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산출물 · 도서자료 기계독해

2019년도 문화재위원회 제11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uuid
a636a408-6874-54db-b56f-92684eaf539b
content_id
CNTS-00118870725
doc_id
CNTS-00118870725_43
발행기관
문화재청
발행연도
2019
KDC
6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그 해답은 현 대율리 대청 건물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나, 군위 대율리 대청국가지정문화재 등의 지정 요청 자료보고서 에서 앞의 두 기록에 근거하여 현 대율리 대청 건물은 1632년에 건축된 건물이며 1651년 한 차례의 중수를 거쳐 1705년에 다시 중수된 것으로 해석한 견해는 신뢰할만하다. 1705년 공사 범위를 짐작할 단서는 〈을유년 상량문〉뿐인데, 장인 명단은 모두 5명의 장인 이름만 기록하였다. 이들은 모두 승장으로 공사(工師) 1명, 편수(楄手) 4명뿐이어서 실제 공사가 소규모여서 이들만 기록하였을지, 아니면 이외 다른 공사를 맡은 장인을 누락시켰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승장이 목수의 우두머리인 공사(工師)에서 편수까지를 맡은 점도 흥미롭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부계서당기〉에는 왜 1632년 중건 이전의 내력을 거론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 이를 분명히 밝힐 사료는 없다. 다만 정극후가 글을 쓴 초점은 중단된 공사를 이어 완공시킨 현령 홍재형의 공적을 기록하는데 집중한 것이 아닐까 한다. 향촌에 교육기관을 마련하고 운영하는 일은 행정관들에게도 장려된 업무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현령으로 부임한 홍재형 또한 관심을 기울여 중단된 서당 중창 공사를 마무리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대율리 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오량가로 가구를 짠 초익공계 맞배 집이다. 실내는 사방이 개방된 마루이며 천장 역시 구조재가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처마는 전후 홑처마이며 기와를 덮었으며 기와골 끝은 막새를 사용하지 않고 와구토로 마무리하였다. 간살은 정면 어칸과 좌우 협칸 모두 8자(2,430㎜)인데 툇간은 이보다 2치 가량 넓게 잡았으나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우측 툇간 기둥에 남아있는 홈 구멍과 회벽을 쳤던 흔적으로 미뤄 원래 우툇간은 온돌방이었다가 지금처럼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부계서당기 에 “…마루에 오르고 방에 들어오는 후생들이 밤낮으로 책을 읽고 생각하며…” 라는 구절이 있어 온돌방의 존재는 확인되지만 천장을 설치한 흔적이 보이지 않아 향후 고려할 문제로 남겨둔다. 일부지만 교체되지 않은 기둥을 통해 민흘림 기법으로 치목하고, 우주의 높이가 같아 귀솟음을 두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나 수리하면서 달라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런 문제는 서까래 치목에서도 양상이 유사하다. 현재 걸린 서까래는 말단부를 소매걷이하지 않아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는데 원래부터 소매걷이 기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최근 수리로 인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춘양면은 동과 서쪽 방향의 산지 지형으로 인해 형성된 골짜기에 자리 잡아 북서와 남동 방향으로 길쭉한 모양이며 계곡의 북과 남쪽에 있는 삼동산, 구룡산, 각화산, 왕두산과 옥돌봉, 문수산 등에서 발원한 계류가 모여 천을 이루고 골짜기를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가게 된다. 한수정이 자리한 춘양면 의양리 마을은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 조에 “학봉 김성일의 옛 집안 안동 임하의 몽선각(夢仙閣), 찬성 권벌(權橃)의 옛집인 내성의 청암정(靑巖亭), 정언 권두경(權斗經)의 세거지인 춘양 한수정은 모두 태백산 남쪽 물가에 자리한 이름난 마을이다”라고 기록될 만큼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특히 이러한 절경을 경암(敬巖) 이한응(李漢膺)은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춘양의 물은 태백산 서남 두 계곡으로부터 흘러오다가 남류로 합하여 낙강으로 들어가서 수백 리를 흐른다. 태백산은 신령하고 빼어나며 방박한데 춘양이 그 중심에 처함으로써 그윽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시내가 흐르면서 가경을 이루었다’라고 칭송한 뒤 적연(笛淵)에서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설정하고 「춘양구곡가」를 짓기도 하였다. 체화정은 연지와 관리사 등으로 이루어진 원림으로, 나지막한 산과 암벽을 병풍으로 삼고 정면의 풍산천을 바라보면서 남동향을 하고 있다. 경북지역 누정건축은 강계연변형, 모정형, 지변형, 상정형으로 분류되는데, 체화정은 예가 가장 적은 지변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체화정은 풍산천의 물을 끌어와 연지를 조성했으며, 입수부에 우물을 설치하여 우물의 물이 연못으로 흘러들도록 했다. 연지는 장방형으로 1700년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체화지(棣華池)’ 혹은 ‘삼층도지(三層島池)’ 라 불린다. 연지 내에는 원형의 섬 3개가 조성되어 있는데, 천원지방설 또는 음양론이 관련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3개의 섬은 삼신산(三神山)인 방장(方丈), 봉래(蓬萊), 영주(瀛洲)를 상징한다. 옛사람들은 삼신산을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원천적인 자유를 누리며 영생하는 신선들의 거처로 믿었다고 한다. 따라서 체화정은 조경학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 경주 귀래정은 육각형의 평면 형태를 갖는 정자로 정면 방향은 마루, 배면 방향은 온돌방과 출입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육각정자 중 이러한 공간구획을 갖는 경우는 드물어 그 유래를 찾기 어렵다. 배면 방향에 있는 2곳의 온돌방 측면에는 별도의 문이 각각 설치되어 있어, 수납공간으로 활용된다. 기둥 결구부의 치장수법은 외부는 단순하고 내부는 화려한데 이는 당시 유교적 가사규제가 반영된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건물의 외부는 검소하여 초각없이 직절되어 있으며, 내부는 섬세하고 화려한 수장수법과 격식을 갖춘 정자로 평가된다. 기둥 상부 익공의 결구 방식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익공의 수서는 외부를 향하지만 정자의 기둥 상부에 설치된 익공은 모두 내부를 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귀래정의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 빗반자, 우물반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 육각정의 지붕은 경복궁의 향원정처럼 모임지붕 형태를 나타내며, 팔각정에서는 모임지붕 또는 창덕궁 부용정과 같은 十자형의 형태가 나타난다. 육각정인 귀래정은 모임지붕 위에 합각부를 덧서까래로 올려 마감한 것으로 희소성 있는 지붕 형태를 갖고 있다. 대율리 대청이란 이름은 대율리에 있는 큰마루라는 뜻으로 고유명사인 당호로 보기는 어렵다. 현재 대율리 대청 전면에는 나중에 써서 건 ‘대율동중서당(大栗洞中書堂)’이란 현판이 달려 있지만 동네에서나 문화재 명칭은 대율리 대청이라 부르고 있다. 이 건물은 왜 지었을까. 그 점은 〈부계서당기〉의 제목과 내용에서 이미 명확히 언급되어 있는데, 마을의 후생을 기르기 위한 서당 목적으로 집을 건립한 것을 알려준다. 〈을유년 상량문〉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제목도 서당일뿐만 아니라 본문에도 강습할 서당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두 기록은 모두 이 마을의 서당으로 현 대율리 대청을 지었음을 알려준다. 서당은 향리에서 동몽(童蒙)들을 교육하는 곳(유형원, 반계수록)이라고 지칭하였듯이 향촌인 면리 지역에 건립된 교육시설을 말한다. 조선시대 향촌사회에서 재지사족층은 서당과 서원을 세워 교화의 근원으로 삼았으며, 17세기에는 향촌마다 서당을 설립하고 일반인까지 대상을 확대하였다. 문중활동이 더욱 활성화된 조선후기에는 대체로 족계 창립, 종가와 사당 건립, 누정과 재실 건립, 서원․사우 건립과 운영, 족보와 선조문집 발간, 정려(旌閭) 포장과 추증 등으로 나타나는데 서당(정사)과 학계 마련도 두드러진 문중활동에 속하였다. 함양 안의 광풍루(咸陽 安義 光風樓)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으로 들어가는 금호천의 초입에 위치한다. 이 누각은 옛 안의현 관아의 공식적인 연회나 회의 등을 위하여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의 안의현은 전북 진안, 장수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북부 경남의 주요 읍치 중 한 곳이었다. 그러나 영조 4년(1728) 정희량의 난으로 안의현이 혁파되었다가 영조 12년(1736)에 복현되었고, 정조 12년(1788)에는 다시 함양군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안의(安義) 지역의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옛 안의현의 관아 시설물은 대부분 훼철되고, 유일하게 광풍루만 남아 이곳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광풍루는 안의면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로지르는 남강(南江)과 광풍로의 교차점 모서리에 남서향으로 위치한다. 광풍루의 남동쪽에는 버스터미널을 비롯하여 각종 상가가 위치하고, 북서쪽에는 공터가 자리한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대율리 대청의 1705년 중수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장인들 중 승장과 편수 이외에 다른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 더 있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1705년 대율리 대청 중수 공사에 참여한 장인들의 구성이 승장과 편수 외에 다른 직종이나 인물이 포함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질문의 핵심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1705년 공사 및 장인 명단에 관한 정보를 추출한다.

