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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통권 제141호201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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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문화재청
발행연도
2016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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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이들 관현맹인의 임무는 앞에서처럼 궁중 잔치 가운데 왕대비나 왕비, 후궁, 공주 등을 위한 내연에서 기녀들의 춤과 노래의 반주를 맡는 것이었다. 그들이 내연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궁중기록화인 『기축년진찬도병』 중 <자경전내진찬>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데, 관현맹인과 장악원 악공들이 대문간에서 가림막 뒤에 혹은 그냥 앉아 기녀들의 춤을 위한 반주 음악을 넣어주고 있다. 이들은 조선후기까지 주로 내연에서 연주했다. 예컨대 영조 20년(1744) 『진연의궤』를 보면, 김진성과 신찬휘, 전득주, 윤덕상, 백봉익 등의 피리잽이, 이덕균과 최덕항 등의 젓대잽이, 최영찬과 박지형 등의 해금잽이, 이필강 등 거문고잽이, 주세근과 함세중 등의 비파잽이, 강상문 등과 같은 초적잽이 등 13명의 관현맹인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세종대의 난계 박연(朴堧: 1378~1458)은 이들 관현맹인의 처우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 13년(1431) 12월 박연은 임금 앞에서 관현맹인의 어려움을 호소한 뒤, 그들에게 더 높은 벼슬을 내리고 일반 관원들처럼 사철마다 녹봉을 주자고 요청한다. 또 그는 이 자리에서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강조했는데, 해당 부분만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자 세종은 이듬해 1월에 박연이 제시한 사항들을 모두 그대로 따르도록 지시한다. 이와 같이 조선 정부는 별도로 관현맹인 제도를 두어 시각장애인의 자립을 유도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는 시각장애인 음악가가 매우 많았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상당수 출현했다. 조선전기 관현맹인 출신의 시각장애인 음악가만 해도 세종 때의 이반, 성종 때의 정범, 김복산, 이마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반은 현금을 잘 타서 궁중에 출입했고, 정범과 김복산은 가야금으로 유명했다. 특히 김복산은 가야금 솜씨가 뛰어나서 성종에게 포상으로 벼슬을 받기도 했다. 이마지도 빼어난 가야금 솜씨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두 번씩이나 장악원 전악(음악감독)이 되었다. 관현맹인 뿐 아니라 장악원 전체의 음악감독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관현맹인 제도는 비록 근대에 이르러 폐지되었지만, 시각장애인 단체의 음악적 전통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단적으로 2005년 ‘한빛예술단’이 창단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2011년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을 복원하여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단체의 음악적 전통이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져 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한국음악은 크게 정악과 민속악으로 나눈다. 이 중에서 개성을 펼치기에 좋은 음악이 민속악임을 누구나 잘 안다. 정악은 엄밀히 말해서 음악(音樂), 즉 소리(音)를 통해서 즐거움(樂)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정악을 예전에는 음률(音律)이라고 했다. 서구식 교육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전, 이른바 음악 교과서가 생기기 전에, 오늘날의 음악에 해당하는 말은 음률(音律)이었다. 률(律)이란 무슨 뜻인가? 법률(法律)이란 말을 생각하면 음률(音律)이란 것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률(律)이란 바로 질서를 뜻한다. 법이 존재해서 세상의 질서에 도움을 주듯, 소리를 통해 개인의 인격을 수양하면서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판소리와 산조는 민속악에서 출발해서 예술적으로 승화된 음악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음률(音律)적인 질서에서 벗어난 음악이기도 하다. 판소리와 산조 이전에도 민속악이 존재했으나 이런 음악은 아쉽게도 크게 예술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 계층만이 즐기는 여흥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음률에 해당하는 가곡(歌曲)만을 ‘노래’라고 했고, 민요와 잡가와 같은 노래를 ‘소리’로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오직 성악 중에서는 가곡(歌曲)만이 음률인 것이었다. 산조를 가리켜 ‘가사가 없는 판소리’라고 한다. 산조는 판소리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그러나 음악적인 자율성은 판소리보다 산조가 더 클 수 있다. 산조는 여러 가지 조성(調性)이 있는데, 연주자의 기분에 따라서 그 부분을 더 많이, 더 길게 탈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산조에는 우조(羽調), 계면조(界面調), 경조(京調, 경드름)가 있다. 우조는 호기 있고 씩씩한 기분이요, 계면조는 슬프고 애잔한 느낌이며, 경조는 밝고 또박또박한 느낌이다. 경조의 경(京)이 서울을 뜻하는 것처럼, 예전 서울·경기지방의 선율을 경드름이라 했다. 산조의 연주자들은 우조, 계면조, 경조를 두루 넘나들면서도 이른바 TPO(Time 시간, Place 장소, Occasion 상황)에 따라 가락을 신축성 있게 연주했다. 그리고 이런 조건을 전제로 산조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드러냈다. ‘허튼 가락’이라고 불린 산조는 개인이 잘 드러날수록 더욱 인정받는 음악이 되었다. 산조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그 이전에 판소리와 같은 성악양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단, 산조는 판소리의 ‘이야기’와 ‘상황’에서 벗어나, 연주자가 융통성을 발휘해 보다 더 자유로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산조음악에는 무슨 류(流)라는 글자가 늘 따른다. 김죽파류, 성금연류 등이 그 예다. 산조는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에 김창조(1856~1919)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다양한 유파가 생겨났고, 그 앞에 모두 개인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판소리도 많은 유파가 있지만 동편제, 서편제 등 지역성이 강조된 것에 반해, 산조는 초기부터 개인의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그만큼 개성을 존중했다는 얘기다. 물론 요즘 산조는 서양음악처럼 악보를 보고 연주하기 때문에 ‘즉흥성’이 들어가기 어렵다. 하지만, 예전의 산조는 기본적인 장단을 지키면서 매우 ‘즉흥적’으로 연주된 음악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흐르는 대로 연주하는 것이 산조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산조는 기본적인 장단과 조성을 전제로 해서 연주자가 매우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다. 아니, 자유자재로 연주할수록 청중이 호응해주었고, 연주자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음악이다. 이른바 정격(正格)보다는 탈격(奪格)이 드러날 때 청중은 추임새로 화답했다. 그렇다고 엉뚱하게 마구잡이로 탈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예술적 경지가 높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탈격의 미’를 만들어냈듯이, 산조음악 또한 그런 것이다. 산조의 꽃은 ‘가야금산조’라고 한다. 산조가 나오기 전까지 한국 악기사에서 가야금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궁중음악에서는 피리와 같은 관악기가 중심이었다. 때론 가야금은 악기편성에 끼지도 못 했다. 선비들의 풍류 음악, 곧 음률(정악)에는 늘 거문고가 함께 했다. 가야금은 산조의 시대를 맞으면서 부각된 것이다. 다른 악기에 비해 넓은 음역(3옥타브)과 가야금 특유의 다양한 기교가 ‘개성’을 부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산조는 가야금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가야금 하면 곧 산조라는 등식이 생겼다. 한국음악에 있어서 산조의 역사는 개성적 연주사의 시작을 알렸다.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로 향하는 음악이 바로 산조다. 산조의 장단 질서에서 빠른 부분(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 등)을 보면 이런 기운을 보다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산조음악을 들으면 그 안에서 자유와 자율을 만끽할 수 있다. 탈격을 통해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조선시대 관현맹인 중 가야금 연주로 유명했던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벼슬을 받았는지 설명하시오.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질문은 조선시대 관현맹인 중 가야금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받은 구체적인 벼슬의 명칭을 요구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가야금으로 유명했던 관현맹인인 정범, 김복산, 이마지에 대한 정보를 추출한다.

