 작성했다. 금강(錦江) 상류의 한 지류 소옥천(小沃川)을 굽어보는 산비탈에 남동향으로 입지해 있는 옥천(沃川) 이지당(二止堂) 자리는 일찍이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의병장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 유상(游賞)했던 곳이다. 조헌은 1584년(선조 17) 이래 옥천군 동쪽의 안읍(安邑) 율치(栗峙)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당시 군 서쪽의 이곳 각신(覺新) 마을에 살던 왕실 후손 이탁(李擢)이 그를 흠모해 이곳으로 청해 모셨고, 여러 해 왕래하며 유상했던 조헌은 이곳의 빼어난 풍광을 시로 지어 남기기도 했다. 조헌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문하에 드나들며 그의 학풍을 계승했고, 관직생활 중 1582년 보은현감 부임 후 2년 만에 탄핵당해 파직되자 옥천으로 낙향했는데, 옥천에 머무는 동안에는 안읍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조헌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과 힘을 모아 청주를 탈환하고,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이동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 대부분이 흩어져 버렸고, 남은 700명의 의병과 금산전투에서 분전했으나 의병들과 함께 순절하고 말았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김상헌이 안동으로 낙향한 후 머물렀던 청원루와 목석거 중, 어느 곳이 더 규모가 큰 건물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김상헌이 안동에서 머물렀던 두 장소인 '청원루'와 '목석거'의 건축물 규모를 비교하여 더 큰 곳을 찾는 것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청원루에 대한 정보와 목석거에 대한 정보를 각각 추출한다. 청원루는 소산마을에 위치하며 창건 당시 사랑채를 포함해 총 41칸의 살림집이 있었다는 정보가 있다. 목석거는 김상헌이 은거했던 장소로 언급된다.

    • 청원루는 안동에서 풍산읍을 거쳐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안동김씨 동족마을인 소산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 창건 당시에는 사랑채를 비롯하여 총 41칸의 살림집이 있었다.
    • 이듬해 서미동 목석거(木石居)로 은거해서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청원루의 규모(41칸)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지만, 목석거의 구체적인 규모나 칸수에 대한 정보는 문맥에 나타나 있지 않다.

    • 창건 당시에는 사랑채를 비롯하여 총 41칸의 살림집이 있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청원루의 규모는 알 수 있으나, 비교 대상인 목석거의 규모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므로 두 건물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목석거의 규모에 관한 정보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두 건물의 규모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큰지 판단할 수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므로 답변 불가능 판정을 내린다.

근거 (evidence)
  • 청원루는 안동에서 풍산읍을 거쳐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안동김씨 동족마을인 소산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 창건 당시에는 사랑채를 비롯하여 총 41칸의 살림집이 있었다.
  • 이듬해 서미동 목석거(木石居)로 은거해서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을 통해 청원루의 창건 당시 규모는 확인할 수 있으나, 비교 대상인 목석거의 규모에 대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 건물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목석거의 규모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