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2012년에는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던 적이 있다.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현재는 생가터와 실학박물관등 정약용 유적지가 잘 조성 되어있다.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윤소온(해남 윤씨, 조부 윤두서, 부친 윤덕렬)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네번째 아들이었다.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정약용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홍문록에 올랐는데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뒤늦게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간것은 생활고 때문이었으며 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3품)까지 지냈다.
<heading>가문의 내력 </heading>
본관은 압해(押海)였다. 지금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하는 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해있었기에 나주 정씨로도 불렸다. 조상들은 고려 말에 황해도 배천에 살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서울로 이주했다. 11대 조부 정자급(丁子伋)이 승문원 교리를 지낸이래 8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정수강, 병조 판서를 지낸 정옥형,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정응두, 대사헌을 지낸 정윤복,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호선,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정언벽, 병조 참의를 지낸 정시윤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평소 팔대옥당(八代玉堂)이라 하며 학문명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고조부 정도태(丁道泰), 증조부 정항신(丁恒愼), 조부 정지해(丁志諧)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heading>언문습득 </heading>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부친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형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녹암 권철신으로부터 사사했으나 정약용은 부친의 가르침 이외에 독학하였다. 이가환, 이승훈과 교류하게 되면서 이익의 학문을 접했으나 유작을 통해서 사숙(私淑)했을 뿐이다.
네살에 천자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 '바다'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다.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냈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삼미(三眉)라는 별명은 어릴 적에 걸렸던 천연두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개 생겼다는 뜻이다. 아홉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열살때 경서와 사서를 모방해서 작문한 글이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고 한다.
1777년(15세) 화순 현감이 된 아버지를 따라가서 화순현 북쪽에 있는 동림사에 가서 형 정약전과 함께 서책 학습에 매진했다. 1782년,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 한 후 과거공부에 전념하였고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매달 치르는 시험과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旬試)에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서 책과 종이와 붓을 상으로 하사받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0세가 되던해인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죽는다.
<heading>성균관 </heading>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 사건이 벌어졌을때 모함을 받아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heading>천주교와 인연 >> 천주학 입문 </heading>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으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연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성호 이익 문하에서 학습하여 학문적 명성이 자자한 권철신과도 연을 맺게 된다. 또한 이들이 천주학과 서양학문을 많이 연구하는 터라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이를 접하게 되었다. 권철신이 주도하여 1777년과 1779년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여러날에 걸쳐 서학교리 강습회를 열었는데, 정약용은 이벽, 정약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학문적 호기심에 서양학문과 함께 천주학을 접했다. 1784년 4월에 큰 형수의 제사에 참여했다가 귀경하면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책을 여러권 탐독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천주교와의 인연은 곧 악연이 되어 훗날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heading>명례방 사건 </heading>
1784년,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후 천주교인이 되었다. 정약용도 이 모임은 참여하였다. 그러던중 1785년 초에 포졸들에게 이 비밀모임이 발각되어 형조에 끌려가는 명례방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 중인신분인 역관 김범우만 투옥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양반출신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사망하였고 이벽은 그의 부친과 갈등끝에 식음전폐하다 죽었다. 이승훈은 가문의 압박속에 배교했으며 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출신들이 모두 떠나자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이때 정약용도 일시적이나마 배교했으나 훗날 천주교인들과 은밀하게 교제를 재개했다.
<heading>반회사건 </heading>
1787년(정조 11) 10월경,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서 정약용은 이승훈, 강이원 등과 은밀히 천주교서적을 연구, 토론하였다. 이 당시 조선에는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이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는데, 충청도 지방의 산골마을에까지 천주교 서적이 보급되어 있었다. 아울러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서적을 색출, 소각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반회사건이 발생한 직후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명했다. 정약용은 정약전과 함께 아버지 말씀을 따랐으나 정약종은 천주학을 내려 놓치못했다.
<heading>신해박해 </heading>
그동안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지난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극형을 명한후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서적을 소각하여 불온한 서양사상의 전파를 차단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 사건을 정쟁화하며 사건을 증폭시켰으며 남인들 조차 공서파와 신서파로 분열하였다.
한편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로 낙인이 찍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러나 윤지충과 친척이었던 관계로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집안내에서도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이번 사건 발생직후 배교를 했으나 셋째형 정약종은 반회사건과 신해박해로 전국이 소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제사참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조용히 지나가는듯하던 사건은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 체포의 기회를 놓쳤는데, 이는 포도대장의 경솔함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한 의혹이 있어 보이니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이가환·정약용이 주문모 도주사건에 연류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노론 벽파의 공세가 빗발치자 정조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는데, 결국 1795년 7월 25일에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청지역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이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 천주교에 심취했었던 과오를 속죄하고 지방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내린 초치였다. 정약용은 무려 7품계나 떨어지며 체면이 몹시 구겨졌다. 그러나 정약용이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펼친 노력은 실효를 거두었고 충청지역 천주교계의 거물인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도 세웠다.
<heading>신유박해 >> 정조의 급사 </heading>
형조참의를 제수받아 재직하던 중에 대사간 신헌조가 형 정약전을 부당하게 탄핵하자 '자명소'를 올리고 1799년 7월 26일에 사직하였다.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1800년 초에 낙향하여 마재에서 지내던 중 6월 28일에 정조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급하게 상경하였다. 국장을 치루는 동안에 독살설 등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며 어수선해지자 정약용은 처자를 마재으로 내려보내고 홀로 서울에 머물면서 정국을 살폈다. 겨울에 주상의 졸곡(卒哭)이 지나자 낙향하였고, 오직 초하루와 보름날 벼슬순서에 따라 차례로 열을 지어 곡하는 곡반(哭班)에만 참석하였다. 그 나머지 시간은 고향집에서 경전을 읽으며 지냈다.
