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남북한은 1945년 분단된 이후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래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여 왔고,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현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남북한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이후 ‘7 4 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6 15 선언’과 ‘10 4 선언’이라는 중요한 합의를 채택하였다. 특히,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에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법적으로 규율할 것을 합의한 최초의 공식 문서였다. 위 기본합의서에서 남과 북은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내부의 특수관계에 있다고 합의함으로써 분단된 현실을 인정하였다. 위 기본합의서는 분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을 위한 기본틀을 제시한 한민족의 기본장전과 통일강령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남북기본합의서는 그 내용을 이행하기도 전에 발생한 북핵문제로 인하여 곧바로 사문화되었다. 2000년 김대중 정부의 ‘6 15 선언’과 2007년 노무현 정부의 ‘10 4 선언’ 때문에 기본합의서는 일시적으로나마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였으나 북핵실험과 인공위성 로켓발사를 이유로 남북관계는 단절됨으로 말미암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위 합의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1) 남북은 1945년 분단된 이후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래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여 왔다. 대한민국은 제헌헌법을 제정하고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했을 당시 대한민국의 영토를 전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하였다. 그렇지만 북한지역은 소련군정이 지배하고 있어 실효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북한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결과 한반도는 남북한의 분단국으로 정립되었다. 그런데 우리 헌법의 규범체계상 북한은 국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1987년에 개정된 우리 헌법 제3조의 규정과 해석에 따르면, 북한은 대한민국 안에서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유하면서 정부를 참칭하며 대한민국에 대립하는 단체, 곧 반국가단체로 간주되고 있다. 북한 또한 1948년 정권 출범 당시 헌법에서 자신의 수도를 서울로 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우리 정부를 ‘미제의 괴뢰정권’ 혹은 ‘민족반역집단’이라 매도하였다. 그래서 남북한은 한반도상에서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에 대해 ‘수복’ 또는 ‘해방’되어야 할 제거대상이라는 정치공세를 펼쳐 왔다.
(2) 그 과정에서 남북한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이후 ‘7 4 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6 15 선언’과 ‘10 4 선언’이라는 중요한 합의를 채택하였다. 즉, 1991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연형묵은『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라 함)에 서명하였다. 이는 사실상 남과 북이 서로의 관계를 법제도적으로 규율할 것을 합의한 최초의 공식 문서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80년대 남과 북의 공식 비공식 협상 과정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요구들이 공식적인 회담의 틀 속에서 수차례 논의되고, 합의서의 형태로 도출된 것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한 이후 북한에서는 이 문서를 김일성 주석의 비준과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의 승인이라는 절차를 거쳐 공식화하는 과정을 마쳤다. 남한의 경우, 북한처럼 공식적인 비준절차를 거치지는 못했지만 남북기본합의서의 법적 효력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규범력을 인정하는 견해가 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3) 통일부가 해설에서 그 의의를 밝힌 바와 같이, 1992년 남북 사이에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발효된 것은 당시 노태우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의 주요한 결실이었다. 이 같은 성과는 당시 노태우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증대된 남한의 국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굳센 신념과 결단으로 강력히 추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이러한 획기적인 대북정책의 전환에 따른 지시에 의하여 남북고위급회담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노대통령과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직전에 발표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구상에 따라 남북고위급회담을 제안하였기 때문에 합의 과정에서 법적 구속력을 부여할 사안이 나오더라도 이에 개의치 않고 남북간의 합의를 성사시킬 강력한 의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8차에 걸친 남북고위급예비회담을 통해 본회담의 의제를 ‘남북간의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다각적인 교류 협력 실시문제’로 포괄적으로 정하였다. 이런 예비회담 절차를 통해 마침내 1990. 9. 4.부터 9. 7.까지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개최되었다. 1차 회담에서 남측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안), 정치 군사적 신뢰구축 방안, 다각적인 교류 협력 실시방안을, 북측은 정치적 대결상태 해소방안, 군사적 대결상태 해소방안, UN가입 구속자 석방 T/S훈련중지의 긴급과제를 의제로 제기하였다. 이 회담에서 양측 수석대표들은 남북고위급회담이 민족사의 진운에 새로운 장을 펼치는 일대 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1990. 10. 16. ~ 19, 평양)에서 남측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수정안),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안)’ 등을, 북측은 ‘남북불가침에 관한 선언’을 제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북측은 회담의 실질적 성과와 관련하여 ‘일괄합의, 동시집행’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1992. 2. 18. ~ 21, 평양)에서는 남북 쌍방이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의 문본을 교환함으로서 발효절차를 완료하였다. 또한, 위 합의와 선언을 위해 ‘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고 서명하였다. 이 자리에서 남측 정원식 총리는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우리측이 남북합의서의 정신을 받들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해 나갈 것을 다시 한번 천명하면서, 귀측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의있고 성실하게 이행해 나갈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라는 기조연설을 하였다. 북측 연형묵 총리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야 보배란 말이 있듯이 아무리 훌륭한 합의를 이룩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실행되어야 빛이 나는 것이지 리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갓 쓸모없는 빈종이장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기조연설을 하였다.
제3차 남북고위급회담(1990. 12. 11. ~ 14, 서울)에서 남측 강영훈 총리는 “남북간에 불가침에 대한 약속이 진정한 가치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첫째로 그것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실천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기조연설을 하였다. 이에 북측의 안병수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여러분 우리가 제기한『북남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이것은 쌍방이 거저 입으로만 말하는게 아닙니다. 우리 전체 7천만 겨레 앞에서 온 세계 앞에서 자기의 실천의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게 절대로 빈종이장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고 발언하였다.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1991. 10. 22. ~ 25, 평양)에서 남측 정원식 총리는 “우리측의 이러한 기본입장은 불가침문제를 해결하되 그것은 결코『선언적인 것』,『정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어디까지나『지켜지는 불가침』,『보장받는 불가침』,『실천하는 불가침』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간에 관계개선이나 화해에 대한 분명한 의지가 먼저 표명되어야 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라는 기조연설을 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발효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당시 정부의 정책과 그 성격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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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남북기본합의서의 채택 및 발효 배경이 된 정부의 정책 명칭과 해당 정책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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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남북기본합의서의 채택 시기와 관련 정부를 확인한다.
- 1992년 남북 사이에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발효된 것은 당시 노태우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의 주요한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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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정책의 구체적인 성격과 추진 동력을 설명하는 문구를 선택한다.
- 당시 노태우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증대된 남한의 국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굳센 신념과 결단으로 강력히 추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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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남북기본합의서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결실이며, 이는 남한의 국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려는 대통령의 신념과 결단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결과임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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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남북기본합의서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주요한 결실이며, 국제사회에서 증대된 남한의 국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신념과 결단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정책적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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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구성한다.
근거 (evidence)
- 1992년 남북 사이에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발효된 것은 당시 노태우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의 주요한 결실이었다.
- 당시 노태우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증대된 남한의 국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굳센 신념과 결단으로 강력히 추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남북기본합의서는 당시 노태우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의 주요한 결실이다. 이 정책은 국제사회에서 증대된 남한의 국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굳센 신념과 결단에 의해 강력히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