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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문화재위원회 제11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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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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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70725_23
발행기관
문화재청
발행연도
2019
KDC
6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이후 10여 개 동족(同族)이 모여 정자를 다시 세우기로 뜻을 세우고 1787년(丁未) 가을 부터 1788년(무신) 봄에 중건한다. 정자의 위치는 상량문의 응봉의 동쪽 길지이며 앞과 뒤가 활짝 열린 자리라는 것과 중건기의 옛터에서 수백보 북쪽이라 하여 현재의 방초정 자리로 확인된다. 또한 지금의 정자와 동일한 형식인 5량가 구조의 3간(五架而三間) 규모라는 것은 현재 방초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자를 마을 앞으로 옮긴 것은 감천의 잦은 홍수를 피하고 감천 변의 네 칸 규모와는 다른 형식으로 조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74년 12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고, 1988년 보수공사, 2003 년 정비공사, 2004년 보수공사, 2007년에 주변정비공사54)가 있었다. 이러한 수리기록을 통해서 이정복이 초창한 이후 1636년 병화로 소진되고, 다시 1689년 이해가 중건하고 1727년 보수가 이루어지고 1728년 병화로 소진된 것을 1736년 홍수로 소실되는 등 변화를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위치나 규모 및 내용 등의 다양한 이견이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1788년 중건한 것은 현재의 위치에서 지금의 규모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원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으로 파악된다. 기록으로는 이해의 방초정 중수기(1689), 이의조의 방초정 중건기(1788)등을 비롯하여 『품천사집(品川史集)』55)에는 진암 이수호의 중건 상량문(1788), 이호민, 조찬한, 송환기, 이수천, 이채, 이수원, 송달수, 송병선 등의 당대 시인 묵객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방초정 내의 현판 및 편액은 송병기, 이수호, 이수정, 김재학, 송환기, 이우, 송달수, 이철우, 홍극모, 이현주, 이의조, 정기화, 김난규, 고가인, 윤병성, 연릉 말손인, 김양순, 송병준·송병순, 작가미상 등 방초정과 일대의 가경을 제영시 38편이 있다. 그 중에 이만영(李晩永, 1877-1963)의 『방초정십경』은 사계를 읊은 안재 장유(1649-1724)의 』방초정8영』에 ‘응봉낙조(鷹峰落照)’와 ‘미산반륜(眉山半輪)’을 추가하여 방초정을 시점으로 하는 집경시로 방초정 일대의 경관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지도는 마을의 개인 누정이라 자료가 많지 않으나 『1872년 지방지도』와 『영남읍지(1871년·1895년)』이 있다. 다만 방초정 주변의 작내역(作乃驛)은 교통의 요지로 방문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인근의 명산을 방문할 때 중간 기착지 역할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초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고, 이익공계통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이다. 평면은 가운데 1칸 크기의 방을 놓고 사방에 마루를 설치한 중재실형(中齋室型)이다. 방을 이루는 내진주는 측면 평주열과 다르게 따로 세워 방을 구획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담양이나 나주 일대의 호남지역에 널리 분포』57)되나 영남에는 흔하지않고 경상도 서쪽 지리산 인근이나 충청도 남쪽 일부에서 찾아볼 수 있어 이의조를 비 롯하여 원터마을에 정착한 정양공의 후손들이 노론계열 가문으로 전라도 혹은 충청도지역 학자들과의 교류 등으로 인한 영향이 건축형식에까지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누하의 온돌방은 강돌을 큰 것에서 위로 갈수록 작은 것으로 층층이 쌓아 높은 구들과 고래를 둔 온돌로 뒤에 아궁이와 앞에 굴뚝을 설치하여 난방을 하고 있다. 누상은 사면이 개방된 구조로 계절의 변화에 대응하여 마루와 방을 통합하거나 분리하여 가변적인 구성이 돋보이고 있다. 학술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김천 방초정은 연안이씨 집성촌의 구심적인 역할과 다양한 시인묵객들과 교류하던 중심공간으로 자연과 합일된 누정이다. 앞쪽의 수평적인 랜드스케이프를 담아내기 위하여 특수한 마루를 중심으로 한가운데 온돌방을 배치한 중재실형 평면구성의 중층누정으로 잘 구현하고 있다. 이로한 공간구성은 호남지방에서 자주 보이지만 영남지방에서는 그 사례가 드문 편이다. 정자를 조영한 연안이씨 문중이 노론계열이므로 학문적 배타성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과의 교류 활동 등이 정자의 양식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지 관련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중층누정에 온돌방에 난방을 하기 위하여 고상식 온돌을 설치한 것은 지역적 온돌의 특성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천 방초정은 최씨를 경모하여 최씨담을 조성한 것과 최씨 정려비와 충노석이지비 등을 통해서 성리학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으며 나아가 종가까지 이어지는 연안이씨 집성촌인 원터마을의 공간구성이 그대로 잘 보전하고 있다. 