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천연기념물지킴이 사업에는 멸종 위기에 처한 천연기념물 보호를 위한 종 보존연구, 치료, 먹이 주기, 개체 수 증대 및 방류 등과 같은 직접적인 보호 활동이 있으며, 천연기념물의 이해를 돕고 천연기념물의 가치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자연생태교육·체험, 대학생지킴이단 운영과 같은 장기적인 홍보 활동도 함께 펼치고 있다. 에쓰-오일은 지난 9년간 4종의 보호종을 선정하여 총 17억 원을 후원하였으며, 약 3천여 명의 저소득가정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천연기념물 생태 교육을 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280명의 대학생천연기념물지킴이단을 운영하였으며, 임직원 가족 3,500여 명이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우리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는 자연환경을 오롯이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러한 책무에 동참하는 방법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천연기념물을 보호하는 에쓰-오일의 사회공헌 활동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을 기대해본다.
조선시대 여자의 옷이 저고리와 치마가 중시되는 문화였다면, 남자의 옷은 저고리와 바지가 아닌 그 위에 덧입는 큰 옷, 즉 포(袍)가 중시되는 문화였다. 요즘은 포에 속하는 일상 옷으로 두루마기만 남아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많았다. 관직자들이 입는 단령(團領), 그 안에 받침옷으로 입거나 따로 겉옷으로 입었던 직령(直 領), 답호, 철릭, 창의, 도포, 중치막, 액주름, 소창의 등이 있다. 물론 이들 옷의 형태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대표적인 것이 철릭이다. 철릭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옷인데, 쉽게 얘기하자면 저고리 아래에 주름을 많이 잡은 치마를 붙여놓은 형태이다. 상의는 몸에 맞게 만들고, 치마부분은 옷감을 여러 폭 붙여서 아래 도련(저고리나 두루마기 자락의 가장자리)을 넓게 한다. 그런데 이 상의와 치마의 길이 비율은 조선전기에 상하 1:1이던 것이 후기로 가면서 점차 1:3 정도가 된다. 전체길이는 크게 변함이 없는데 상의가 짧아지고 치마가 길어진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 사대부들이 외출복으로 가장 흔하게 입었던 도포와 중치막의 옆선 모양은 여자 옷인 원삼이나 당의 옆선의 변화와 흐름을 같이 하여, 후기로 갈수록 날렵한 라인이 되면서 중간이 살짝 휘어지는 곡선을 만들어낸다.
관모 속도 사대부들의 멋을 내는 것에 예외는 없다. 상투관을 착용해 상투가 드러나지 않도록 했으며, 차림을 갖출 때는 상투관 위에 관모를 덧썼다. 상투관은 가죽이나 뿔, 종이 등으로 만들었으며 일반 서민층은 천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갓이 바람에 날려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망건에 달았던 풍잠까지도 섬세하게 신경 썼다. 대모, 마노, 호박, 백옥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매력을 뽐내는 풍잠은 ‘닷새를 굶어도 풍잠 멋으로 굶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남자들의 체면을 상징하는 장식품이었다. 또한, 갓의 정수리에 정자 장식으로 올리기 위해 새 모양으로 깎은 옥로와 마노, 수정, 호박, 산호, 밀화 등을 엮어서 턱밑에 길게 드리운 갓끈(貝纓)은 남자 장신구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조선후기 풍속화를 보다 보면 자꾸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하나 있다. 물론 우리가 흔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장신구라고 하면 먼저 떠올리게 되는 위에 열거한 물품들이 아니다. 바로, 주머니다. 신윤복이 그린 <휴기답풍(携妓踏楓)>을 보자. 바람이 꽤 부는 날인 듯싶다. 기녀를 데리고 단풍놀이를 가는 젊은 사대부는 바람에 갓이 날아가지 않도록 잡고 있고, 기다란 갓끈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멀리 휘날린다. 겉에 입은 중치막의 옷자락도 바람에 흩날린다.
