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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정책연구 제22권 1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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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통일연구원
발행연도
2013
KDC
34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20세기 60~70년대, 신흥공업국들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던 연대에 중국은 오히려 10년이라는 ‘문화대혁명’시기를 경험하면서 정체 또는 후퇴의 길을 걸었다. 심지어 2.5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등 장기적인 생활고와 비생산적 정치투쟁 속에서 ‘문혁’에 대한 민중의 회의감이 증폭되기 시작했고 결국 이는 1976년 4월 저우언라이 총리 사망을 계기로 발생한 ‘천안문사건’에서 간접적으로 반영되었다. 특히 1975~1976년 2년 내에 중국공산당 최고층 핵심인물들의 연이은 사망과 함께 중국은 한 시기 ‘권력 공백기’에 들어서게 되면서 급진좌파인 ‘4인방’과 온건파간의 대결이 보다 첨예해졌다. 1976년 10월 6일, 예젠잉(葉劍英), 리센넨(李先念), 화궈펑(華國峰) 등은 중앙정치국 명의로 ‘4인방’ 세력에 대한 격리심사를 진행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중국은 ‘문혁’시대를 종결짓고 새로운 역사적 시기로 도약할 수 있는 격동기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마오가 지지해왔던 문혁세력에 대한 숙청은 자칫하면 마오에 대한 배신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에 온건파들은 아래로부터 밀려오는 사회적 압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둘째, 군부를 기반으로 정치국 중심의 당 지도체제가 복구되었다. 당시 중국 지도체제는 대부분 마오와 함께 혁명에 참가했던 군인출신의 정치원로 또는 개훈세력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문혁시기 ‘4인방’ 세력은 “자본주의 복벽”(資本主義復辟)을 막아야한다는 이유로 마오의 지지 하에 집권파(當權派)들에 공격을 가했고 이에 따라 정상적인 당-국가체제의 파괴와 더불어 상당수 정치(군사)원로들이 공격 대상이 되어 정치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따라서 ‘10·6사건’ 이후 문혁세력에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기존의 당·군부 세력은 온건파들에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군부 1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예젠잉은 화궈펑의 영도적 지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덩샤오핑의 복귀를 적극 추천하는 등 국정운영의 제1선에서 물러나 후견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문혁 당시 피해를 입었던 덩샤오핑 등 정치관료들이 정단에 대거 복귀하면서 당-국가체제가 보다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 외, 장기적인 정치투쟁에 피로감을 느낀 기득권 계층의 신지도부에 대한 기대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문혁이라는 공안정국 속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직, 간접적으로 정치적 피해를 입은 공산당 간부 및 친속은 약 1억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화궈펑과 덩샤오핑은 비록 마오 및 문혁에 대한 평가문제에 관해 견해차이가 있었지만, 국민경제 발전에 관해서는 오히려 이견이 없었다. 이에 따라 신지도부는 생산력 발전과 국민생활수준 향상이라는 취지에서 상대적으로 과감한 조치들을 취할 수 있었다. 첫째, 무엇보다 산업고도화를 위한 해외 선진기술 및 장비 유치에 방점을 두었다. 당시 중국 공업부문의 주요 기술장비들은 1950년대 구소련으로부터 들여온 것들로 노후화가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문혁 직후부터 해외 선진기술 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77년 전국계획회의(全國計劃會議) 에서는 추후 8년간 65억 달러 규모의 기술장비를 도입키로 결정했지만, 실지로 1978년 한해에 계약한 장비 도입 항목규모만 해도 78억 달러(약 390억 위안)에 달했다. 국내항목 투자에 필요한 40억 달러를 포함할 경우 중국은 1978년 한 해에만 약 120억 달러 상당의 자본금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1978년 현재 외환 보유액이 15.75억 달러에 불과한 중국으로서는 상응한 규모의 자금을 조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북한의 전후복구 과정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는 막대했으며, 대부분 무상이었다. 1954~1957년 국가예산의 20% 이상을 차지했던 원조는 북한 사회주의적 축적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고, 대부분 설비와 기계류의 형태로 도입되었다. 사회주의권의 원조로 전후 복구과정에서 많은 공장들이 재가동되었고, 신설되었다. 북한은 중공업 우선과 경공업 및 농업의 동시 발전노선에 기초한 전후복구 과정에서 원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사회주의권의 원조가 감소되면서 국가 자금 마련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1956년 당시 북한은 전후 복구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하지만, 완전히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특히, 비료 등을 공급해야 하는 화학공업 생산이 전쟁전 대비 49% 수준으로 제1차 5개년 계획의 중요 과제로 제시되면서 여전히 중공업 부문에 막대한 자금과 기술이 필요하였다. 북한 당국은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 중공업 위주의 중앙공업에 주력투자하고, 지방당국이 분권적 차원에서 경공업 위주의 지방공업을 육성하여 스스로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자금문제를 해결하고자 했 다. 특히, 1956년 사회주의권 원조가 감소한 상황에서 자금, 자재, 연료를 중앙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지방 안에서 스스로 찾아서 생활필수품 생산을 발전시키는 지방공업은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지방공업 활성화는 개인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는 시점인 1958년 6월 전원회의 이후 더욱 구체화되었다. 