    • 정범과 김복산은 가야금으로 유명했다.
    • 특히 김복산은 가야금 솜씨가 뛰어나서 성종에게 포상으로 벼슬을 받기도 했다.
    • 이마지도 빼어난 가야금 솜씨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두 번씩이나 장악원 전악(음악감독)이 되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김복산은 벼슬을 받았다는 사실과 이마지는 장악원 전악이 되었다는 사실은 명시되어 있으나, 정범이 받은 벼슬이나 김복산이 받은 구체적인 벼슬의 명칭은 누락되어 있다.

    • 정범과 김복산은 가야금으로 유명했다.
    • 김복산은 가야금 솜씨가 뛰어나서 성종에게 포상으로 벼슬을 받기도 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이마지의 경우 '장악원 전악'이라는 구체적인 직책이 언급되었으나, 김복산이 받은 벼서의 명칭과 정범이 받은 벼슬에 대한 정보는 문맥 내에서 결합하거나 추론할 수 없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질문에서 요구하는 '가야금으로 유명했던 인물들(복수)'이 받은 '구체적인 벼슬' 전체를 확정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모든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벼슬 정보를 알 수 없으므로 답변 불가능으로 판정한다.

근거 (evidence)
  • 정범과 김복산은 가야금으로 유명했다.
  • 특히 김복산은 가야금 솜씨가 뛰어나서 성종에게 포상으로 벼슬을 받기도 했다.
  • 이마지도 빼어난 가야금 솜씨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두 번씩이나 장악원 전악(음악감독)이 되었다.
  • 김복산은 가야금 솜씨가 뛰어나서 성종에게 포상으로 벼슬을 받기도 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김복산이 벼슬을 받았다는 사실과 이마지가 장악원 전악이 되었다는 정보는 포함되어 있으나, 김복산이 받은 벼슬의 명칭이나 가야금으로 유명한 정범이 받은 벼슬에 대한 정보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질문이 요구하는 모든 인물의 구체적인 벼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외부 지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