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절대평가 방식이 도입되면 상대적 순위와 무관하게 학생들의 점수가 몇 점인지에 따라 등급을 부여합니다. 경쟁적인 학습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풀이 중심의 수업 대신 의사소통 중심의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되겠지요. 성적 표기 방식도 절대평가 도입의 취지에 맞게 바뀔 것입니다. 중장기 수능 개선 방안은 우리교육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여 세부사항 등에 대해서는 정책 연구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쳐 논의해 나가겠습니다. 지난해 12월, ‘수능 영어 절대평가 도입방안’ 발표 당시 제시했듯 중등학교 영어수업 개선을 위해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적용에 따른 교육과정 개편, 읽기·듣기·말하기·쓰기 능력을 균형 있게 향상시키는 교실수업 개선, 교원의 영어 구사능력과 수업능력 함양 노력을 병행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학습 부담을 덜고, 학부모들은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 보다 즐겁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교실수업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영어 절대평가가 교육 현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강화는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을 아우르는 예성강과 한양을 품었던 한강, 그리고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자 바다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무엇보다 바다와 갯벌, 산과 들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면서도 천혜의 요새로서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산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강화산성은 해안선을 따라 흙으로 쌓은 약 23km의 외성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성 안쪽으로 쌓은 중성, 그리고 고려 왕조를 지켜내기 위한 성 안의 성인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 당시에는 섬 전체가 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3중으로 겹겹이 쌓았던 강화산성도 몽골과의 화의(和議)조약에 의해 대부분이 헐리고 지금은 약 2km 정도만 남아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큰 우레 같아서 아이들과 여자들 모두 슬피 울었다. 성곽을 허물던 병사들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이럴줄 알았으면 당초에 성을 쌓지 않았던 것만 못하다며 울부짖었다. 몽골군은 모든 성을 무너뜨리고 난 후 곡식과 민가를 불태워 그 흔적이 성 안에 헤아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후 조선 전기에 다시 축조했지만 병자호란 때 파괴됐고, 숙종 때 성을 보수하면서 성 전체를 돌로 바꾸었다. 현재는 동서남북으로 문루와 성벽만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지도를 보면 강화도의 평야, 3분의 1은 원래 바다였다. 하지만 현재는 강화도와 석모도, 교동도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넓은 평야가 어떻게 섬에 있을 수 있을까? 해답은 ‘간척’으로 배고픈 현실을 간절하게 극복하기 위해서 였다. 현재 마니산 일대는 예전에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고, 석모도와 교동도 역시 여러 개의 섬이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에서 흘러와 쌓인 퇴적물과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간척이 더해져 만들어진 평야가 지금의 강화도이다. 고려 왕조의 갑작스런 강화 천도로 인해 강도시대(江都時代) 초기 강화의 모습은 참담했다. 당대의 문장가 이규보는 ‘송곳 하나 세울 만한 땅이 없어 녹봉만을 의지해 오다가 녹봉마저 뜸하여 끼니를 거르기 일쑤며, 늙은 몸이 쓸모가 없어져 땔감마저 구하지 못하고 추위에 떨기가 일쑤였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간척은 조선 후기에도 이어졌는데 갯벌을 메우기 위해 강화도에 120개의 둑을 건설했으며 마니산 일대의 간척사업에는 9개월 간 11만 명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이러한 간척사업을 통해 강화도는 전체 면적 중 3분의 1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되었고, 현재도 여전히 간척이 진행 중이다.
