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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북한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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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Y_201603100225278281
doc_id
PCY_201603100225278281_23
발행기관
통일부
발행연도
2015
KDC
33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False
문맥 (context)
김일성은 1961년 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사회주의 국가와의 단결, 제국주의 진영에 대한 반대 투쟁, 신생 독립 국가에 대한 접근 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리고 소련을 방문하여 ‘조·소 우호 협력 및 호상 원조 조약(1961.6)’, 중국을 방문해 ‘조·중 우호 협력 및 호상 원조 조약(1961.7)’을 각각 체결함으로써 사실상의 군사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1962년 중·소 국경 분쟁이 격화되자 우방국인 중국 및 소련과의 외교관계에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분쟁 초기에는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중점을 두었지만 1965년 2월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의 방북을 계기로 중·소 양국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외교, 즉 등거리외교 정책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소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의 대부분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하면서 규모도 대폭 축소했다. 대남 관계에서의 우위 확보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국제적 입지 강화를 모색하던 북한은 1966년 8월 ‘내정 간섭과 호상 평등’을 표방한 자주노선을 선언하고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을 비롯한 비동맹국 외교에 본격 나섰다. 북한은 1971년 9월 중국의 유엔 가입과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미·중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고, 일본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 등 주변환경이 변화되자 외교 부문에서의 자주 노선을 견지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실리를 추구하였다. 즉 1960년대 중반 이후 강조하기 시작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원칙을 견지하면서, 선진 자본주의 기술 도입을 목적으로 북한에 호의를 보이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대외관계 개선을 추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북한은 비동맹국 외교도 적극 확대해 나갔다. 그 결과 북한은 노동당 제5차 대회(1970) 이후 제6차 대회(1980)까지 66개 국가와 수교하였으며, 제3세계 지역에서 중·소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 외교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1975년 8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개최된 비동맹회의 외상회의(8.25~30)에서 ‘비동맹회의’ 정식 회원에 가입하였다. 1975년 개최된 제30차 유엔 총회에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서방측과 공산측의 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등 북한의 영향력이 유엔 외교까지 미치게 되었다. 북한은 1980년대 들어 실리외교를 더욱 확대·강화하기 위해 서방외교를 대규모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경제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북한의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 당시 북한경제는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 중공업 우선주의,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 등의 비효율적인 경제정책 수립 및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순 누적으로 장기 경제침체에 진입한 상태였다. 특히 중국의 개혁·개방 선택(1978)과 1980년대 중반 이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한계를 현실로 입증해 줌으로써 북한의 외교노선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로부터 북한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표명한 ‘자주·친선·평화’의 외교 이념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국가, 비동맹 국가, 제3세계 개발도상국,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친선관계에 중점을 둔 외교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친선 및 경제협조 관계에 중점을 두고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1983년 10월 버마(현재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 폭파 사건’은 북한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키고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립을 야기하는 등 외교관계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1990년대 초 북한은 급격한 대외환경의 변화와 경제침체, 국제적 고립 상황이 겹치는 등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미·소 중심의 양극 체제에서 공존 경쟁의 다극 체제로 변화되는 데탕트 분위기에 맞춰 북한의 외교정책도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소련의 붕괴 및 사회주의 진영의 체제이완으로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으며,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는 냉전 시기 이념·체제 관계의 동맹국이던 국가들이 남한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북한에게 불리한 국제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미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모색하였다. 이는 북한의 경제난을 타개하는 한편 국제적 고립에서 탈피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일성 사후 유훈통치 기간(1994.7.8~1998.8)을 거쳐 공식 출범(1998.9)한 김정일 정권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대량 아사 등 체제위기에 직면했다. 따라서 경제난 극복, 대외고립 탈피, 국제사회의 지원 확보를 위해 대외정책 전환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세계 여러 국가와 전방위 외교관계를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최우선적으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한편 전통적 우호 국가인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정상외교도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유럽연합(EU)과의 관계개선,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 국가와의 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전방위 외교 정책을 전개하였다. 2000년대 들어 북한은 ‘핵 카드’를 수단으로 ‘벼랑끝전술’을 구사하는 한편 장거리 미사일 발사, 세 차례에 걸친 핵실험(2006년 1차, 2009년 2차, 2013년 3차) 등 군사적 도발을 통해 긴장을 조성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BDA(Banco Delta Asia)은행 자금동결과 유엔안보리 대북제재(1718호, 1874호, 2087호, 2094호)를 받았다. 북한은 2000년 10월 미국의 클린턴 정부 시기 조명록 차수를 워싱턴에 파견하여 ‘적대관계 종식’ 등의 내용이 담긴 ‘공동성명’과 ‘반테러 공동성명’을 채택하였다. 같은 해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진행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2001년 1월 출범한 부시 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2002년 연두교서)으로 지목하는 등 핵문제를 둘러싼 강력한 대북제재를 받게 되었다. 북한은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중·러 등 전통적 우방 국가와 일본을 비롯한 미수교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등 전방위 외교를 추진하였다. 북한은 2000년대 들어 중국, 러시아와의 정상외교로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을 견제하는 동시에 경제지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김정일의 중국 방문(2000.5, 2001.1, 2004.4, 2006.1, 2010.5, 2010.8, 2011.5, 2011.8)과 장쩌민(2001.9), 후진타오(2005.10) 등 중국 지도부의 방북으로 북·중 관계가 한층 강화되었다. 그러나 시진핑 정권 출범(2012) 이후 중국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동참하는 등 대북 정책이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북한은 2000년 1월 이탈리아와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을 시작으로 2000년 12월 영국, 2001년 3월 독일 등 2010년까지 유럽연합 25개 회원국(프랑스, 에스토니아 제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대외 결제 수단으로 미국 달러화 대신 유럽연합 유로화 사용 결정(2002.12), 유럽연합-북한 간 경협 및 북한 경제 현대화 방안 논의를 위한 워크숍 개최(2004.8, 2005.10, 2007.10-평양), 북한 노동당 대표단(단장: 강석주 당비서)의 독일,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방문(2014.9) 등 북한이 유럽연합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 인권문제 등으로 유럽연합과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북한의 인권문제는 200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북한과 유럽연합의 인권대화를 통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이후 유럽연합이 유엔에서 북한인권 결의안을 주도하면서 북한 당국의 거부로 중단되었다. 이후 제14차 북한과 유럽연합 간 국장급 정치대화(2015.6-평양)에서 논의되었으나 북한의 기존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1960년대 중반 북한이 중·소 양국 사이에서 취한 외교 정책의 명칭과 그 정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1960년대 중반 북한의 외교 정책 명칭과 해당 정책을 선택한 배경을 파악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1960년대 중반과 관련된 외교 정책 및 사건을 추출한다.

    • 1965년 2월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의 방북을 계기로
    • 중·소 양국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외교, 즉 등거리외교 정책을 선택한 것이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정책의 명칭인 '등거리외교'와 계기인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의 방북'을 핵심 근거로 선택한다.

    • 중·소 양국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외교, 즉 등거리외교 정책을 선택한 것이었다.
    • 1965년 2월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의 방북을 계기로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1965년 소련 수상의 방북이라는 사건이 북한으로 하여금 중·소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을 선택하게 만들었음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정책 명칭은 등거리외교이며, 계기는 1965년 2월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의 방북이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명확하고 간결하게 답변을 작성한다.

근거 (evidence)
  • 1965년 2월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의 방북을 계기로
  • 중·소 양국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외교, 즉 등거리외교 정책을 선택한 것이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북한이 선택한 외교 정책은 중·소 양국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외교인 '등거리외교'이며, 이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1965년 2월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의 방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