신의 어원은 『양서(梁書)』와 『남사(南史)』 〈제이전(諸夷傳)〉 신라조 에 화(靴)를 ‘선(洗)’이라 한 기록을 근거로 ‘선→신’의 표음(表音)변 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은 형태와 재료,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며,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상고시대(上古時代) 우리나라 신은 남방 농경문화권의 신목이 짧은 형태의 리(履)와 북방 유목문화권의 신목이 긴 화(靴)의 형태로 나뉜다. 조선시대에도 화(靴)와 신울이 낮은 혜(鞋)·리(履)를 착용했으며 왕과 왕비의 신은 석(舃)이라 불렀다. 제작 재료에 따라서는 초(草), 마(麻), 삼(森) 등의 식물성 재료로 만드는 짚신과 미투리가 있으며 놋쇠로 만드는 유혜, 나무로 만드는 목극, 종이로 만드는 지혜, 비단으로 만드는 운혜·당혜, 가죽으로 만드는 흑피혜·태사혜·녹피혜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용도에 따라서는 마른신, 진신 등으로 분류된다. 마른 땅에서만 신는 마른신으로는 남자용의 태사혜, 외코신, 뒷발막 등과 여자용의 당혜, 백혜, 운혜, 외코신 등이 있다. 우천 시와 진땅에 신는 진신은 나막신이 대표적이며 놋쇠로 만든 놋갓신과 기름에 담가 만든 유혜 등이 있다. 한편, 사용자의 연령에 따라 색상과 배색에 차이를 두기도 한다.
화혜장은 가죽과 비단 또는 천을 재료로 신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이들은 삼국시대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는 제도적으로 각 관아에 소속되어, 관역에 종사하면서 기술을 대대로 이어왔다. 『경국대전』 공전(工典)조에 보면 왕실용 신을 제작하는 장인인 삽혜장(靸鞋匠)은 본조(本曺)에 6명, 상의원(尙衣院)에 8명이 있었으며, 화장(靴匠)은 본조에 6명, 상의원에 10명이 있었다. 신을 만들던 장인들은 화장이란 이름으로 상의원을 비롯한 중앙관청에 소속되었다가, 왕실의 의례를 치를 때 설치하는 ‘도감’에 동원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근래에는 1971년 황한갑 옹이 국가로부터 화장(靴匠)부문 기능 보유자로 최초로 인정받았다. 같은 해에 아들 황등용 씨가 최초의 전수 장학생으로 선정되었고, 손자 황해봉 씨도 1980년 전수 장학생이 되었다. 황해봉 씨는 할아버지에게 기술을 함께 배우던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홀로 화장 일을 전수 받게 되었고, 200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황해봉 보유자는 조부 황한갑, 고조부인 황종수, 증조부인 황의섭, 증백조 부인 황인섭의 전승계보를 잇고 있다.
하나의 신을 제작하는 데는 평균 40여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정교하다 못해 예술의 경지라 할만하다. 여자용 운혜(雲鞋)의 경우를 들어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 장인의 손길이 수십 번은 지나야만 한 켤레의 신이 완성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베와 광목으로 신울의 안쪽에 대는 백비를 마름질하고 신울 겉감은 공단으로 잘라둔다. 마름질한 백비와 공단을 함께 붙 이고 공단의 시접을 정리한다. 명주로 신울의 위 가장자리와 아래 가장자리인 변감을 마름질한다. 만들어 놓은 신울에 변감을 붙이고 윗변과 아랫변에 고운 박음질을 한다. 신울의 안쪽에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덧천도 대고, 내피를 재단한 후 붙인다. 이제, 신의 입구인 도리를 꿰매기 위해 면사를 만드는데 4올을 한 방향으로 꽈서 만들며 여기에 밀랍을 여러 번 칠해 초를 먹인다. 이어 면사와 저모(돼지털)를 연결하는데 이때 저모는 바늘의 기능을 한다. 신울 2장의 겉과 겉을 맞대 놓고 앞코와 뒤꿈치를 꿰맨다. 그다음으로는 소가죽에 밑창 본을 대고 그려 칼로 잘라낸다. 그리고 신의 굽이 되는 돋우개도 잘라낸 후, 밑창에 붙이고 방망이로 두들겨 접착시킨다. 중창(밑창과 안창사이에 있는 깔개창)으로는 백비를 사용한다. 만들어 놓은 밑창에 중창을 붙이고 무거운 칼판 밑에 깔아 고정한다.
