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본래 북한 정권에게 절체절명의 위기는 1989년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닥쳤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시작된 변화의 물결이 1989년 6월 폴란드 선거에서 솔리대리티 자유노조의 승리와 공산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 후 반년 사이에 유럽 공산정권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1989년 11월 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2월 25일에는 김일성 독재를 가장 열심히 모방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대통령 부부가 도주하던 중 성난 군중에 의해 처형되었다. 종주국인 소비에트 연방도 결국 1991년 12월 말 해체되고 옐친의 러시아 공화국으로 재탄생하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소련 공산당의 70년 역사가 실패로 막을 내린 것이다. 전략무기 생산에서 미국을 능가하였지만, 소련은 경제력이 소진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자’는 공산주의 이상은 평등 이념을 인류사회에 확산시키기는 하였으나, 인간의 이기적 본능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 위기상황에서 북한 정권이 취해야할 대응방안은 중국식 개혁‧개방이어야 했으나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정권의 안전이 최우선 목표였다.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것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외부정보의 유입 때문 이라고 진단하였다. 외부정보가 유입되면 장맛비에 흙담이 무너지듯 북한의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보고, 철저하게 외부정보를 차단시켰다. 동시에 폭압통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1974년 김정일의 권력승계 공식화에 맞추어 채택한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 원칙’에 따라 백두혈통 김일성 일가의 절대적 지위를 훼손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북한 사회에서는 헌법 위에 노동당 강령이 있고, 그 위에 10대 원칙이 있다. 모든 주민은 10대 원칙을 암송 해야 하고, 김일성 일가를 비판한다거나 불경스럽게 보이면 가차 없이 처단된다. 심지어 김일성 부자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깔고 앉아도 불경죄로 처벌된다. 그러한 폭압통치를 유지하는 핵심장치가 강제수용소이고 이에 20만 명에 가까운 주민을 구금하고 있다. 영장 없이도 주민들을 체포‧구금하여 강제노역을 시키고, 고문과 처형을 마구 집행한다.
김정은 정권은 미사일 발사실험을 강행하고 2013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을 강행하였다. 헌법상에 핵‧경제 병진정책을 선언하고 강경노선을 펴고 있다. 때로는 스키장이나 유원지시설 건설로 주민들의 환심을 사려는 튀는 행동을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을 종합해보면 두 번째 엄중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첫 번째 위기 시에는 정권유지를 위해 대내적으로 정보 차단과 폭압 정치를 강화 하는 한편, 대외 협상을 위해 핵‧미사일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 1993년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이후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면서 미국과의 협상에서 소위 벼랑 끝 외교를 끈질기게 구사하였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핵 협상을 지속하여 1994년 10월 21일 갈루치-강석주 간에 핵합의를 타결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북한의 과거 핵을 철저하게 규명하고 미래 핵을 포기시켜야 한다는 입장인데 비하여, 중간 선거를 의식하는 클린턴 정부는 북한의 과거 핵은 적당히 덮어두고 미래 핵 포기 약속 만을 받아내려 했다. 그 대가로 200만Kw의 경수로 건설과 50만 톤의 중유 등을 공급하기로 하였다. 결국 그 합의도 북한이 농축우라늄 개발을 시인함으로써 깨져 버렸다.