    • 1705년 공사 범위를 짐작할 단서는 〈을유년 상량문〉뿐인데, 장인 명단은 모두 5명의 장인 이름만 기록하였다.
    • 이들은 모두 승장으로 공사(工師) 1명, 편수(楄手) 4명뿐이어서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기록된 장인이 5명(공사 1명, 편수 4명)이라는 사실은 있으나, 이 외의 다른 장인이 누락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는 문구가 핵심 근거이다.

    • 실제 공사가 소규모여서 이들만 기록하였을지, 아니면 이외 다른 공사를 맡은 장인을 누락시켰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기록상으로는 5명의 장인(공사 1, 편수 4)만 존재하지만, 문맥 자체에서 이 기록이 전체 공사 인원을 모두 포함하는지 아니면 일부를 누락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기록된 인원 외의 존재 여부를 확정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문맥은 기록된 인원 외에 다른 장인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질문에 대해 '예/아니오'로 답할 수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답을 제공할 수 없으므로 답변 불가능 판정을 내린다.

근거 (evidence)
  • 1705년 공사 범위를 짐작할 단서는 〈을유년 상량문〉뿐인데, 장인 명단은 모두 5명의 장인 이름만 기록하였다.
  • 이들은 모두 승장으로 공사(工師) 1명, 편수(楄手) 4명뿐이어서
  • 실제 공사가 소규모여서 이들만 기록하였을지, 아니면 이외 다른 공사를 맡은 장인을 누락시켰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1705년 중수 당시 기록된 장인이 5명(공사 1명, 편수 4명)이라는 정보가 있으나, 이들이 전체 인원인지 아니면 다른 장인이 누락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기록 외의 다른 인물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주어진 정보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