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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북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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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999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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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9998182_6
발행기관
통일교육원
발행연도
2017
KDC
34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남한이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강화하자, 북한도 서방 세계와의 관계개선 및 외교 다변화를 추진하였다. 특히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체제 유지를 위한 핵심 요소로 판단해왔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과의 첨예한 갈등 상황에서도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을 추진해 왔다. 이 시기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 및 체제 안전보장을 추구하고, 경제적 실익을 추구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지속적인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 및 국제사회와의 상호 신뢰 부족으로 인해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탈냉전 시기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강화하였다. 북한은 양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체제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국제사회의 외교적 제재를 약화시키고, 양국으로부터 다방면의 지원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북핵을 비롯한 북한 문제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미국도 중국 및 러시아와 사안별로 갈등하고 대립하면서도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선택적 협력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1948년 9월 정권 수립 이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노력하였다. 이 시기 북한 수교국은 소련, 중국, 동유럽 등 12개국이었다. 북한은 6.25전쟁을 위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군사 및 경제 지원을 받기 위한 외교활동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북한은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던 중국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북한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소련은 물론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강화하였다. 북한은 1948년 정권 수립 초기에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6.25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냉전시대의 북·중 관계는 혈맹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전면적인 경제, 군사, 제도적 지원을 받았고, 냉전 시기 내내 지속된 두 나라와의 강력한 외교적 연계를 마련하였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과의 다양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대남 관계에서의 우위 확보와 국제적 입지 강화를 모색하였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조·소 우호 협력 및 호상 원조 조약’(1961.6.)과‘조·중 우호 협력 및 호상 원조 조약’(1961.7.)을 각각 체결하였다. 양국과의 조약 체결은 사실상의 군사동맹 관계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양국과의 조약체결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62년 중·소 국경 분쟁이 발생했을 때 등거리외교를 위해 중립을 견지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과 소련 정부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의 대부분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하고 규모도 대폭 축소하였다. 북한은 1966년 8월‘내정 불간섭과 호상 평등’을 표방한 자주노선을 선언하고 제 3세계 개발도상국들을 비롯한 비동맹국 외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외교에서 탈피하여 외교의 다변화를 추진하였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북한은 전후 복구·건설을 위한 경제 지원 획득을 외교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였다. 특히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의 무상 원조를 지원받기 위해 협력관계 강화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1953년) 이후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은 서방과의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하였고, 북한은 중국과 함께 비동맹국 외교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비동맹 외교는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서 채택된‘반둥 10원칙’에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이후 북한은 중·소 사회주의 진영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외교 대상국들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 및 비동맹 국가들로 확대하였다. 북한은 1950년대 말부터 국내외의 상황 변화에 따라 비동맹국 외교를 강화하였다. 남한 군사정권 등장, 쿠바 사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 국가들의 유엔 가입이 증가하였다. 소련의 흐루시초프 정권은 서방과의 평화공존 정책을 발표하고, 이로 인해 중국과 사회주의 노선 갈등이 표면화된다. 평화공존 정책에 불만을 가졌던 북한 김일성 정권은 1956년 제2차 당 대회에서 외교 다변화 방침을 밝힌다. 이는 1960년 제15차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동시 초청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대남 관계에서의 국제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1961년 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와의 단결, 제국주의 진영에 대한 반대 투쟁, 신생 독립 국가에 대한 접근 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변화된 국제 정세 하에서 김일성 정권은 자주외교노선을 강조하며 북한 내 친소·친중 세력을 숙청하였다. 탈냉전 시기 이전까지 북한과 러시아는 전통적 우호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소련은 군사·이념적 관계에 기초하여 북한 정권의 수립을 지원하였고, 북·중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을 견제하면서 북한의 전후 복구 및 군사력 증강을 지원하였다. 탈냉전 이후에는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균형외교를 추진함으로써 북한은 새로운 관계 설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북한은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고 11개 공화국으로 이뤄진 독립국가연합(CIS)이 출범하자 곧바로 모든 공화국과 수교하는 등 관계를 재정립하였다. 1996년 북·러 경제공동위원회 개최 등 경제협력 관계가 본격화되면서 북·러 간의 정치관계도 차츰 회복되었다.‘조·러 우호 선린 협조 조약’에 2000년 2월 9일 정식 서명하였다. 이로써 북·러 관계는 이념에 기초한 정치·군사 동맹관계에서 벗어나 경제협력 파트너로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조·러 우호 선린 협조 조약’체결에 이어 러시아의 최고지도자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2000년 7월 북한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은 북한과 협력을 강화하는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 김정일과 푸틴은 2000년 7월 19일 평양에서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간 협조와 상호 협력, 북한 미사일 문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북·러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김정일은 2000년 7월 푸틴 대통령의 방북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2001년 7월 26일부터 8월 18일까지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소 수교 이후 소원해 있던 북러 관계를 정상화하고 러시아와 외교·경제 등 협력 체제를 구축하였다. 특히 양국 정상이 발표한‘북·러 모스크바 선언’(2001.8.4.)에는 양국 간의 협력관계 복원, 한반도 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연결 사업, 대미 공동보조, 한반도 정세 등에 관한 합의가 담겨 있다. 한편, 러시아는 2007년 2월 13일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합의와 2007년 10월 3일‘9.19 공동성명을 위한 2단계 조치’합의 과정에서 북한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러시아가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차원에서 북한을 지지하였고, 북한은 국제적 고립 탈피 및 체제 유지를 위해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북한이 1962년 중·소 국경 분쟁 당시 취했던 외교적 태도와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1962년 중·소 국경 분쟁 시기 북한의 외교적 태도와 그에 따른 경제적 영향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중·소 국경 분쟁과 관련된 북한의 행동 및 결과에 대한 문구를 추출한다.

    • 북한은 1962년 중·소 국경 분쟁이 발생했을 때 등거리외교를 위해 중립을 견지하였다.
    • 이로 인해 중국과 소련 정부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의 대부분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하고 규모도 대폭 축소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북한의 태도를 나타내는 '중립 견지'와 결과에 해당하는 '경제원조의 변화' 문구를 선택한다.

    • 등거리외교를 위해 중립을 견지하였다.
    • 중국과 소련 정부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의 대부분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하고 규모도 대폭 축소하였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북한이 등거리외교를 위해 중립을 지킨 것이 중국과 소련의 경제적 조치(원조 방식 변경 및 규모 축소)를 불러온 인과관계를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북한은 중립을 유지했으며, 그 결과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받던 경제원조가 유상으로 전환되고 규모가 축소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명확하고 간결한 서술형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북한은 1962년 중·소 국경 분쟁이 발생했을 때 등거리외교를 위해 중립을 견지하였다.
  • 이로 인해 중국과 소련 정부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의 대부분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하고 규모도 대폭 축소하였다.
  • 등거리외교를 위해 중립을 견지하였다.
  • 중국과 소련 정부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의 대부분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하고 규모도 대폭 축소하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북한은 등거리외교를 위해 중립을 견지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소련 정부로부터 받던 경제원조의 대부분이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되고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