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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Y_20171122025775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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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발행연도
2013
KDC
0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단지 한 가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남한이고 북한이고 좌익이건 우 익이건 진보 세력이건 보수 세력이건 반동 세력이건 간에 한 푼이라도 마음 에 두지 않는 것이 있다면,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한 팔이 잘리고 온몸에 부상을 입은 채로 조국이건 배달민족이건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채 혼자서 버마의 인세인 감옥에 버려진, 자기의 이름조차 잃어버린 사람, 테러범 강민철 아니 강영철의 존재이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에 나는 그를 감옥에서 꺼내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가 저지른 죄를 회개하면서 재생의 기회를 갖도록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쓸모없는 감상이 아니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민족의 어려움을, 그 어리석음과 욕심의 죄과를 혼자 뒤집어쓰고 이름조차 생소했던 나라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는 사람 하나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것을 쓸데없는 감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민족이니, 민주주의니, 통일이니 하는 말을 이야기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 일행 중 선임자였던 진모는 붙잡힌 이후에도 일관되게 묵비권을 행사하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결국 강민철과 달리 진모는 사형 선고 이후 신속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끝까지 북을 배신하지 않고 목숨을 바친 강인하고 무뚝뚝한 진모였지만 식사를 제공하는 사람에게는 영어로 땡큐라고 인사하는 그의 인간적 모습을 이 책은 적고 있다. 강민철이 테러를 준비하면서 탑 아래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 달린 묵주는 북에 있는 좋아하는 여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망 중에 수류탄을 들고 폭발하면서 손이 잘려나갔고 묵주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인간적 연민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필자는 세세한 묘사를 통해 테러리스트들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희로애락의 인간으로 동일화시켰다. 필자 스스로 밝혔듯이 공직에 진출했던 1998년부터 강민철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한국 송환이나 제3국 송환을 위해 다각도로 힘을 썼지만 결국 남쪽은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아니 관심조차 없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화해 협력의 힘이 한반도를 압도했지만 그때에도 강민철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부담일 뿐이었다. 후세인의 제한된 지식에 기초한 역사관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선배의 일 생을 평가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다. 일본이 지배했던 35년의 곱절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이 시점에도 ‘친일파’의 문제가 첨예한 역사의 쟁점으로 남아 있는 이른바 ‘세대’라는 자의적인 구분으로 한 인간의 삶을 도매금으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 시대의 거울인 측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개개인에게 자양분이 되었든 독이 되었든 그들이 섭취한 공통된 시대적 삶의 조건이 있다. 1917년생에서 1924년생이 다수인 이들은 일제말기에 대학생으로 일본군에 ‘강제 지원’ 당한 공통된 경험이 있다. 학병세대는 누구도 성의 있게 주목하지 않는 고아 신세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학병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문제는 역사는 단절과 새로운 시작인가, 아니면 연속적인 발전 과정인가라는 물음과 직결되어 있다. 대만과 한반도에 이어 중국 대륙의 침략에 나선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중국 대륙에 이어 남양군도, 인도, 말레이시아로까지 전선이 확대되자 일제는 절대적인 병력 부족에 직면하게 되고 급기야 식민지 조선에서 병력을 조달하기 위해 징병제와 지원병제도를 도입한다.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된다. 17세 이상, 신장 160cm이상의 소학교 졸업 학력을 가진 조선인 청년들에게 육군특별지원병의 지원 자격을 부여하고 단기 훈련을 거쳐 중국 전선에 배치한다. 이어서 1942년 5월 8일 각 의의 결정을 통해 1944년부터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된다고 발표했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조선인은 대체로 신분 상승을 겨냥한 입영이라고 볼 수 있다. 1944년부터 만 20세 이상의 조선 청년들은 모두 징병의 대상이 되었다. 1943년 10월 1일 당시 조선인 징집대상자는 26만 6,643명이었고 그중 25만 4,735명이 계출했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나온 노래 중에는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부응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만든 노래’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노래들을 일러 ‘군국가요’라 하였다. 