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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문화재위원회 제11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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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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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TS-00118870725_33
발행기관
문화재청
발행연도
2019
KDC
600
답변 불가 (is_impossible)
True
문맥 (context)
다락의 형태를 지니면서 누각건물의 성격을 갖는 수선루의 평면 형태는 ‘ㅡ’자형으로 누하층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1칸이고, 누상층의 규모도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누하층과 누상층은 규모가 비슷하지만 상하로 연속되는 부분은 중앙의 1칸뿐이다. 정면에서 볼 때 하층의 2칸은 출입 용도로 사용되고, 상층의 2칸은 온돌방과 마루를 두었다. 온돌방의 아궁이는 건물 뒤편에 마련되어 있으며, 마루 칸은 하층 출입 칸 상부 공간까지 확장하여 넓게 사용하고 있다. 수선루는 맞배지붕을 되어 있으며 정면은 겹처마이나 배면은 홑처마 지붕이다. 바위틈 속에서도 절묘하게 지붕을 만들어 놓았는데 전면에서 보이는 면의 지붕에는 일반기와를 얹었지만 그 반대쪽인 안쪽은 넓적한 점판암 돌로 얹어놓았다. 자연동굴의 위쪽에 위치하는 방은 동굴바닥이 내부로 갈수록 높아지므로 마루보다 상대적으로 높게 설치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인 정자건축에서 마루와 방의 바닥 높이가 거의 동일한 것과는 사뭇 다른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방의 바닥이 높아지는 만큼 천장은 높지 않으므로 방의 내부에서는 서 있는 것이 불편할 정도이다. 봉화 한수정은 조선 인종 조에 의정부 우찬성을 지낸 바 있는 안동권씨 판서공파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로부터 그의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 1518∼1592) 그리고 손자인 석천(石泉) 권래(權來, 1562∼1617)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순차적인 과정을 거쳐 가면서 이루어진 정자이다. 이처럼 오랫동안의 과정을 거쳐 건축된 정자의 창건과 중창 및 중건, 중수 등의 내력과 관련된 기록은 문중의 여러 유적에 관해 기록한 석천지(石泉誌)70)와 권벌의 5대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이 지은 「한수정기(寒水亭記)」 그리고 6대손인 강좌(江左) 권만(權萬, 1688∼1749)이 지은 「한수정중창상량문(寒水亭重刱上梁文)」, 「한수정성훼전말사적(寒水亭成毁顚末事蹟)」 등에 자세하게 남아 있다. 우선 「석천지」의 내용을 보면 ‘한수정은 석천정사의 동쪽 사십 리 밖 춘양촌에 위치했으니 순흥(順興)의 속현이며 안동의 접경으로 각화사각(覺華史閣)의 동문(洞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처럼 「석천지」의 개략적인 내용에 비해 건축의 과정을 더욱 정확하게 전하는 내용은 「한수정기」와 「한수정중창상량문」 그리고 「한수정성훼전말사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기록에는 우선 첫 번째로 충재 권벌이 정자의 터를 정하고 창건할 때까지 과정에 대해 기록해 둔 부분이 있는데 그 내용은 춘양의 산수가 수려하여 충재 선생이 1519년 (중종 14) 삼척 부사 재임 시 노부가 계시는 안동을 오가며 중간 휴식지점인 이곳을 별장지로 선정하였고 이후 15년 뒤인 가정(嘉靖) 십삼년 갑오(甲午, 1534, 중종 29)년 그가 밀양 부사로 재임 시 이 일대 토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한다. 그의 아들 청암은 병자(丙子, 1576, 선조 9)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현 한수정에서 남쪽으로 약 백여보 지점에 거연헌(居然軒)이란 집을 건립하였으며 이후 32년 만에 손자인 석천 권래가 만력(萬曆) 삼십육 년 무신(戊申, 1608, 선조 41)년 현 위치에 한수정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한수정기(寒水亭記) 에서는 충재 권벌선생이 한수정 터를 점지하고, 한수정이 창건될 때까지 경과에 대한 기록을 몇 가지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춘양에 농장을 둔 것은 충재선생부터이나 그 때에는 아직 집이 없었고, 청암공 때에 이르러 거연헌을 세웠으며, 한수정은 석천공이 지었다.”리고 기록하고 있다. 한수정은 석천 권래가 창건하였지만, 충재 권벌이 별장지를 생각하였고, 이 유업을 받들어 청암 권동보는 거연헌을, 석천 권래가 한수정을 창건하여 3대에 걸쳐 이루어진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둘째, “거연헌은 마을 사람 임씨가 쓰다가 불을 내서 탔다. 지금 그 터가 한수정 남쪽 백 수십 보에 있다.”는 기록에서 청암 권동보가 지은 거연헌은 현재의 한수정보다 남쪽에 위치했으며, 소실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수정에 대한 형태와 규모 그리고 배치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현재의 한수정과 비교할 수 있는 몇 가지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봉화 한수정은 춘양면 의양리 동촌마을에 있는 정자로 안동 권씨 판서공파 후손인 충재 권벌로부터 그의 아들 청암 권동보와 손자 석천 권래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완성된 건물이다. 위치 선정과 토지 매입 그리고 창건과 중수 및 중건의 내용이 「석천지」, 「한수정기」, 「한수정중창상량문」, 「한수정성훼전말사적」 등의 기록에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어 조선시대 한 문중의 건축 경영의 계기와 과정 등을 실질적인 사례와 함께 찾아 볼 수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정자는 비교적 작은 일곽 내에 초연대와 와룡연 그리고 조경수 등 다양하고 많은 경관적 요소를 갖추고 이들과 어울리면서 합일되는 건물로 짓고자 한 계획적 의도가 읽혀 조경사 연구에도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한수정처럼 수변을 조성한 정자는 닭실마을의 청암정을 들 수 있는데 청암정 역시 청암 권동보가 창건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건물은 안동 권씨 집안의 정자 경영에 담긴 건축 및 조경 철학 및 사고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생각할 수 있다. 한수정의 창건과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은 『석천지(石泉誌)』의 내용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석천지는 유곡마을의 석천정사와 청암정 그리고 삼계서원 등 유곡마을의 유적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부록으로 한수정의 건립 시말과 시문 등을 수록하고 있다. 부록의 서언에서 ‘한수정은 석천정사의 동쪽 사십리 밖 춘양촌에 위치했으니 순흥(順興)의 속현(屬縣)이며 안동(安東)의 접경(接境)으로 각화사각(覺華史閣)의 동문(洞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산중(山中)에 넓은 들판이 열리고 중간으로 큰 시냇물이 흐르며 수석(水石)이 밝고 아름다우니 충정공(忠定公)께서 산장(山庄)으로 장점(藏點)하였으나 미처 집을 짓지 못했던 것을 손자(孫子)인 석천공(石泉公)이 비로써 정자를 세워서 늘그막의 휴식하는 장소를 삼았다.’기록하여 한수정의 위치와 주변의 형세를 개괄적으로 수록하였다. 다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석천지』 내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권벌의 5대손인 창설재 권두경이 지은 한수정기(寒水亭記) 와 강좌江左 권만이 기록한 「한수정중창상량문(寒水亭重刱上樑文)」과 「한수정성훼전말사적(寒水亭成毁顚末事蹟)」이다. 이 내용을 통해서 한수정의 연혁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그 서쪽마을은 도심동(道心洞)으로 시냇물이 흘러나와 남쪽으로 수 십리를 내려오면서 (중략) 처음에는 시냇물이 현(縣) 서쪽 신담소계(新潭小溪)와 합류하여 별장의 북쪽에 이르러 모여지면서 장담(長潭)으로 되었는데”라는 문구에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태백산의 큰 내와 서쪽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신담소계)이 모여지고 있다고 표현되어 있다. 현재 한수정 인근으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운곡천과 서쪽에서 내려오는 작은 냇물 중조천이 합류하고 있으며, 그 모서리 합류지점에 현재의 한수정이 자리 잡고 있어, 석천공이 지은 한수정의 위치는 현재의 한수정 위치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정자는 6칸으로 마루 4칸, 방 2칸이다. 남쪽은 방으로 햇살을 받아들이고, 북쪽은 마루로 구름 머문 산을 바라보기 좋았다” 여기서는 건물의 규모와 향을 언급하고 있는데, 건물의 규모가 현재의 ‘丁’자형 건물과 달리 일자형 건물로 추정되고, 규모도 6칸으로 현재보다 작았음을 알 수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다음 문맥을 읽고 질문에 답하시오.
질문 (question)
거연헌이 마을 사람 임씨에 의해 소실된 정확한 시기는 언제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거연헌이 화재로 소실된 구체적인 시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문맥에서 거연헌의 소실 사실과 관련된 내용을 추출한다.

