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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어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한 정책관리 성공사례 연구 세입기반의 안정적 확보와 재정의 긴축운용 노력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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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Y_20170217041304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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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한국개발연구원
발행연도
2016
KDC
32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안정화 시책의 방향은 이미 1978년도에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1978년 말에 신현확 씨가 부총리로 새로 부임해 와서 우리 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이것을 1979년 1월 각 부처 연두보고 시에 대통령한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의 정책전환안에 대하여 엄청나게 불만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중화학투자를 조정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중복투자가 되어서 가동률이 3%에 불과하고 제품을 생산해 놓아도 팔리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조정하지 않을 수가 없고 착수한 것 전부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농업도 고쳐야 하고, 엄청나게 추진한 농촌주택개량사업도 바꿔야 하고, 또 가격도 풀어야 하고, 수출지원제도도 바꿔야 한다고 하니까 박 대통령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코멘트를 하고, 사방에서 못마땅해 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하여튼 그런 역경 속에서 안정화 정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어찌됐건 이와 같은 어려움을 거치면서 안을 다듬어서 1979년 4월 17일 소위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1960~70년대 한국은 강력한 리더십과 국민역량을 발휘하여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그러나 높은 물가상승, 산업구조 왜곡, 외채누증의 부작용도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이 1970년대 말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정부 일각에서는 고도성장 과정에서 체질화된 인플레 수반형 경제구조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성장잠재력을 계속 키워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과거 정부 주도 경제운용의 한계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와 새로운 경제운용 방식의 모색을 시도했다. 그래서 그 1차적인 초점이 경제안정화라고 인식하고, 경제안정화 종합시책(1979년 4월 17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시책의 주요 내용은 첫째, 안정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당면대책과 함께 제도와 경제운용 방식에 대한 구조적 개선과 근원적 대책 수립⋅추진, 둘째, 생필품의 수급 원활화와 가격안정에 우선, 셋째, 안정을 위한 투자조정 등의 대책은 발전잠재력 배양, 산업경쟁력 제고 방향으로 전개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1970년대 말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 등을 중심으로 기안되고 추진된 안정화 시책은 1980년대 한국이 경제안정 기조 속에서 긴축재정 정책을 추진하는 밑받침이 되었다. 안정화 시책에 대한 반대는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상공부는 수입자유화 확대와 수출 금융 축소는 있을 수 없다며 강력히 반발했고, 재무부는 금융 자율화 추진이 시기 상조라는 이유로, 농수산부는 농어민과 농촌 보호라는 명분을 앞세워 거세게 반대하고 나섰다. 업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출업자들은 수출 금융의 축소와 점진적인 수출업체 지원축소 계획에 대해, 그리고 중화학공업 분야 기업들은 중화학공업에 대한 지원 축소 방침에 대해 각각 반대했고, 금리인상에 대해서는 모든 업계가 일제히 반발했다. 농민들도 수입 자유화에 항의하며 반대 대열에 동참했다. 결국 ‘경제 쿠데타’가 일어났다. ‘4⋅17 경제안정화 시책’ 가운데 수출 지원금융 축소 방침이 취소된 것이다. 이 조치는 신현확 부총리가 파리에서 열리는 대한 차관단 회의(IECOK) 총회에 참석차 출국한 사이에 취해졌다. 당시 언론은 이를 ‘경제 쿠데타’로 표현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안정화 시책은 어느덧 경제정책의 본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안정화 시책의 총대를 멨던 신현확 부총리가 10⋅26사태 이후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기면서 안정화는 정부 정책의 대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로서는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작업팀을 만들어서 많은 투자계획을 조정하고 많이 줄여 나갔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곧 이어 1979년 하반기에 불어 닥친 제2차 석유파동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가 있었습니다. 2차 석유파동이 났을 때에는 1차 석유파동 때와는 완전히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1차 때는 인플레 중심으로 갔는데 2차 때는 완전히 안정 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불황을 감수하더라도 안정 쪽으로 갔는데, 1차 석유파동이 왔을 때는 선진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가 인플레정책으로 갔습니다. 2차 석유파동이 왔을 때는 선진국이 전부 다 안정 쪽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한 게 아니고 우리가 안정화 시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중남미하고 한국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제가 되었던 겁니다. 그때 만약에 중화학투자계획 같은 것을 조정하지 않았으면 2차 석유파동이 났을 때 감당을 못했을 겁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조절해서 미리 줄이는 쪽으로 했기 때문에 그나마도 2차 석유파동이 와서 1980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을 겪고 빠른 시일 안에 회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79년 10월의 ‘10⋅26사태’ 이후 1980년 5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국보위) 설치까지의 기간은 ‘신군부’가 전면에 부상하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러나 경제정책 측면에서는 정책 방향을 둘러싼 그동안의 혼선이 사라지고 안정화의 목소리가 수렴되는 시기였다. 