최우 집권기,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최우는 지금의 경찰 조직과 비슷한 ‘별초’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주로 밤에 활동을 한다고 해서 야별초(夜別抄)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후 군사의 수가 늘어나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편성된 신의군이 합세해 삼별초라 칭했다. 이후 삼별초는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을 도와 약 30년간 몽골에 맞서는 특수 정예군대로 대몽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1270년 몽골과 화의를 이유로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 환도하지만, 삼별초는 끝까지 싸우겠다는 뜻을 표명하고 왕손인 ‘승화후 온’을 새 임금으로 삼아 행정기구를 개편하고 관리를 임명하였다. “우리야말로 고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고려인으로 몽골과 끝까지 항전할 것이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정예 부대인 ‘삼별초’가 권토중래를 선언하며 떠나간 곳, 외포리 포구. 그렇게 외포리를 떠난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후퇴하며 3년 간 저항하다 고려 왕실을 인정하지 않고 따로 왕을 세웠다는 이유로 1273년 여·몽 연합군에 의해 전멸한다. 김통정을 비롯한 70여 명은 한라산에 들어가 끝까지 싸우다가 자결했다.
약 800여 년 전, 고려왕조가 몽골 항쟁을 위해 천도했던 강화에 세운 고려 궁. 역사서에 기록만 남아 있을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강도(江都) 39년’의 상징 고려궁에는 현재 ‘승평문’이라는 현판만이 남아 있다. 39년간 수도 역할을 했던 강화도의 고려궁은 그 크기가 개경에 있는 송악 궁궐의 절반 정도였지만 구조는 송악을 그대로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본 궁인 연경궁을 비롯하여 14개의 작은 궁궐 건물들을 짓는 데 걸린 시간은 꼬박 2년. 그 애씀이 가히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대규모의 궁궐이 있었던 고려궁 또한 1270년 몽골에 의해 궁궐의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다. 강화산성과 고려궁을 모두 허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고려와 몽골이 맺은 화의 조약 때문이었다. 현재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유수의 집무실인 ‘명위헌’과 조선 후기에 세워진 실무 담당 관리들이 근무했던 이방청이 남아 있다.
고려의 수도가 개경(개성)에 있었던 탓에 현재 남한에는 고려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고려 왕족의 능 또한 남한에 있는 것은 단 5기뿐인데, 그 중 4기가 강화에 있다. 그 이유는 대몽 항쟁기를 겪으며 고려 왕실이 도읍을 옮겼기 때문이다. 강화도에 있는 고려의 왕과 왕족의 능 규모는 왜소하여 외부는 흙으로 덮은 형태이나 호석과 난간석을 갖춘 왕릉 구조의 정형은 찾아볼 수 없다. 고려 23대 고종의 무덤인 홍릉은 원래는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 형상의 돌 조각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제21대 왕이었던 희종은 당시의 실권자였던 최충헌을 제거하고 왕권을 되찾으려다 실패해서 폐위된다. 결국 최우에 의해 강화 교동으로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석릉에 안장되었다. 고려산 중턱에 있는 고종의 묘인 홍릉, 진강산 일대에 모여 있 는 고려 왕가의 능인 곤릉(원덕태후 능), 가릉(순경태후 능)의 모습을 통해 고려 왕조의 웅장함보다는 나라 안팎으로 혼란했던 당시 왕조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팔만대장경의 판 수는 무려 8만여 개로 8만 4,000가지 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다고 한다. 총 무게 280톤, 경판을 차곡차곡 쌓았을 때의 높이는 약 3,200m로 백두산(2,744m) 보다 높다. 팔만대장경은 불심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당시 선현들이 갖고 있던 소망의 집약체이자 그만큼 고난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데도 어마어마한 비용과 시간을 감수하면서 만든 대장경은 몽골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싸워 이기겠다는 사기(士氣)를 앙양함은 물론 백성들의 단결된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의지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매일 1,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16년을 새겨야 만들 수 있다는 수치상의 논리 앞에서는 자못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고려사에는 고종 38년에 왕이 성 서문 밖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대장경판 완성을 기리는 제(齊)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강화에 있었던 이규보는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 <대장각판 군신기고문>을 지어 민족수호의 충정을 표현하였다. 약 16년간 130만 명이 동원되어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용도 없고 준비물도 없다. 유치원 과정 2년을 포함한 초등학교 과정은 8년. 이 시간은 아이들이 즐겁게 놀면서 공부하는 법을 배우는 시기이다. 네덜란드 초등학생들은 학교에 가방을 가져가지 않는다. 책을 집에 가져오지도 않는다. 공교육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취지이기에 가능한 선택이다. 