    • 거연헌은 마을 사람 임씨가 쓰다가 불을 내서 탔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거연헌이 임씨에 의해 불타 소실되었다는 근거는 있으나, 해당 사건이 발생한 연도나 시기에 대한 정보는 누락되어 있다.

    • 거연헌은 마을 사람 임씨가 쓰다가 불을 내서 탔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문맥의 다른 부분에서 권벌, 청암, 석천의 활동 시기는 언급되지만, 거연헌의 소실 시점과 연결되는 정보는 없다.

    • 충재 선생이 1519년
    • 가정(嘉靖) 십삼년 갑오(甲午, 1534, 중종 29)년
    • 청암은 병자(丙子, 1576, 선조 9)년
    • 석천 권래가 만력(萬曆) 삼십육 년 무신(戊申, 1608, 선조 41)년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거연헌의 소실 주체와 결과는 알 수 있으나 시점은 알 수 없으므로 답을 확정할 수 없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음을 결정한다.

근거 (evidence)
  • 거연헌은 마을 사람 임씨가 쓰다가 불을 내서 탔다.
  • 충재 선생이 1519년
  • 가정(嘉靖) 십삼년 갑오(甲午, 1534, 중종 29)년
  • 청암은 병자(丙子, 1576, 선조 9)년
  • 석천 권래가 만력(萬曆) 삼십육 년 무신(戊申, 1608, 선조 41)년
최종 답변 (final_answer)
주어진 문맥만으로는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분석 (analysis)
문맥에는 거연헌이 마을 사람 임씨에 의해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으나, 그 사건이 발생한 구체적인 시기에 대한 정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문맥 외부의 추가적인 역사적 기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