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산출물 · 도서자료 기계독해

문화재사랑 통권 제143호2016년 10월

uuid
594c0465-b248-5e2b-bc6d-57e24d36f8d4
content_id
PCY_201707270141351781
doc_id
PCY_201707270141351781_1
발행기관
문화재청
발행연도
2016
KDC
0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고조선의 실체는 비파형동검과 함께 청동거울의 존재로도 증명된다. 한반도와 요령성 일대의 청동거울은 그 뒷면에 새겨진 문양에 따라 번개무늬 거울, 거친무늬 거울, 잔무늬 거울 등으로 나뉜다. 동검과 청동거울은 요서지역에서 발생한 이후 점진적으로 요동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으로 퍼졌다. 칼과 거울은 지금도 시베리아의 샤먼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의례도구이다. 고대에도 단순한 무기의 의미를 넘어 권력과 신력을 상징하던 도구였다. 동검과 청동거울의 전통이 요서지역에서 출발해 한반도는 물론 일본 구주지역에까지 확산되는 모습은 바로 기원전 1천년대에 동북아시아가 동검을 매개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들 모두가 고조선의 영역은 아니며 고조선, 삼한, 왜의 소국 등이 지역과 시간차이를 두고 수장의 무덤에 청동거울과 동검을 묻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비파형동검을 고조선과 처음 연결한 것은 1960년대의 북한 학계였다. 이후 1970~80년대를 거쳐 비파형동검·석관묘·미송리형 토기라는 소위 ‘고조선의 3대 요소’가 요동~서북한 일대(기원 전 9~6세기)에 나타났으며 이는 고조선의 근거가 됐다. 또한,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역사기록에 본격적으로 고조선이 등장하는 거의 최초의 문헌인 『관자』는 후대에 많이 고쳐 쓰이긴 했지만, 이 책을 저술한 관중(管仲)이 기원전 7세기경 인물이기 때문에 비파형동검의 출토 시기와 부합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비파형동검은 발해만 유역~한반도 일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그리고 내몽골 동남부는 물론 흑룡강성 남부지역에서 일부 발견됐으며, 산둥반도와 하북성 일대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한반도에서도 역시 약 60여 건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바 있다. 비파형동검은 요서지방 발해만 일대에서 기원전 9세기대에 나타났으며 내몽골 동남부의 하가점 상층문화(내몽골 적봉시(赤峯市) 하가점(夏家店)의 상층 유적)와 요동지역 일대로 퍼졌다. 물론 비파형동검 문화가 고조선과 가장 유사한 실체이긴 하지만 무조건 ‘비파형동검=고조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고학에서 국가를 인정하는 기준은 수도, 왕릉, 그리고 무덤에 현격한 신분 차이 등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이러한 징후가 뚜렷하지 않다. 분명한 점은 요동~서북한의 비파형동검 문화~세형동검 문화는 황하 유역의 북중국 청동기 문화나 유목민족의 오르도스식 청동기 문화와는 구별되는, 한반도를 포괄한 청동기 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단순하게 고조선이 언제부터인가라는 논쟁을 현재로서는 해결하기 어렵지만, 어떠한 물질문화적 배경에서 성립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고고학의 역할이다. 비파형동검은 청동 무기의 본격적인 등장을 뜻하므로 다양한 방어 도구와 함께 발견된다. 특히 요서지역에서는 청동투구가 발견되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고조선의 서쪽에 위치한 하가점 상층문화(기원전 10~7세기)에서 사용되었다. 고조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지역에서 투구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목제 투구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비파형동검을 묻은 무덤의 시신 가슴 근처에서는 원형의 청동판도 종종 발견되는데, 갑옷과 같이 몸통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요령성 심양시의 정가와자 6512호 묘에서는 청동거울과 다수의 동검이 출토돼서 고조선 귀족의 무덤 또는 왕족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유적은 대체로 기원전 6~5세기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8~7세기대에 요서지역에서 유행했던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유형의 비파형동검 문화가 요동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가 요령 지역으로 진출할 때 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서북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당시 다뉴세문경과 초기 세형동검의 조합이 남한 금강유역에 등장하면서 이는 고조선 유민이 마한의 초기 중심 세력이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요령~서북한 지역에 자리를 잡은 후, 동검과 청동거울은 남한의 청동기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파형동검 문화는 고조선을 중심으로 기원전 1천년대 동아시아 동검 문화의 형성과 전래를 증명한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에 한나라 조정의 사관이었던 사마천은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다. 『사기』의 <조선열전>에 자세히 전쟁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을 조사하던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평양 일대를 조사하면서 의도적으로 고조선의 유적과 역사를 찾아보지 않은 채 낙랑에만 연구를 집중했다. 낙랑군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것이라는 역사적 상식을 도외시한 채, 그저 낙랑군만 서술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중국과 일본학계에서 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는 지난 100여 년간 사실상 없다. 