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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나라사랑 제8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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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9997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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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9997531_2
발행기관
국가보훈처
발행연도
2015
KDC
19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맥아더 원수는 서울함락 직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나서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에서, “현재의 한국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미 지상군의 투입뿐”이라며 강력히 건의했다. 맥아더는 비행이 어려운 악천후와 북한 공군의 위협 속에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여 전황을 브리핑받고, 서울의 북한군 동향과 국군의 한강방어 상태를 시찰한 후, 워싱턴에 보낼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것은 바로 “코브라처럼 공격해 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의 지원이 긴급하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해공군의 지원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미 지상군이 파견돼야 한다고 했다. 맥아더는 또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하여 당시의 전세를 만회할 방책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맥아더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서울에서 끊고, 북한군으로 하여금 낙동강과 서울 등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전력을 분산시켰고, 이를 통해 총반격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를 바꾸게 했다. 남침 직후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는 전쟁 이전 상태의 유지(38선 회복)였으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반도통일로 확대했다. 이는 곧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와 북진작전으로 연결됐다. 6·25전쟁 때 미국은 가장 먼저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파병한 유일한 국가다. 6·25전쟁은 미군의 지원규모와 역할을 고려할 때, 미국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미국의 역할이 컸고 지대했음을 뜻한다. 미국은 항공모함 16척과 항공기 1,536대를 비롯해 1개 야전군, 3개 군단, 9개 전투사단을 파견했다. 유엔회원국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했다고는 하나, 미군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약과다. 유엔의 해·공군 전력 중 미군이 약 90% 이상을 차지했고, 지상군 전력도 50%를 상회했다. 특히 유엔작전을 총괄하는 유엔군사령부의 지휘부와 참모진은 모두 미군 장성과 고급장교들로 채워졌다. 작전도 워싱턴의 합참으로부터 전략지시를 받아 미군 수뇌부에서 이뤄졌다. 거기다가 유엔군에 대한 군수품 지원도 전적으로 미국이 담당했다. 이른바 한국전선에 소요되는 무기와 장비의 대부분을 미국이 지원한 군수물자로 채워졌다. 미국은 한국정부와 국민들 생필품에 대한 지원까지 맡았다.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도 없었고, 한국은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미국에 대해, “대한민국이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바로 미국”이라고 했다. 특히 무초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만나 한국군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극동군사령부와 국무부에 보내 지원받게 했다. 대한민국 공군이 전쟁발발 약 1주일 만에 F-51전투기 10대를 제공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신속히 극동군사령부에 요청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국군이 1950년 7월, 한 달간의 지연작전 때 사용했던 탄약과 무기도 모두 남침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무초 대사가 극동군사령부와 국무부에 건의해서 이뤄졌다. 만약 무초가 이들 무기와 탄약을 신속히 요청하지 않았다면, 미군이 참전했다 하더라도 무기와 탄약이 부족했던 국군과는 협조 된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초 대사의 전쟁 초기 역할은 대한민국을 살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당시 무초의 요청으로 지원받은 주요 무기로는 105밀리와 155밀리 그리고 대전차포를 비롯하여 105밀리 포탄 10만5천 발, 81밀리 박격포탄 26만5천 발, 60밀리 박격포탄 8만9천 발, 소총탄 248만 발이었다. 여기에 F-51 전투기 10대도 있었다. 미군들은 전혀 알지도 못한 나라, 한 번도 와보지도 않은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나라에 와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했다. 그들은 40도를 웃도는 폭염의 낙동강전선에서, 피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추운 영하 30도의 장진호전투에서, 신체 조건에 맞지 않은 잡목이 우거진 야트막한 야산의 덤불숲 속에서, 인분(人糞)이 널려 있는 논과 밭에서, 칼날같이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모기와 파리 떼가 우글거리는 산야와 하천가에서, 전우를 살리기 위해 한쪽 팔다리를 잃은 채 혼자 남아 몰려오는 중공군을 상대하며 외롭게 싸우다 그들은 산화했다. 그렇게 해서 미군의 6·25전쟁 영웅들이 탄생했다. 여기에는 군사령관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결 같은 마음으로 싸웠다. 그들은 계급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한민국과 그들의 전우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미국적 이념’을 위해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목숨 바쳐 싸웠다. 1953년 7월 휴전조인을 앞둔 상황에서 중공군은 이른바 ‘7·13공세’라고 불리는 대규모 공세를 펼쳐 왔다. 