유성기 음반이나 음반 가사지에 ‘애국가’, ‘개병가’, ‘시국가’라 표기된 노래들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군국가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 전쟁 이후부터이다. 1937년 6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필름 레코드 인정 규정’을 제정하면서 일제는 음반과 같은 대중 매체를 이용한 선전 정책을 펼쳤고, 그에 따라 음반 회사들은 군국가요 음반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나온 군국가요는 수적으로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중의 호응도 얻지 못했다. 따라서 이윤 내는 것을 가장 주된 목적으로 하는 음반 회사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책에 따라 음반을 내기는 했으나 회사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1937년에 나왔던 군국가요는 조금 나오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근대 대중가요라 함은 보통 광복 이전에 나온 대중가요를 범박하게 지칭한다. 물론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 대중음악의 역사를 볼 때, 초창기 대중가요가 나왔던 광복 이전의 대중가요를 근대 대중가요라 칭하는 것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실상 이 시기 대중가요는 오늘날 대중가요의 초기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대중가요에 대한 의미 부여는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 이유는 본격적인 의미의 대중가요가 일제강점기라는 굴욕적인 역사적 시기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나라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대중가요는 아예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게다가 초창기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는 운동가요와 대척되는 것으로 대중가요를 놓 고 진행된 연구였다. 즉 운동가요는 ‘진실의 노래’이고 대중가요는 ‘거짓의 노래’라는 전제하에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애초부터 대중가요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광복 이전 대중가요에 대한 아카이브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초창기 대중음악에 대한 선행 연구가 어떤 면에서 관념에 기댄 측면이 많았다면, 점차 1차 자료를 중심으로한 실증적인 연구를 이룰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된 것이다. 당시의 음반 가사지가 영인되고 당시의 음원이 복각되면서 실증적인 연구가 가능해졌다. 그에 따라 대중가요에 대한 연구도 상대적으로 많이 이루어졌다. 사실상 이 시기 대중가요 중에는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는 노래가 많다. 어떤 노래들은 여전히 중장년층에 의해 향유되는데, 이는 근대 대중가요의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대중가요는 기본적으로 대중의 호응과 향유에 따라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근대 대중가요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살펴보고, 근대 대중가요의 대표적인 갈래를 알아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근대 대중가요가 지니는 위상과 의미가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일제강점기 당시 군국가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점과 그 배경이 된 정책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군국가요의 등장 시기와 그 원인이 된 정책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군국가요의 등장 시기와 관련 정책에 대한 정보를 문맥에서 추출한다.

    • 군국가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 전쟁 이후부터이다.
    • 1937년 6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필름 레코드 인정 규정’을 제정하면서 일제는 음반과 같은 대중 매체를 이용한 선전 정책을 펼쳤고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할 수 있는 시점과 정책 관련 문구를 선택한다.

    •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 전쟁 이후부터이다.
    • ‘필름 레코드 인정 규정’을 제정하면서 일제는 음반과 같은 대중 매체를 이용한 선전 정책을 펼쳤고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중일 전쟁 발발 시점과 조선총독부의 규정 제정을 연결하여 인과관계를 정리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군국가요는 1937년 7월 중일 전쟁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이는 1937년 6월 제정된 '필름 레코드 인정 규정'을 통한 선전 정책의 결과이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추론된 내용을 바탕으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군국가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 전쟁 이후부터이다.
  • 1937년 6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필름 레코드 인정 규정’을 제정하면서 일제는 음반과 같은 대중 매체를 이용한 선전 정책을 펼쳤고
  •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 전쟁 이후부터이다.
  • ‘필름 레코드 인정 규정’을 제정하면서 일제는 음반과 같은 대중 매체를 이용한 선전 정책을 펼쳤고
최종 답변 (final_answer)
군국가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은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 이후이며, 그 배경은 1937년 6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필름 레코드 인정 규정'을 제정하여 음반과 같은 대중 매체를 이용한 선전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