그 결과 한나라가 만든 식민지(낙랑군)는 연구가 활발하지만, 정작 한나라가 무너뜨린 나라(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다행히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비파형동검 문화의 전개와 이후 철기 시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고조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위략(魏略)』에는 소왕(昭王, 기원전 311~279) 대인 기원전 4세기 경에 연나라와 각축을 벌이던 고조선이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공격을 받아 서쪽 2천여 리의 땅을 잃고 그 중심지를 동쪽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기원전 320년을 전후하여 연을 비롯한 중국은 고조선을 스스로 왕을 칭한 강력한 국가로 보았다. 진개는 기원전 300년경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기원전 280년경에는 고조선을 침략해서 만번한(滿潘汗: 고조선시대 중국의 연과 경계가 된 지역의 명칭)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로 연나라의 수도인 연하도에서 진개의 활동과 관련된 자료가 발굴되었다. 바로 연하도 유적의 신장두(辛庄頭)30호 묘이다. 이 무덤에서는 한국식 꺽창과 중앙아시아와 흉노계통의 금장식도 출토되었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와 고조선에서 전쟁을 했다는 기록과 부합된다. 한편, 고조선은 중원과 무역을 하며 그 부를 쌓았다. 앞서 등장한 『관자』에는 호랑이 같은 맹금류의 얼룩무늬 가죽이 고조선의 특산품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하면 고조선이 본격적인 모피 무역을 한 것은 기원전 4세기대로, 이때 서북한 일대에 대량으로 발견되는 명도전(연나라 화폐)과 관련이 있다. 고창 고인돌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와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에 있다. 죽림리를 중심으로 산줄기 남쪽 사면에 등고선을 따라 447기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며 분포하고 있다. 고창 고인돌의 특징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조밀한 분포 지역에서 탁자식과 바둑판식, 개석식(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을 덮은 형식)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한곳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창 고인돌의 대부분은 받침돌이 고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덮개돌이 입체화·거석화된 고인돌이 단독 또는 열 지어 있는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바둑판식 고인돌의 기둥모양 받침돌은 덮개돌의 웅장하고 인위적인 느낌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고창 고인돌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도산리 고인돌은 처마가 넓고 덮개돌이 얇은 탁자식으로 남한 지역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고인돌 중 하나이다. 고창 고인돌에서는 석검 등 부장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2008년 9월 개관한 ‘고창 고인돌박물관’은 고인돌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인돌박물관이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고조선 초기의 수도는 정확히 어디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고조선 초기의 정확한 수도 위치를 묻고 있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고조선의 수도 및 위치와 관련된 정보를 추출한다.

    • 하지만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가 요령 지역으로 진출할 때 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서북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수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는 문장을 선택한다. 해당 문장은 수도가 밝혀지지 않았음을 명시하고 있다.

    • 하지만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은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후기 고조선의 중심지가 서북한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만 제공할 뿐 초기 수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 하지만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가 요령 지역으로 진출할 때 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서북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문맥 내에서 고조선 초기의 수도에 대한 정보는 '밝혀진 바 없다'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질문에 답할 수 없다.

    • 하지만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음을 최종 답변으로 결정한다.

근거 (evidence)
  • 하지만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가 요령 지역으로 진출할 때 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서북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은 고조선 초기의 수도가 어디인지 밝혀진 바가 없다고 직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질문이 요구하는 초기 수도의 위치 정보는 문맥에 존재하지 않으며, 후기 중심지의 이동에 관한 정보만으로는 초기 수도를 추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