특히 초등학교는 방과 후에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걸 배우라는 취지로 숙제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방과 후 네덜란드 부모들은 아이들과 도서관에 같이 간다. 네덜란드 교육은 학교에서 모든 것을 책임지면서도 자율성을 중시한다. 공정하고, 정확하게 책임을 묻는 엄격함이 있다. 그 일례가 유치원부터 유급이 있다는 것이다. “유치원은 사회의 첫 발이므로 사회성을 배우는 곳이죠. 주로 양보, 협동, 나눔 등을 가르치는데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거나 사회성이 떨어지면 유급을 시켜요. 선생님 두 명이 아이 한 명, 한 명에 대해 꼼꼼히 체크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학부모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사회에서 필요한 기본 요건은 예외 없이 가르치는 것이 네덜란드 교육의 기본인 것이다.
네덜란드가 공교육 천국인 이유는 ‘모든 학생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일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이 제 역할을 한다’는 교육의 본질에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공부는 많이 한다고 잘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집중과 선택을 해야 하죠. 네덜란드 아이들은 공교육을 통해 성장하고 자기 길을 찾아갑니다.” 저자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이자 네덜란드 공교육의 경험자로 한국 공교육 변화의 대안을 제시했다. “제일 먼저 대학입시 경쟁이 사라져야 해요. 네덜란드에 과외와 사교육이 없는 이유는 대학입시 경쟁이 없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도 교육이 사회 인력을 양성하는 본질적인 기능을 되찾고 선행 학습이 법으로 규제됐으면 합니다.” 네덜란드의 좋은 교육 문화와 제도를 소개하고자 책을 쓰게 됐던 정현숙 씨.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교육이 있어야 사회도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강화산성의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는 어느 정도 남아 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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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강화산성의 구성 요소와 현재 남아 있는 규모를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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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강화산성의 구조와 현재 상태에 관한 정보를 문맥에서 추출한다.
- 강화산성은 해안선을 따라 흙으로 쌓은 약 23km의 외성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성 안쪽으로 쌓은 중성, 그리고 고려 왕조를 지켜내기 위한 성 안의 성인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 몽골과의 화의(和議)조약에 의해 대부분이 헐리고 지금은 약 2km 정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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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산성의 3중 구조(외성, 중성, 내성)와 현재 남은 길이(약 2km)를 핵심 근거로 선택한다.
- 외성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성 안쪽으로 쌓은 중성, 그리고 고려 왕조를 지켜내기 위한 성 안의 성인 내성
- 지금은 약 2km 정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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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강화산성은 외성, 중성, 내성의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몽골과의 화의 조약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약 2km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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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강화산성의 구조적 특징과 현재의 잔존 규모를 정리하여 답변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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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강화산성은 해안선을 따라 흙으로 쌓은 약 23km의 외성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성 안쪽으로 쌓은 중성, 그리고 고려 왕조를 지켜내기 위한 성 안의 성인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 몽골과의 화의(和議)조약에 의해 대부분이 헐리고 지금은 약 2km 정도만 남아 있다.
- 외성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성 안쪽으로 쌓은 중성, 그리고 고려 왕조를 지켜내기 위한 성 안의 성인 내성
- 지금은 약 2km 정도만 남아 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강화산성은 해안선을 따라 흙으로 쌓은 약 23km의 외성, 외성 안쪽의 중성, 그리고 성 안의 내성으로 이루어진 3중 구조이다. 그러나 몽골과의 화의 조약으로 인해 대부분이 헐리고 현재는 약 2km 정도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