정치체제의 불안정과 집권 세력의 공백 속에서 사회 안정을 위해서는 경제안정이 절대 필요했던 것이다. 그 부산물로서 경제정책이 관료를 중심으로 결정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과도 체제에서 이한빈 부총리가 취임했지만 경제정책의 실질적인 축은 신현확 총리였다. 1979년 ‘12⋅12사태’를 계기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세력이 정권의 핵심으로 부상했지만, 경제 쪽에는 거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복잡한 경제현상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승부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이라 이 같은 분위기는 국보위가 구성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따라서 이 기간 중 경제정책은 전적으로 경제 관료의 판단에 맡겨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 1월에 ‘1⋅12조치’가 전격 발표되었다. 김재익 경제수석은 5공 초기 경제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전두환과 김재익의 인연은 가정교사로 시작되었다. 전두환 보완사령관이 당시 경제기획국장인 김재익 씨를 가정교사로 초빙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개인적 인연이 아니라 신군부와 경제기획원의 만남이라는 사실이다. 해체론까지 직면했던 경제기획원으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김재익 수석이 제5공화국 경제정책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경제 철학과 정책에 관한 한, 전두환 대통령은 김재익의 제자였다. 김재익은 알기 쉽게 제대로 제자를 가르쳤고, 전두환 대통령은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제자는 스승의 교리를 현실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기조는 김재익 수석이 아웅산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한 마디로 김재익은 ‘경제 대통령’이었던 셈이다(이장규). 1981년도의 물가 억제 목표는 20%선으로 잡고 있었다. 당시 형편으로는 그 정도도 감지덕지할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김재익 수석이 회의를 소집해 조경식 예산실장, 진념 물가국장과 함께 청와대를 들어갔다. 김재익 수석의 말을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요컨대 물가를 한 자리 숫자로 안정시키라는 것이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설명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경제기획원은 1981년 5월부터 전두환 대통령에게 매주 한 차례씩 10회에 걸쳐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을 특별 브리핑했다. 경제기획원식 경제정책관을 최고지도자의 머리에 가감 없이 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재익 수석과 협의를 거친 강경식 당시 기획차관보는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에 10개 분야에 대한 브리핑 차트를 준비시켰다. 기본 인식은 성장 위주의 양적 팽창에 따른 고질적인 인플레 구조가 여러 문제를 야기해 과감한 정책 전환이 있어야만 경제 성장과 발전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수출 지원 축소, 수입 자유화 확대, 정책 금융 축소, 실질 금리 보장, 과감한 재정 개혁, 중화학공업 지원 제대 재검토, 이중곡가제 폐지 등이 포함되었다. 당연히 정부 내부는 물론 여러 사회 부문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개발 연대 사고와의 충돌이었다. 두 사람은 신군부의 실세들을 설득했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979년 안정화 시책으로 안정⋅자율⋅개방이라는 3대 경제 철학이 드디어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이라는 범정부적 국가 계획으로 구현되었고 1980년 정부전환기에 경제정책의 큰 흐름을 바꾸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김재익 경제수석이 물가 안정을 위해 청와대에서 조경식 예산실장, 진념 물가국장에게 요구했던 구체적인 물가 수치는 얼마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김재익 경제수석이 물가 안정과 관련하여 조경식 예산실장과 진념 물가국장에게 요구한 구체적인 수치(목표치)를 찾는 것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김재익 수석, 조경식 예산실장, 진념 물가국장이 등장하는 부분과 물가 목표에 관한 정보를 추출한다.

    • 김재익 수석이 회의를 소집해 조경식 예산실장, 진념 물가국장과 함께 청와대를 들어갔다.
    • 1981년도의 물가 억제 목표는 20%선으로 잡고 있었다.
    • 요컨대 물가를 한 자리 숫자로 안정시키라는 것이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1981년도 물가 억제 목표가 20%선이었다는 점과 김재익 수석이 물가를 '한 자리 숫자로 안정시키라'고 요구했다는 점을 확인한다. 하지만 '한 자리 숫자'가 정확히 몇 퍼센트(%)를 의미하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 1981년도의 물가 억제 목표는 20%선으로 잡고 있었다.
    • 요컨대 물가를 한 자리 숫자로 안정시키라는 것이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기존 목표인 20%와 김재익 수석의 요구인 '한 자리 숫자'를 결합하면 1%~9% 사이의 어떤 수치임을 추론할 수 있으나, 문맥 내에서 특정된 단일 숫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수치'는 '한 자리 숫자'라는 범위로만 제시되어 있을 뿐, 정확한 값은 문맥을 통해 확정할 수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문맥에 명시되지 않은 구체적인 수치를 답할 수 없으므로 답변 불가능 판정을 내린다.

근거 (evidence)
  • 김재익 수석이 회의를 소집해 조경식 예산실장, 진념 물가국장과 함께 청와대를 들어갔다.
  • 1981년도의 물가 억제 목표는 20%선으로 잡고 있었다.
  • 요컨대 물가를 한 자리 숫자로 안정시키라는 것이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1981년 물가 억제 목표가 20%선이었다는 점과 김재익 수석이 물가를 '한 자리 숫자'로 안정시키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한 자리 숫자'가 구체적으로 몇 퍼센트를 의미하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질문에서 요구하는 정확한 수치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외부 지식이나 추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