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산출물 · 도서자료 기계독해

장기분쟁 이후 사회의 화해협력 그 방향과 과제 국제포럼

uuid
9ddf09cc-ea1a-53f6-bf79-1447b4c9c754
content_id
PCY_202006041013541181
doc_id
PCY_202006041013541181_2
발행기관
통일연구원
발행연도
2019
KDC
33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화해의 정도는 서로에 대한 공유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냐에 달려있다. 이러한 공유를 위해서라도 당사자들은 서로 만나 대화해야 한다. 언어적 화해도 만나 대화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대화란 어원적으로 ‘둘(di)이 하는 말(logos)’ 또는 ‘마주보고(對) 이야기하기(話)’를 의미한다. 그런데 두 가지 말은 두 가지 맥락을 반영하기에 결코 동일할 수 없다. 서로 다르기에 기본적으로 긴장을 포함한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여전히 갈등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만나기 이전의 갈등과는 다르다. 다른 그만큼 극복의 길을 노정하는 갈등이다. 두 말의 교환 과정에서 두 말의 접점이 잉태되고, 상호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화는 일순간 만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대화가 합의문의 형태로 일단락되었다고 해도, 대화의 이유와 원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런 식의 화해의 단계는 얼마든지 다른 표현으로 변주해낼 수 있다. 가령 화해를, 상호 인정을 조약이나 협정 등으로 문헌화하는 ‘언어적’ 차원, 경제협력이나 배상/보상을 하는 ‘물질적’ 차원’, 공동 역사 교과서를 만들고 상처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수준의 ‘정신적’(관념적) 차원으로 나누어 보는 식이다. 이 때 언어적 차원이 화해의 가장 낮은 단계라면, 정신적 차원의 화해가 가장 높은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손해배상과 같은 물질적 차원의 화해도 위태하고 불안하다. 한국과 일본이 이른바 ‘한일청구권협정’(1965)을 맺은 이후에도 청구권의 범주 및 그 해석을 두고 심각하게 갈등하게 되는 것은 정신적 차원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한일청구권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의 2조 1항은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이다. 화해와 평화와 관련된 담론에서 화해는 공동의 선(common good)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수사적인 차원에서 화해는 평화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추구해야할 목표로 인식되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추진되는 과정을 보면 상당히 현실타협적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들을 살펴보면, 과거의 잘못에 대해 처벌도 하지만, 사면과 보상, 배상, 그리고 경찰과 공무원 등을 재교육 후 재임용하는 정화라는 수단도 활용된다. 결국 화해하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이러한 정책들은 도덕적 판단의 영역이라기보다 현실적인 정책적 판단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Fernando 교수가 강조하는 정의로운 평화 또는 진실한 화해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국가적 차원의 화해가 공동체 차원의 화해 또는 개인적 차원의 화해를 담보할 수 없다. 이차대전 이후 독일은 폴란드와 화해의 협상을 시작했다. 먼저 ‘언어적’ 차원에서 화해의 과정을 보자. 전쟁과 분단 이후 동독과 서독 나름대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 동독도 과거 나치 시절의 인적, 제도적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시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 그렇게 청산하는 동독 공산당의 정당성이 더 강화되면서 공산당의 독재 체제가 지속되는 등 한계도 분명했다. 그에 비해 서독의 탈나치화의 농도는 다소 달랐다. 서독에서는 나치의 만행에 가담했던 이들을 무조건 단죄하기보다는 연방사면법(1949)과 제2차 사면법(1954)에 따라 국가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이들이 사회에 재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나치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주고 극우 정당은 활동할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런 맥락에서 폴란드와 같은 전쟁 피해국에 대한 사죄와 보상도 병행했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 독일(서독)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게토 기념관의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이었다. 이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면서 같은 해 바르샤바조약을 체결해 양국은 국교를 회복했다. 그리고 ‘물질적’ 차원에서 독일은 폴란드에게 경제협력 차원에서 근로자들의 연금과 차관을 제공했고, 전쟁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독일연방보상법(1953)에 따라 독일의 범죄로 인한 개인 희생자에 대해 보상했다. 보상 신청과 수취 과정에 제도적 결함이 발견되자, ‘독일-폴란드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해 나치에 의한 희생자들을 위한 물질적 보조를 제공했다. 이어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설립해 국가·사회·기업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떠올리며 일정 부분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이어졌다. 독일-폴란드 역사교과서 협의회에서 1960년대부터 노력해 1976년 공동 역사 교과서를 발간해 실제 교육현장에서 사용했다. 독일군 전몰장병은 ‘호국영령’이나 ‘순국선열’이 아닌, ‘가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이들을 전장으로 몰아낸 독일을 범죄국가로 규정했다.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이후 독일의 총리와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폴란드에 사죄하며 가해의 기억을 견지했고,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 인식을 공유하면서 양국 간 정신적 차원의 화해를 도모했다. 물론 독일만의 행동이 아니었다. 폴란드는 폴란드대로 독일의 화해 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주교(bishops)들이 독일 주교들에게 ‘우리는 독일을 용서함과 동시에 용서를 구한다’는 편지를 전달했다. 스리랑카의 경우 무력 분쟁이 당사자들의 공식적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일방의 무력에 의한 승리로 분쟁이 해결되었다. 전쟁과 내전이 어느 한 당사자에 의한 승리로 끝났을 때 전후 평화구축의 과정에서 승자의 평화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지 않은 사례가 있는가? 스리랑카에서 싱할라 엘리트가 협상의 과정에서 타밀의 엘리트의 참여를 최소화하거나 배제하는 전략 또는 다양한 정치, 사회, 종교적 계급의 참여를 유도하여 타밀 엘리트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전략은 승자의 평화를 공고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무력 분쟁에서 승리한 당사자가 패배한 당사자의 엘리트를 얼마나 평화재건의 과정에 참여시켜야 하는가는 논쟁적인 질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승자의 시각에서는 패자의 엘리트에게는 무력충돌의 책임을 묻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 과정에서 '정신적' 차원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수행된 구체적인 노력들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독일과 폴란드의 사례 중 '정신적' 차원의 화해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활동들을 찾아 나열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 노력을 언어적, 물질적, 정신적 차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 부분을 추출한다.

