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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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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04796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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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047966710_3
발행기관
선인
발행연도
2007
KDC
0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월북 과학기술자들은 대학과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0년대 말 원철로를 대체할 제철 시설의 설계를 담당했고 1956년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과 1959년의 천리마 작업반운동 당시 금속공업상과 로동당 중공업부장을 역임했으며 1961년부터는 3대 과학원 원장까지 역임한 강영창과 비날론을 개발하고 1961년부터 새롭게 설치된 과학원 함흥분원의 초대 원장을 역임한 리승기, 북한 지질학계를 대표하면서 첫 세대교체의 대표주자였던 3대 과학원 부원장 박성욱은 학계와 행정 실무 양쪽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 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1950년대 말에 중공업성 화학공업부장과 화학공업성 부상, 금속화학공업성 부상을 역임하고 1962년부터 초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다가 1965년부터 강영창 뒤를 이은 4대 과학원 원장을 맡았던 오동욱과 1950년대 중반부터 중공업상, 전기상, 전기화학공업상을 역임한 뒤 1962년에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은 김두삼, 1950년대 중반에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한 후 1979년에는 정무원 부총리가 되었던 로태석은 행정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다. 북한 과학기술계가 소련의 영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1957년 말부터였다. 당시 북한 과학원은 소련의 직접적인 도움에 의지하면서 ‘과학발전 10개년 전망계획(1957~1966)’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1956년 7월말부터 시작된 과학발전 10개년 전망계획 작성사업은 소련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진행되었는데, 1956년 11월부터 약 두 달간 북한을 방문한 소련 전문가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비로소 초안 작성작업이 시작되었고 작성이 마무리된 계획의 초안은 1957년 9월부터 약 두 달간 북한 과학원 지도부가 직접 소련을 방문하여 검토받을 정도였다. 이렇게 작성된 전망계획을 전면적으로 재검토, 수정하겠다는 당시 결정은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겠다는 북한 지도부의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었다. 즉 1956년 8월종파사건과 1차 5개년계획(1957~1960)을 두고 소련과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한 북한이 과학기술 차원에서 독자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중공업을 우선 발전시키려는 북한 핵심 지도부의 정책적 의지는 해외원조 축소라는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8월종파사건’이라는 정치적 어려움도 가져왔다. ‘8월종파사건’이란 최창익, 서휘, 윤공흠, 리필규, 고봉기, 박창옥 등 북한 지도부 중 일부세력이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에 대해 반기를 든 사건을 말한다. 이전부터 이들은 김일성 개인숭배 등에 대해 비판을 주로 제기하였지만 실질적인 사건의 원인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이었다.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공업 우선론을 제기하는 김일성 등에 대항하여 경공업 우선론을 제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전후복구사업 추진 당시부터 경제발전노선때문에 김일성 등과 대립하던 이들은 절충형 경제발전노선이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중공업 중시노선이 계속 강화되는 것에 반발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반발심은 당시 새롭게 구성된 소련 지도부와 나눈 교감으로 더욱 증폭되어 급기야 반란으로 터졌던 것이다. 해방 직후 북한 지도부가 제시한 사회 개혁 방향은 소련과 같은 수준 사회주의 개혁이 아니라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 혁명이었지만 경제 운영방법에 대해서는 소련과 같은 ‘계획경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1946년 북한 지역에 처음으로 생긴 중앙 지도조직인 ‘북조 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7년부터 계획경제를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하지만 아직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할 능력이 부족하여 첫해인 1947년에는 1년 단위의 경제계획만 마련한 상태에서 경제활동이 전개 되었고 194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1년 이상의 장기적인 계획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수립하여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공식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한 1948년 이후였다. 1년 단위의 경제계 획을 두 차례 실행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정식으로 국가수립이 선포된 상황에서 제1차 2개년 경제계획(1949~1950)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1950년 6월에 발발한 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전선이 38선 주변에서 고착화되면서 휴전협정이 시작된 1951년 7월까지 전선이 한반도 전 영역으로 옮겨 다녔기 때문에 생산시설의 피해는 극심하였다. 북한의 경우 특히 공업시설의 피해가 컸는데 1951년의 국영 및 협동단체 공업 총생산액은 1949년에 비해 46.6%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연료공업은 8.7%, 야금공업은 8.4%, 화학공업은 7.7%로 감소하여 중공업의 피해가 더욱 컸다. 북한 지도부가 휴전협정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전쟁 피해복구 사업을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의 국민소득은 전쟁 전에 비해 공업은 58.3%, 농업은 76%로 줄어들었다. 노동인력도 대폭 줄어들었는데 1949년에 비해 1952년의 전체 노동자 수는 74.2%로 줄었다. 그중에서 공업부문의 노동자는 60%로 줄었고 건설부문 노동자는 45%까지 줄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과학원의 역할 변경, 구체적인 과학기술 정책 마련, 과학원 지도부의 세대교체로 이어진 북한 과학기술계의 변화, 즉 독자노선의 강화와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 수립은 1956년 12월 이후 시작된 북한의 사회주의 경쟁운동이 변화하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하였다. 1차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시작된 ‘천리마운동’을 노력동원형 대중운동 수준에서 기술혁신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1차 5개년 계획이 적은 투자로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겠다는 ‘저투자 -고성장’ 전략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생산활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개조해야 할 필요성이 높았다. 따라서 새로운 생산 기술이나 생산 설비를 도입하고 작업공정을 개선하여 생산활동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기술혁신운동이 점차 강화․발전되어야 하였고, 이런 변화를 과학기술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을 현장에 파견된 과학원 구성원들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천리마운동 이후 강조되기 시작한 기술혁신운동은 천리마작업반운동이라는 이름과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이란 형태로 전면적으로 시행되었고 그 결과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과학원까지 동원하여 추진된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은 북한의 산업구조를 비롯하여 생산활동 전반을 바꾸어 놓았고 이런 변화는 대안의 사업체계로 이어져 공식적인 공장관리체계(산업관리체계) 속에 반영되었다. 기술혁신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한 과학기술자들은 능력과 함께 사상성까지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이들은 실질적인 생산활동을 책임지는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기사장은 지배인을 대신하여 생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영역을 책임지게 되었고 현장의 과학기술자들은 조선로동당에 당당하게 입당하여 공장당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1956년 8월종파사건의 실질적인 원인은 무엇이며, 이 사건에 관여한 인물들이 주장했던 경제발전노선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8월종파사건의 근본적인 원인과 사건 관련자들의 경제적 입장(노선)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8월종파사건의 정의와 원인, 그리고 관련자들의 성향에 관한 내용을 추출한다.

    • 실질적인 사건의 원인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이었다.
    •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공업 우선론을 제기하는 김일성 등에 대항하여 경공업 우선론을 제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사건의 원인인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과 관련자들의 노선인 '경공업 우선론'을 핵심 근거로 선택한다.

    • 실질적인 사건의 원인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이었다.
    • 경공업 우선론을 제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8월종파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반기를 넘어 경제 발전 방향을 결정하는 주도권 싸움이었으며, 관련자들은 김일성의 중공업 중시노선에 맞서 경공업을 우선시했다는 점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사건의 원인은 경제발전노선에 대한 헤게모니 다툼이며, 관련자들은 경공업 우선론을 주장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명확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실질적인 사건의 원인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이었다.
  •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공업 우선론을 제기하는 김일성 등에 대항하여 경공업 우선론을 제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경공업 우선론을 제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8월종파사건의 실질적인 원인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이다.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람들은 중공업 우선론을 제기하는 김일성 등에 대항하여 경공업 우선론을 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