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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문화재위원회 제11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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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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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70725_19
발행기관
문화재청
발행연도
2019
KDC
6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이상과 같이 한풍루는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잘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풍루의 원형 유지와 장소성의 측면에서 변형이 이루어진 부분에 대한 규명과 연구가 필요하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경관 요소와의 관계가 원 자리와 같게 하려는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형식과 구조를 통해서 누하에 내진주를 설치하여 상부 귀틀을 지지하고 있고, 누하주가 길이가 작아 직경과 흘림을 큰 것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다. 충량은 단면의 변화되고 곡을 만들면서 기둥에서 대량 위에 얹는 형식을 보이고, 대들보는 춤보다 폭이 긴 타원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이익공 양식의 수서형태 등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후기 관아건축에서 누정의 양식에 맞도록 충실하게 건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풍루는 수리 기록을 통하여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임란으로 소실되어 재건되어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2월 영동군 금강 변으로 옮겨지고 다시 1971년 현재의 자리에 복원되었다. 최근 여러 번의 정비 및 보수공사는 1971년 복원된 한풍루원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잘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문제가 대두된다. 하나는 한풍루의 원형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한풍루가 이전한 장소에 우체국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본래의 자리에 복원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다는 것이다. 원형 유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상으로 오르는 목재계단의 위치가 바뀌어 있고 형식이나 비례 등에서 다소의 변형이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원형과 영동금강변의 한풍루 및 1971년 복원 시의 한풍루 사이의 변형에 대해서 심도 있는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1971년 복원할 때 예산이나 자료 등을 분석하여 이러한 부분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찾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무주한풍루는 지역의 전통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의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면서 글과 그림을 남겨놓아 당시의 시대상과 역사성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또한 선조들의 철학과 사상을 느낄 수 있는 명소로서 역사적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에 위치가 옮겨진 후 다시 비슷한 위치(남대천 건너편 언덕 위)에 옮겨 원래의 부재를 최대한 사용하여 원형으로 복구되었으나 기단 및 기초, 누상부 출입계단의 위치(1930년대 사진에는 계단이 어칸에 위치하고 있음) 등은 그 원형의 진위가 분명치 않다. 또한 당시의 詩句에서 표현된 한풍루의 경관을 유추해 보면, “반은 산벼랑에 걸치고, 반은 물가에” 걸치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위치는 산벼랑도 아니고 물가도 아닌 얕은 언덕 위에 놓여 있어 당시 “호남제일 樓”로서의 경관적 의미는 다소 희석되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을 위한 건축적 특수성이나 예술성, 희소성 등 탁월한 가치는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 강릉 지역의 지세는 태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통과하면서 동․서의 분수령을 이루고 산맥 동편은 급경사를 이루고 곳곳에 평야가 있으며 태백산맥을 수원으로 하는 하천은 동해로 유입되고, 동쪽은 바다에 접해 있다. 강원도는 험준한 산악이 많지만 강릉 지방은 비교적 얕은 산과 평야지로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강릉지역은 고성, 양양, 삼척 등 다른 영동지방보다도 덜 험준하고 작은 규모의 평야가 곳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해안을 끼고 있는 명소와 태백산맥의 줄기에 산재해 있는 계곡을 중심으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명승지가 있으며, 특히 해안과 접해 있는 석호인 경포호수는 산수가 잘 조화된 명승지로 강원도 영동지역에서도 으뜸으로 여겼다. 청담 이중환의 택리지 산수편에는 경포대를 “한나라 고조의 기상과 같아서, 활발한 가운데에도 힘이 있고 능숙하고, 요원한 가운데에도 안온하여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다”라고 극찬하였다. 