2013년 12월 12일 북한 정권의 제2인자 장성택과 그 측근에 대한 전격적 숙청이 일어났다. 2015년 4월 30일에는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을 숙청하였다. 김정은의 집권 이후 3년 동안 70여 명의 고위간부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에게 신속히 홍보하고 있다. 딴 맘 먹고 삼대 세습의 절대 권력에 저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다. 과거에도 북한에서는 1952년 6 ‧ 25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 세력을 숙청하였고, 그 후 갑산파, 소련파, 연안파를 숙청하고, 1970년대에는 김정일 세습 비판파에 대한 숙청을 하였다. 이들 숙청이 상당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데 비하면, 김정은 정권의 숙청 작업은 매우 급하다는 점에서 다르다. 김정은이 절대 권력을 장악한 근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권이 불안하기 때문에 상상 이상의 과잉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사태의 핵심은 북한 정권이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북한이 첫 번째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 정부의 대응은 성공적이었나? 실패라고 보는 편이 옳다. 노태우 정부는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를 기반으로 북방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의 물결을 제대로 포착하고 88 올림픽을 계기로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확대하였다. 1989년 1월 29일 맨 처음 헝가리와 수교를 하고, 이어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과 수교 하였다. 종주국 소련과도 1990년 9월 30일 수교하고, 중국과도 1992년 8월 24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한 후, 6월 29일 당시 이범석 외무부장관이 천명한 북방정책을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다시 확인하였다. 북방정책이 결실을 본 것이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 기본합의서 최종 교섭에서 북한 측 연형묵은 김일성의 훈령에 따라 대폭 양보를 하여 합의문을 타결시켰다. 고(故) 황장엽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서울에서 서명을 마친 북한 측 대표단을 열차 대신에 헬리콥터로 평양으로 즉각 귀환토록 하여 목란관에서 대대적인 환영만찬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김일성은 북측 교섭대표들이 조국을 구해냈다고 치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 서명으로 한국의 공세를 일단 묶어놓은 셈이었다. 그러나 남북 간 합의를 지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곧바로 정권의 생존을 위해 핵개발을 비롯한 비상수단을 추구해나갔다. 결과적으로 1991년 남북 간 교섭의 과정이나 결과를 평가하자면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김일성의 대전략에 말려들어 한국 측은 서명한 합의문서가 지켜질 것으로 오판한 셈이다. 북한의 위기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북한 측이 개혁‧개방의 길을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더 강하게 압박했어야 한다. 그러한 대북 정책의 실패 원인은 북한 정보의 수집과 분석 능력이 부족한 데 있었다.
한국 정부의 북방외교의 성공에 비하면 같은 시기 북한이 당면했던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분석이나 대응을 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북한 당국은 내부로의 정보차단 뿐만 아니라 외부로의 정보유출도 철저하게 차단했기 때문에 한국이 파악한 북한 정보는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제약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북한정보 수집‧분석과 정책 능력은 부족했다. 정보기관이 정책결정과정에 과도하게 관여 하는 속성상 통치권자가 원하는 정보에 경도되었을 것이다. 이미 상당기간 김정일이 김일성과 공동정권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일성 부자의 첫 번째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분석하진 못했다. 김일성은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한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쳤다. 1991년 5월 중국의 리펑(李鵬)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끝까지 반대한다면 한국만이라도 가입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자 북한도 결국 정책을 바꾸어 9월 18일 남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북한이 첫 번째 위기 상황에서 정권 유지를 위해 취한 대내적 대응과 대외적 대응은 각각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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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북한이 첫 번째 위기 시기에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수행한 대내적 조치와 대외적 조치를 구분하여 추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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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문맥에서 첫 번째 위기 시기의 북한 대응에 관한 내용을 찾는다.
- 첫 번째 위기 시에는 정권유지를 위해 대내적으로 정보 차단과 폭압 정치를 강화 하는 한편, 대외 협상을 위해 핵‧미사일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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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대내적 대응과 대외적 대응을 명확히 구분하는 문구를 선택한다.
- 대내적으로 정보 차단과 폭압 정치를 강화
- 대외 협상을 위해 핵‧미사일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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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추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대내적 대응과 대외적 대응을 분류하여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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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대내적으로는 정보 차단과 폭압 정치를 강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핵 및 미사일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진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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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적합한 형태로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첫 번째 위기 시에는 정권유지를 위해 대내적으로 정보 차단과 폭압 정치를 강화 하는 한편, 대외 협상을 위해 핵‧미사일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
- 대내적으로 정보 차단과 폭압 정치를 강화
- 대외 협상을 위해 핵‧미사일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진
최종 답변 (final_answer)
대내적으로는 정보 차단과 폭압 정치를 강화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대외 협상을 위해 핵 및 미사일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