전체적인 틀이 어느 정도 완성됐다면 코실을 만든다. 코실은 앞 코에 장식적 효과를 주는 것으로, 면실 한 올을 꼬아 두 올을 매듭지어 사용한다. 도리와 근피(발꿈치와 맞닿는 부분)를 꾸밀 재료도 준비한다. 도리와 근피의 재료는 흰색 가죽을 사용한다. 뒷마구리 쪽에 근피를 대고, 윗변 쪽에 도리감을 대어 함께 맞바느질로 박는다. 이제 바닥을 만들 차례다. 신창을 만들어 작업판 밑에 깔아 두었던 밑창을 꺼내 중창을 다듬어 내고 정리한다. 대다리는 신발창에 갑피를 대고 꿰매는 가죽 테를 말한다. 창 뚫는 판에 밑창 을 올려놓고 송곳으로 밑창의 구멍을 뚫는다. 창은 가장 튼튼해야 하므로 여섯 올의 면실을 사용하는데, 여기에 밀랍을 바르고 바늘은 일반 쇠바늘을 사용한다. 꿰맨 밑창을 방망이질로 두드려 매듭부분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한다. 안창은 발바닥이 닿는 신의 안쪽 바닥으로 흰색 소가죽으로 만든다. 굼벵이와 죽엽은 운혜의 장식눈으로 더하고 마구리를 만든다. 만들어 놓은 마구리 중 앞마구리만 신코에 붙인다. 최종 신의 형태를 잡아주기 위해 바느질 과정을 마친 신에 신골을 박는다. 신골과 쐐기를 박아 놓은 신은 숯불에 건조시킨다. 건조가 끝난 후 굼벵이와 죽엽을 각각 뒷마구리와 앞마구리에 붙이는 작업을 ‘눈 새기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조선시대 철릭의 상의와 치마의 길이 비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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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조선시대 철릭의 상의와 치마 길이 비율이 시대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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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철릭의 형태와 시대별 비율에 관한 정보를 문맥에서 추출한다.
- 철릭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옷인데
- 이 상의와 치마의 길이 비율은 조선전기에 상하 1:1이던 것이 후기로 가면서 점차 1:3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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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조선전기와 조선후기의 비율 차이를 명시한 문장을 근거로 선택한다.
- 조선전기에 상하 1:1이던 것이 후기로 가면서 점차 1:3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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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조선전기에는 상의와 치마의 비율이 1:1이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상의는 짧아지고 치마는 길어져 1:3의 비율로 변화했음을 결합한다.
- 전체길이는 크게 변함이 없는데 상의가 짧아지고 치마가 길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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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조선전기 1:1에서 조선후기 1:3으로 비율이 변화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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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시대적 변화를 포함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철릭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옷인데
- 이 상의와 치마의 길이 비율은 조선전기에 상하 1:1이던 것이 후기로 가면서 점차 1:3 정도가 된다.
- 조선전기에 상하 1:1이던 것이 후기로 가면서 점차 1:3 정도가 된다.
- 전체길이는 크게 변함이 없는데 상의가 짧아지고 치마가 길어진 것이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조선전기에는 상의와 치마의 길이 비율이 1:1이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상의가 짧아지고 치마가 길어져 점차 1:3 정도의 비율로 변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