경포대는 강릉시 경포로 365번지(거동 94번지)에 소재한 건물로 1971년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6호로, 2013년 경포호와 함께 명승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포대 전면에는 강릉을 대표하는 호수인 경포호와 면하고 있다. 경포호는 본래 명칭을 석호(석호)라고 하여 조선시대에 손꼽히는 호수의 하나였다. 경포호 주변의 경치는 조선시대 관동팔경의 첫 번째로 꼽혔으며, 이곳을 찾은 역대 시인 묵객이 남긴 시문은 조선시대 시문학의 큰 부분을 차지할 정도이다. 조선시대에 경포호 주변에는 경포대뿐만 아니라 16곳 이상의 누각,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경포호 주변은 지형도 바뀌고 생활환경도 크게 달라지면서 경포호 주변에 있던 정자는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여러 정자 가운데서도 경포대는 경포호와 가장 근접한 지점으로 호수 동북쪽 언덕 위 송림 속에 자리 잡고 500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경포대를 처음 지은 시기는 고려말 1326년(충숙왕 1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축(安軸, 1287~1348)이 쓴 경포대기 에는 강원도 안렴사 박숙(朴淑)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김극기가 경포대라는 시를 남기고 있어 건립 시기를 더 올려보기도 하지만 안축의 경포대기에도 “예전부터 정자가 없어 유람하는 자들이 안타깝게 여긴다.”는 내용이 있고, 이곡(李穀, 1298~1351)은 동유기에 “경포대에는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 1326년에 처음으로 건물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건립된 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1508년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현 위치로 이건했다는 이건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사료의 뒷받침이 약하여 이건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는 의견이 더 지배적이다. 적어도 1524년(중종 19) 발생한 산불로 인해 민가를 태웠고, 경포대의 관사(官舍)도 죄다 태웠는데 주방(廚房)만 타지 않은 사실이 있으므로 최소한 1524년 이전부터 현재 위치에 경포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후 중수 기록은 장유(張維, 1587~1638)가 남긴 경포대기 이다. 1628년(인조 6) 강릉부사 이명준이 중수한 사실을 적은 글로 병란을 당한 이후로 점차 퇴락해가기만 한채 복원 고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상황과 이야기하는 자들이 한스럽게 여겨왔다는 분위기를 더해 알려준다. 이명준은 경포대에 올라 탄식하며 누대를 끝내 방치해둔다면 백대에 걸쳐 꾸지람을 받아 마땅하다면서도 백성을 번거롭게 해서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그가 꾀한 계책은 중수 공사를 승려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경포대 중수에 동원된 승려들은 공사비뿐만 아니라 실제 건물도 짓고 단청까지 맡아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이 시기에 중수하면서 사객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온방(溫房)과 양실(凉室)을 철거했다고 한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1628년 강릉부사 이명준이 경포대를 중수할 때 승려들에게 맡긴 구체적인 공사 비용은 얼마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1628년 이명준이 경포대를 중수할 당시 승려들에게 맡겼던 구체적인 공사 비용을 묻고 있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이명준의 경포대 중수와 관련된 내용을 추출한다.

    • 1628년(인조 6) 강릉부사 이명준이 중수한 사실을 적은 글로
    • 그가 꾀한 계책은 중수 공사를 승려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 경포대 중수에 동원된 승려들은 공사비뿐만 아니라 실제 건물도 짓고 단청까지 맡아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이명준이 승려들에게 공사비와 건물 건립, 단청을 맡겼다는 사실은 명시되어 있으나, 실제 금액에 대한 정보는 누락되어 있다.

    • 경포대 중수에 동원된 승려들은 공사비뿐만 아니라 실제 건물도 짓고 단청까지 맡아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을 종합하면 이명준이 승려를 통해 중수를 진행했고 공사비가 지출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그 비용이 구체적으로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공사 비용'에 대한 수치 정보는 문맥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근거 (evidence)
  • 1628년(인조 6) 강릉부사 이명준이 중수한 사실을 적은 글로
  • 그가 꾀한 계책은 중수 공사를 승려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 경포대 중수에 동원된 승려들은 공사비뿐만 아니라 실제 건물도 짓고 단청까지 맡아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이명준이 승려들에게 공사비와 건물 건립 등을 맡겼다는 사실은 언급되어 있으나, 실제 공사 비용이 얼마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는 제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문맥 외부의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