1958년 10월 지방공업이 활성화되도록 실질적인 자금 및 예산 권한을 지방 당국에 이전했다. 지방 공장들이 급격히 증대되었고, 도 단위의 지방공업에서 군 단위의 지방공업으로 세부화 되어 군 인민위원회 지방산업 관리부가 새로 설립되었다. 지방 인민 위원회들에서 생산 지표를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이 확대되었다. 1958년 실질적인 지방예산제에 따라 1956년 전체 예산의 지방예산 비중 10.3%에서 1960년 35.5%로 증가하였다. 1953년 8월 전후복구 방향을 “중공업의 선차적 발전과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 발전”으로 선정하면서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적 견해였다. 하지만 1945~1960년 북한 경제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은 해방 이후 국가 건설과 함께 전개되었고, 당시 경제적 성과로 인해서 지속적인 경제노선으로 자리하였다. 북한에서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은 식민지 공업화 유산에 의해서 비교우위적 요소부존도의 조건에서 전통적인 사회주의 공업화 강행전략과 다르게 중공업을 우선하면서도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에 사회주의 조기완성에 대한 과욕이 결합되면서 경제운영의 경직성을 가져와 북한 경제의 침체를 가져왔다. 본 연구는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이 오늘날 북한 경제노선으로 지속되는 역사적 원인과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북한이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왜 중공업 중심의 발전전략을 폐기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진다. 중공업의 발전에는 많은 자본과 기술이 요구되기에 북한과 같이 낙후된 후진국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해방 이후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을 북한경제의 운영원칙처럼 지속시키고 있다. 최근 북한 당국은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발표하였다. 농업과 경공업에 역량을 집중한다고 하지만, 거대한 자본과 기술이 요구되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등을 추구함으로써 ‘중공업 우선성장과 경공업·농업의 동시발전전략’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역사적 제도주의의 관점에 의하면 한 사회에서 새로운 제도나 정책이 장기간 지속되려면 최소한 제도의 형성과정에서 역사적 위기를 극복한 성과가 존재해야 한다. 지금까지 지속되는 북한의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은 1945년 해방 직후 경제난이라는 위기를 해소하고 1960년까지 북한의 경제형성기에 높은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당시 성과적으로 형성된 중공업 우선의 경제제도에 의한 경로의존성으로 인해서 중공업 우선 발전노선이 지속되는 측면도 존재한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북한이 해방 이후부터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을 지속해 온 역사적 원인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북한이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을 장기간 유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북한의 경제 전략 지속성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한다.

    • 지금까지 지속되는 북한의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은 1945년 해방 직후 경제난이라는 위기를 해소하고 1960년까지 북한의 경제형성기에 높은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당시 성과적으로 형성된 중공업 우선의 경제제도에 의한 경로의존성으로 인해서 중공업 우선 발전노선이 지속되는 측면도 존재한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전략 지속의 원인으로 제시된 '위기 극복 성과'와 '경로의존성'을 핵심 근거로 선택한다.

    • 1945년 해방 직후 경제난이라는 위기를 해소하고 1960년까지 북한의 경제형성기에 높은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당시 성과적으로 형성된 중공업 우선의 경제제도에 의한 경로의존성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해방 직후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며 거둔 경제 성장 성과와, 형성된 제도가 스스로 지속되는 경로의존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결합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북한의 전략 지속은 위기 극복의 성과와 제도적 경로의존성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도출된 결론을 바탕으로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지금까지 지속되는 북한의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은 1945년 해방 직후 경제난이라는 위기를 해소하고 1960년까지 북한의 경제형성기에 높은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당시 성과적으로 형성된 중공업 우선의 경제제도에 의한 경로의존성으로 인해서 중공업 우선 발전노선이 지속되는 측면도 존재한다.
  • 1945년 해방 직후 경제난이라는 위기를 해소하고 1960년까지 북한의 경제형성기에 높은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당시 성과적으로 형성된 중공업 우선의 경제제도에 의한 경로의존성
최종 답변 (final_answer)
북한이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을 지속하는 이유는 1945년 해방 직후의 경제난이라는 위기를 해소하고 1960년까지 경제형성기에 높은 경제성장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형성된 중공업 우선 경제제도의 경로의존성 또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