<heading>숙청 작업 </heading>
염려했던대로 어린 순조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가 1801년 음력 1월 10일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며 남인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 오가작통법을 적용하고 역율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전국에 떨어졌다. 정순왕후는 과거에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어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었기에 정조가 즉위한후 집안은 몰락했고 오라비 김귀주가 귀양지에서 사망하며 정조와는 원수지간이었다. 이런 정순왕후의 목표는 정조때 성장한 남인을 몰아내고 재기하지 못하도록 박멸하는 것이었다. 선왕 정조는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 남인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좋은 명분이 되었다.
노론 벽파의 최우선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젊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의 가문이 조상때부터 있었던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으로 이가환은 노론벽파가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었다. 이가환은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며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노론 벽파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이가환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heading>구속과 석방 </heading>
정약용은 가슴 졸이며 지내던중에 셋째형 정약종이 서적과 서찰등을 숨기려다 관아에 적발되어 모두 압수당했다는 소식을 1월 29일에 접하였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월 8일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국문장에서 단지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뿐이었기에 이미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노론 벽파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2월 11일에 정약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밖에도 이승훈, 최창현 등 많은 이들이 투옥되었다.
<heading>말년 </heading>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는 것이었다.
<heading>결혼 >> 장인 홍화보 </heading>
1776년 2월 22일에 무관 홍화보의 여식인 풍산 홍씨와 혼인하였다. 장인 홍화보는 몸이 마르고 키도 작은편이었으나 용맹스러운 무신(武臣)으로 호탕한 성품에 병법에 밝았다고 한다. 1771년에 황해도 장연부사로 있으면서 병영을 설치하여 청나라 해적선 퇴치에 공을 세운바 있다. 영조 51년(1775)에는 승지로 제수되었는데, 이는 무인이 승지가 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조 4년(1780)에는 영남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바 있다.
<heading>청렴하고 평등한 경제 </heading>
다산의 사상을 연구하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에 의하면, 다산 선생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소득불평등을 풀어가고자 했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을(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노약자, 어린이,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으로써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heading>과학기술 </heading>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해 거중기를 고안하였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친인척 관계이기도 하다.
<heading>평가 </heading>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 그리고 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선생(茶山)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라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저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정약용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대부분이 한문으로 썼으며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도 한문을 사용했다. 국어교육학 박사인 김슬옹은 '우리문화신문'에 기고를 통해, 정약용이 철저히 한글을 외면했음을 지적하며, 사상의 위대함이 표현과 소통의 위대함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또한 정약용 역시 성리학과 실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양반 사대부였음을 비판하였다.
<heading>저서 >> 3대 저서 </heading>
정약용은 한자가 생긴이래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저술한 500 여권의 책중에 이른바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힌다.
<heading>기타 >> 세계기념인물(UNESCO) </heading>
정약용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장자크 루소와 헤르만 헤세가 함께 선정됐다. 2012년이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
<heading>노론의 적개심 </heading>
생전 500여권 이상의 저작들을 출간하였다. 저작들의 대부분은 유배생활 19년간 집필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까지도 노론계 인사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을 혐오하였다. 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고, 윤치호는 노론계 인사들이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노론은 정약용이 죽은지 130년이 지난 뒤에도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다.
<heading>[[홍국영]]과의 관계 </heading>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가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조부)뻘이 된다. 홍이상의 둘째 아들 홍영(1584년생)과 넷째 홍탁(1597년생)은 13년 나이차였고, 홍영의 증손자 홍중기(홍만용의 아들)와 홍탁의 손자 홍만기가 동갑이었고, 홍탁의 손자 홍만기는 40세가 다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봤다. 홍중후는 1687년생으로 8촌인 홍중해(홍국영의 고조부), 홍중기(혜경궁 홍씨의 증조부)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 차이가 난다. 따라서 같은 친척임에도 항렬차가 많이 나게 되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정약용이 주장한 경제 개혁의 핵심 방향과 그가 지향했던 사회적 가치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
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정약용의 경제 개혁 방향(속성)과 그가 추구한 사회적 가치를 묻는 질문이다.
-
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경제 개혁에 관한 내용과 애민사상에 관한 내용을 본문에서 추출한다.
- 다산 선생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회경제적 약자들을(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노약자, 어린이,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으로써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
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경제 개혁의 방법론인 '공렴'과 사회적 가치인 '애민사상'을 핵심 근거로 선정한다.
-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회경제적 약자들을(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노약자, 어린이,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
-
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경제 개혁의 수단(공렴)과 목적(애민을 통한 복지국가 지향)을 연결한다.
-
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정약용은 공렴을 통해 경제를 개혁하고, 애민사상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국가를 지향했음을 도출한다.
-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회경제적 약자들을(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노약자, 어린이,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으로써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
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맞춰 경제 개혁 방향과 사회적 가치를 정리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
- 애민(愛民)사상
최종 답변 (final_answer)
정약용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를 통해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정약용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인 공렴으로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하고 애민사상으로 사회경제적 약자를 배려하여 복지국가를 이루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