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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문화재위원회 제6차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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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8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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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80535_4
발행기관
문화재청
발행연도
2016
KDC
6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일월정명덕불의 세계에 태어나 열반에 든 여래의 사리를 거두어 8만 4천개의 탑을 세우고 그 사리에 공양하기 위해 8만 4천개의 탑 앞에서 팔을 태워 7만 2,000년 동안 공양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은 『법화경』의 내용에 근거하여 일반적으로 탑 앞에 공양을 올리는 보살상을 약왕보살이라고 생각하게된 것 같다. 이와 같은 약왕보살의 소신공양에 대한 이해는 고려후기 변상도에서도 찾아진다. 고려후기에 그려진 『법화경』권 6의 변상도에는 탑 앞에서 약왕보살의 소신(燒身) 공양의 장면이 보이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손을 태우는 약왕보살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보다 더 이른 현존 예로는 남송대의 묘법연화경판화(1159년 이전)을 꼽을 수 있겠는데, 팔각오층탑 앞에서 서서 손을 태우는 약왕보살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민지는 『신효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 에서 월정사 “약왕보살”이 “향로”를 들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는 민지가 향로를 든 보살상을 직접 보고 적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손을 태우지 않고 향로를 들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이 공양보살상이 약왕보살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상의 높이만 180cm, 대좌를 포함한 전체높이가 250cm에 달하는 환조의 석상으로, 보존상태로 양호하고 조형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보살상은 양식적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에 국보 제48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강원도 강릉지역의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과 함께 높은 보관과 터질듯한 상호, 우아한 신체 등 조형적으로 고려시대 초기 지역적인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보살상이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에 보이는 이러한 지역성은 동시에 요나라 보살상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고려와 요와의 문화교류를 입증해주는 국제성을 갖춘 보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국가지정문화재로서 갖추어야할 희소성, 예술성, 역사성을 모두 겸비하고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나 강원도 지역의 다른 유례와 같이 탑 공양과 관련된 보살상이라는 점에서 국보 제48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일괄로 국보로 승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불국사〈삼장보살도〉(1739년)는 화면 중앙의 천장보살, 왼쪽(향우측)의 지지보살, 그리고 오른쪽(향좌측)의 지장보살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여러 권속들이 에워싼 형태이다. 천장보살은 투명 두광을 갖춘 협시 진주보살과 대진주보살을 비롯해 천부중을, 지지보살은 녹색 두광을 갖춘 신중상을 비롯해 역사상과 권속들을, 그리고 지장보살은 녹색 두광을 갖춘 신중상을 비롯해 시왕․판관․명부사자 등을 배치하고 있다. 천장․지지․지장보살 3위 모두 높은 방형의 수미단 위의 연화좌에 정면향으로 결가좌하였다. 육신은 황색을 바르고, 육신선은 가는 먹선으로 처리하였다. 다만, 보살상 3위의 양쪽 눈은 원 바탕 위에 백색을 살짝 덧바르고 먹선으로 위 눈꺼풀과 눈동자 윤곽을 다시 잡은 흔적이 보인다. 천장과 지지보살의 보관은 보주광염으로 장식하였고, 주색 바탕에 백색 선으로 윤곽을 잡아 화려하게 구사하였으나, 부분적으로 백색선은 후대 보수시 가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협시를 비롯 권속들의 육신은 백색 혹은 분홍색을 바르고, 육신선은 가는 먹선으로 잡았다. 보살의 법의와 협시 및 권속들의 착의에는 소형 문양을 흩뜨려 장식하였다. 전반적으로 녹색 두광과 착의, 주색 착의 등의 안료는 비교적 두텁게 발라져, 부분적으로 안료의 박락이 눈에 띈다. 경주 불국사 삼장보살도는 화승 밀기가 수화승을 맡아 불화로서 전반에 걸쳐 바탕천 훼손 및 안료 박락이 거의 보이지 않아 보존상태가 양호 할 뿐 아니라, 세련된 필치로 표현해 낸 원만상의 존상 형태 및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 밝고 화사하면서도 안정된 분위기의 색채 선택 등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또한 적당한 신체 비례와 한 화폭에 천장․지지․지장 삼회를 나타내면서도 화면구성이 유기적이고 각 회상별 도상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18세기 조성의 삼장보살도와의 연관성을 잘 보여주는 것과 함께, 화면 구성상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또한 경북지역 화승들 간의 영향관계를 파악하는데도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불국사 삼장보살도는 조선시대 삼장보살도 중 시기적으로 비교적 앞설 뿐 아니라, 독특한 화면 구성 및 경북지역 화승들간의 교류관계를 파악하는데 자료적 가치가 인정됨에 따라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하여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된다. 