이는 마을 공동체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최씨담과 왕버들과 배롱나무 등은 조성 초기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 조경학적 연구와 마을의 유출수를 생태적으로 재처리하여 여과하는 전통방식 연구에 기여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김천 방초정은 최씨담과 어우러진 중층누정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마을의 중심공간 구성, 마을의 랜드마크로서의 정자 그리고 주변의 공간구성 등은 씨족 마을과 유교적인 질서가 잘 반영되고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특히 방초정에서 바라보이는 각 방면의 절경을 읊은 방초정십경(芳草亭十景)은 영화와 같이 파노라믹하게 경관을 즐기는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최씨담의 생태적이고 방지쌍원도(方池雙圓島)를 담은 조경학적인 가치와 도가적인 특성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측면에서 시대성, 역사적 인물, 문화사적인 기여도 등에서 우수하고, 예술적 측면에서 보편성, 특수성, 우수성, 창의성 등이 우수하고, 학술적 측면에서 지역성, 연구기여도 등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는 나타나지 않는 특성이지만 같은 타 지역과 비교했을 때 더 큰 의미가 찾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장소적인 특성을 구조와 창호 그리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건축에 적용시켜 완결되게 보여주고 있다. 다만 초창과 위치에 대해서 알기 어렵고 1788년 중건한 것은 현재의 위치에서 지금의 규모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되므로 문화재위원회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있기를 바란다. 대율리는 부림홍씨 세거지로 임진왜란 이전부터 동몽 교육을 위한 시설인 서당을 마련하였으나 전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서당은 1632년에 회복하였다. 1631년 마을 안의 어른들이 재원을 마련하여 건립을 도모하였지만 여력이 모자라 공사는 중단되었다. 이듬해 현령으로 부임한 홍재형의 후원으로 공사를 재개하여 1632년에 준공한 사실은 <부계서당기>는 전한다. 기문에서 밝혔듯이 건물의 기능은 서당이며, 부림홍씨의 다른 명칭인 부계를 따서 부계서당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부계서당은 1705년에 이르러 중수하게 되는데, 중수한 사실은 현재 대율리 대청 안에 보관된 묵서 상량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상량문에 따르면 주요 부재가 훼손된 상황이어서 중수하지 않고는 제 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다. 이때 중수하면서 1632년에 지은 서당 건물을 대폭 고쳤을 여지가 보이지만 지금 건물을 짜고있는 목부재와 평면에서 그 부분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추후 연륜연대 측정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초익공을 십자로 결구한 뒤 주두를 놓고 보를 받쳐 구조를 짰다. 익공의 짜임은 평주와 우주 상부 처리에서 조금 차이를 보인다. 평주 상부에 놓인 익공은 촛가지가 짧기는 하지만 나름 앙서 모양으로 다듬었고 초가지 위, 아래도 초각하였으며, 내부는 끝단을 사절하고 하부는 초각한 모양으로 대체로 조선후기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 상부는 익공 대신에 창방 뺄목을 익공 모양으로 다듬어 결구한 차이가 있다. 지금 대율리 대청은 맞배집이지만 팔작집이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하는데, 측면까지 창방으로 기둥을 결구하고, 충량을 사용한 점, 측면 기둥 상부에 정면, 배면과 동일한 형식의 포작을 짠 방식 등이 그 근거로서 추후 논의가 필요하다. 양통의 구조를 보면, 우툇간에는 맞보 방식으로 보를 걸었으나 나머지 다른 칸은 모두 대들보를 걸어 상부 가구를 짰다. 대들보 위로 중도리 사이에 포대공 형식으로 결구한 중대공은 가운데 높이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에 베개목을 받쳐 높이를 조절한 조치는 임기응변에 능한 목수의 재치로 보인다. 종보 상부는 판대공 형식의 종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받쳤다. 형태는 단순한 편이나 일부는 운형으로 측면을 조각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방초정의 중건 과정에서 1728년 병화로 인해 소실된 이후, 1736년 홍수로 인해 소실되기 전까지의 구체적인 수리 내역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1728년 병화로 소실된 시점과 1736년 홍수로 소실된 시점 사이의 기간 동안 발생한 구체적인 수리 내역을 요구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방초정의 소실 및 수리 기록과 관련된 연도별 사건들을 추출한다.

    • 1636년 병화로 소진되고
    • 다시 1689년 이해가 중건하고 1727년 보수가 이루어지고 1728년 병화로 소진된 것을 1736년 홍수로 소실되는 등 변화를 겪게 된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1728년 병화 소실과 1736년 홍수 소실 사이의 기간을 명시한 문장을 선택한다. 하지만 해당 기간 내에 별도의 수리 사건이 있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 1728년 병화로 소진된 것을 1736년 홍수로 소실되는 등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에 따르면 1727년에는 보수가 있었으나, 1728년 병화로 소진된 후 바로 1736년 홍수로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28년과 1736년 사이의 기간에 수행된 수리 활동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1728년~1736년 사이의 수리 내역은 문맥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답을 결정할 수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문맥에 정보가 없으므로 정해진 답변 형식을 사용한다.

근거 (evidence)
  • 1636년 병화로 소진되고
  • 다시 1689년 이해가 중건하고 1727년 보수가 이루어지고 1728년 병화로 소진된 것을 1736년 홍수로 소실되는 등 변화를 겪게 된다.
  • 1728년 병화로 소진된 것을 1736년 홍수로 소실되는 등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1728년 병화로 소진된 사실과 1736년 홍수로 소실된 사실이 나열되어 있으나, 그 사이 기간에 이루어진 수리 내역에 대한 정보는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문맥에 없는 외부 정보나 추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