강원도 김화군 원동면에 위치한 교암산의 금성돌출부를 차지하기 위한 중공군 최후 공세도 그중 하나였다. 7월 13일 21시 적은 교암산 전초에 공격을 가했다. 자정 무렵 전초를 우회한 적은 교암산의 주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김 대위를 비롯한 중대원은 수류탄전에 이어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중앙이 돌파되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김 대위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포병의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한편 중대원에게 동굴로 대피할 것을 명령했다. 즉각적인 아군 전 포병의 진내사격이 제6중대 진지인 ‘가’고지를 강습했고, 포격에 의해 유·무선이 두절된 가운데 제6중대가 포진한 능선에서는 전사상 유례가 드문 백병전이 전개됐다. 이때 김 대위는 모든 중대원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한 치도 물러나지 말고 적을 무찌르도록 격려하며 진두지휘했다. 몰려오는 적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며 총검을 휘두르며 진지를 사수하던 김 대위는 적진으로부터 날아든 총탄에 전사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어른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동네에는 부녀자들과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피난을 가지 못한 청소년들이 마을의 치안유지를 위해 소년단을 조직했다. 이 조직이 ‘강화청소년 유격대’이다. 마을마다 소년단 사무실을 만들고 면 단위에서 강화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조직이 시 확대되었다. 이때에 지급된 장비가 나무로 깎아 만든 목총(木銃)이었다. 우리는 목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순찰을 돌고 경비를 하며 치안유지에 나섰다. 그렇게 목총을 들고 소년단 활동을 한 것은 아득한 옛날도 아닌 65년 전의 이야기이다.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모양만 장총(長銃)이지 실탄을 쏠 수 없는 거짓 총이고 멜빵도 탄창도 없는 나무작대기에 지나지 않았던 총 아닌 청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국군은 M1소총. 인민군은 속칭 ‘따발총’이 주 무기였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도 가능했던 당시였다. 당시 우리 마을의 소년대장은 나이도 많고 군사훈련을 받는 경험이 있어 목총을 들고 훈련을 열심히 시켰다. 행군도 하고 각개전투 훈련까지 시키면서 군인정신을 주입시켰다. 뒷산에 아군과 적군의 진지를 만들어 놓고 서로 공격하여 적의 요새를 탈환하는 작전의 전투훈련도 했다. 일종의 놀이 형식이지만 전시 상황을 재연시킨 정신교육이었던 셈이다. 밤이면 노인들과 부녀자들만 있는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야경(夜警)을 돌았다. 야경을 돌 때는 큰 북을 ‘둥둥’ 치면서 마을 한 바퀴씩 돌곤 했다. 나는 경비대장 직함을 가지고 있어서 불침번 당번조직을 해야 했다. 내 임무를 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옛날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후 소년단 활동은 강화에 들어온 인민군 소탕 작전에도 참여하여 혁혁한 공적을 세우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같은 공적이 인정되어 자랑스럽게도 ‘참전유공자’‘국가유공자’로 예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굳건한 국가 안보가 없다면 개인의 영광도, 가정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며 호국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온 국민이 안보의식을 굳건히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설명하시오.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인과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남침 직후의 전쟁목표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의 전쟁목표를 각각 추출한다.

    • 남침 직후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는 전쟁 이전 상태의 유지(38선 회복)였으나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반도통일로 확대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전쟁목표의 변화를 보여주는 핵심 문구를 선택한다.

    • 남침 직후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는 전쟁 이전 상태의 유지(38선 회복)였으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반도통일로 확대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기존의 목표(38선 회복)를 새로운 목표(한반도 통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전쟁목표가 38선 회복에서 한반도 통일로 확대되었으며, 이것이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작전으로 이어졌음을 정리한다.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반도통일로 확대했다.
    • 이는 곧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와 북진작전으로 연결됐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남침 직후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는 전쟁 이전 상태의 유지(38선 회복)였으나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반도통일로 확대했다.
  • 남침 직후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는 전쟁 이전 상태의 유지(38선 회복)였으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반도통일로 확대했다.
  • 이는 곧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와 북진작전으로 연결됐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남침 직후 미국과 유엔의 전쟁목표는 전쟁 이전 상태의 유지인 38선 회복이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한반도 통일로 전쟁목표가 확대되었다. 이는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 및 북진작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