    • 이런 식으로 역사 인식을 공유하면서 양국 간 정신적 차원의 화해를 도모했다.
    • 이러한 노력은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이어졌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정신적 차원의 화해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활동들을 선별한다.

    • 독일-폴란드 역사교과서 협의회에서 1960년대부터 노력해 1976년 공동 역사 교과서를 발간해 실제 교육현장에서 사용했다.
    •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이후 독일의 총리와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폴란드에 사죄하며 가해의 기억을 견지했고,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주교(bishops)들이 독일 주교들에게 ‘우리는 독일을 용서함과 동시에 용서를 구한다’는 편지를 전달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선별된 근거들을 종합하여 공동 교과서 발간, 독일 지도층의 지속적인 사죄와 추모, 폴란드 교회의 용서와 구함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정리한다.

    • 공동 역사 교과서를 발간해 실제 교육현장에서 사용했다.
    • 독일의 총리와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폴란드에 사죄하며 가해의 기억을 견지했고,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주교(bishops)들이 독일 주교들에게 ‘우리는 독일을 용서함과 동시에 용서를 구한다’는 편지를 전달했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정신적 차원의 화해 노력들을 명확히 기술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최종 답변을 생성한다.

근거 (evidence)
  • 이런 식으로 역사 인식을 공유하면서 양국 간 정신적 차원의 화해를 도모했다.
  • 이러한 노력은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이어졌다.
  • 독일-폴란드 역사교과서 협의회에서 1960년대부터 노력해 1976년 공동 역사 교과서를 발간해 실제 교육현장에서 사용했다.
  •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이후 독일의 총리와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폴란드에 사죄하며 가해의 기억을 견지했고,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주교(bishops)들이 독일 주교들에게 ‘우리는 독일을 용서함과 동시에 용서를 구한다’는 편지를 전달했다.
  • 공동 역사 교과서를 발간해 실제 교육현장에서 사용했다.
  • 독일의 총리와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폴란드에 사죄하며 가해의 기억을 견지했고,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독일과 폴란드는 다음과 같은 정신적 차원의 화해 노력을 수행했다. 첫째, 독일-폴란드 역사교과서 협의회를 통해 1976년 공동 역사 교과서를 발간하여 교육 현장에서 사용했다. 둘째, 빌리 브란트 이후 독일의 총리와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폴란드에 사죄하며 가해의 기억을 견지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셋째, 폴란드 가톨릭교회 주교들이 독일 주교들에게 '우리는 독일을 용서함과 동시에 용서를 구한다'는 편지를 전달하며 화해를 도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