국새는 국왕이 국가를 통치하는 데에 사용했던 인장을 말한다. 왕위의 선양이나 외교 실무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문서에 날인하였던 것으로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국왕이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을 때 임명장인 고명(誥命)과 함께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을 수여받아 이를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고, 즉위식에서 후계왕에게 승계하였다. 또한 책봉 등의 업무를 위한 <국왕행보(國王行寶) , 왕의 명령서인 유서(諭書)에 날인하기 위한 <유서지보(諭書之寶) 등의 국새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자주국으로서 <황제지보(皇帝之寶) 등 국새를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국새는 황제국으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보뉴(寶鈕)를 용뉴(龍鈕)로 제작하였다. 조선왕조(1392-1897)와 대한제국(1897-1910) 시기 국가에서 제작한 공인(公印)은 각종 국가의례에서 사용한 어보(御寶), 실제 어명을 내리는 데 사용한 인장인 국새(國璽), 각종 관청에서 발급한 행정용 인장인 관인(官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의례용 어보는 왕비ㆍ왕세자ㆍ왕세자빈 등을 해당 지위에 임명하고, 왕의 공덕을 찬양하거나 그 통치를 종합ㆍ재평가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책봉호(冊封號)ㆍ시호(諡號)ㆍ존호(尊號)ㆍ묘호(廟號)와 같은 존귀한 이름을 새겼는데, 이러한 어보는 사후 종묘 신실(神室)에 신위(神位)와 함께 모셨다. 이 중에서 국가의례에 사용했던 어보와 왕실과 국가의 업무에 사용했던 국새가 가장 대표적인 인장이다. 이들 인장은 왕권과 국가적 존엄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제작에서 관리까지 엄격한 법식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한일 강제병합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어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국외로 불법 반출되는 와중에 이들 인장의 일부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국새는 국가최고통치자의 인장인 동시에 국가의 상징이다. 국새라는 용어는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고, 현재까지 동일한 개념으로 쓰인다. 한반도에서 국새를 사용한 기록은 고구려로부터 보이고, 삼국시대에는 국새를 대보(大寶)ㆍ국새(國璽) 등으로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국새(國璽)ㆍ국인(國印)ㆍ어보(御寶)ㆍ새보(璽寶) 등 다양한 용례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새(璽)와 보(寶)를 왕실 인장의 대명사로 사용하였으나 국새(國璽)와 대보(大寶)만은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의미로 한정하였다. 조선시대의 국새는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주로 외교문서에 사용하였다. 또한 왕위 계승 시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하였으며, 국왕의 각종 행차 시에는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행렬의 앞에서 봉송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명ㆍ청나라로부터 각각 3차례 국새를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사여한 국새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명나라에서 사여한 옛 국새의 자취를 찾아 별도로 모조하여 비장해 두고 왕위 계승 때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조선시대에 명나라로부터 사여받은 국새를 숙종이 모조하여 비장해 두었을 때, 해당 국새를 보관했던 구체적인 장소는 어디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조선시대 숙종이 명나라에서 받은 국새를 모조하여 비장해 두었다고 언급된 사실을 바탕으로, 그 국새가 보관된 구체적인 장소를 묻고 있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숙종이 명나라에서 사여한 옛 국새의 자취를 찾아 별도로 모조하여 비장해 두었다는 사실을 추출한다.

    • 숙종 때 명나라에서 사여한 옛 국새의 자취를 찾아 별도로 모조하여 비장해 두고 왕위 계승 때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숙종이 국새를 모조하여 비장했다는 근거는 있으나, '어디에' 비장했는지에 대한 장소 정보는 누락되어 있다.

    • 숙종 때 명나라에서 사여한 옛 국새의 자취를 찾아 별도로 모조하여 비장해 두고 왕위 계승 때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 전체를 검토해도 국새의 용도, 종류, 역사적 흐름은 설명되어 있으나, 숙종이 모조한 국새의 구체적인 보관 장소(예: 특정 궁궐이나 창고 명칭)에 대한 정보는 결합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보관 장소'는 문맥에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답을 확정할 수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는 최종 답변을 생성한다.

근거 (evidence)
  • 숙종 때 명나라에서 사여한 옛 국새의 자취를 찾아 별도로 모조하여 비장해 두고 왕위 계승 때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숙종이 명나라의 국새를 모조하여 비장해 두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으나, 이를 보관한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정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문맥 외부의 추가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추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