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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개 사건 document_id A220623087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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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개 사건은 생체 실험 찬반을 놓고 1903년에서 1910년 사이 영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논란이다. 1903년 스웨덴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런던 대학교 의학대학 생체 실험 강의실에 난입한 사건으로 촉발되었고, 이후 1906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이 동상을 건립하자 의대생들은 동상 파괴를 위해 경찰과 충돌하였다. 논쟁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번졌고, 영국 정부가 동물 생체 실험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심의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영국 전역을 찬반으로 갈라놓는 “코즈 샐레브르”(cause célèbre, 유명한 쟁점)이었다. 1903년 2월 런던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윌리엄 베일리스는 60명의 학생들 앞에서 갈색 테리어에 대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 스웨덴 출신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이 생체 실험이 불법이라고 여겨 강의실에 난입하였다. 베일리스와 조수들은 개가 충분히 마취되어 있었다고 했지만, 활동가들은 개가 분명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저항하였다고 말했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는 이 생체 실험이 잔혹하고 적법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개를 이용한 생체 실험으로 세크레틴을 발견한 저명한 생리학자이었던 베일리스는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1906년 반생체실험협회는 배터시에 갈색 개를 추모하는 동상을 세웠지만, 의대생들은 그 동상에 표시된 선동적 문구에 격분하였다. 동상에는 "영국의 남녀들이여, 얼마나 이런 일을 계속하게 두려는가?"라는 문구가 달려 있었다. 의대생들은 계속하여 동상을 파괴하고자 하였고, 결국엔 경찰이 "반견주의자"로 불린 이들의 습격에 대비해 24 시간 내내 동상을 경호해야 하였다. 1907년 12월 10일 1천여명의 의대생들이 지팡이마다 갈색 개 모형을 매달고 런던 한 가운데를 지나 4백명의 경찰과 여성참정권론자,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지키고 있는 동상 앞에서 충돌하였다. 이 일은 "갈색 개 폭동"이라 불린 여러 충돌 가운데 하나였다. 1910년 3월 배터시 의회는 동상을 철거하기로 의결하였다. 4 명의 노동자가 경찰 120 명의 호위를 받으며 동상을 철거하였고, 2만 건이 넘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동상을 대장간에 보내어 녹였다. 70년이 지난 1985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은 새 동상을 배터시 공원에 설립하였다. 1997년 피터 메이슨은 옛 동상에서 녹인 청동이 보행자 안전 펜스로 쓰였는데 펜스 위에는 "개 금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썼다. <heading>배경 >> 1876년 동물학대 방지법</heading> 19세기 당시 생리학자들의 연구는 종종 비난을 받았는데, 널리 알려진 클로드 베르나르 역시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베르나르는 아내에게 "생명 과학이라는 가장 반짝이는 방에 들어서려면 길고 섬뜩한 부엌을 지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이러한 비난에 불쾌감을 드러내곤 하였다. 아일랜드 페미니스트 프랜시스 파워 코브는 1875년 런던에서 전국반생체실험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에는 영국 생체 실험 퇴출 조합을 설립하였다. 전자는 생체 실험에 대한 규제를 목적으로, 후자는 퇴출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법의 핵심은 마취 없이 생체 실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물 한 마리에 대해서 단 한 차례의 실험만이 허용되었으나, 동일한 실험의 일부로 인정될 때에는 몇 차례까지도 연장하여 실험할 수 있었다. 실험이 끝난 뒤엔 실험이 실패하였다 할지라도 사용된 동물을 죽이도록 하였다. 법률 위반에 대한 고발은 오직 내무성 장관에게 할 수 있었으나, 갈색 개 사건 당시 내무성 장관인 애러터스 애이커스-더글라스는 생체 실험 반대론자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heading>어니스트 스털링과 윌리엄 베일리스 </heading> 20세기 초 런던 대학교 생리학 교수 어니스트 스털링과 그의 매형이기도 하였던 윌리엄 베일리스는 개를 이용한 생체 실험을 통하여 신경계가 이자의 분비물을 조절한다는 이반 파블로프의 가설을 검증하였다. 베일리스는 1890년 생체실험 자격을 획득했고 1900년부터 생리학 강의를 했다. 1905년 스털링은 그리스어 호르모(ὁρµάω, 촉진(또는 흥분)시키다)를 어근으로 삼아 호르몬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호르몬은 세크레틴과 같이 아주 작은 양으로도 생체 기관의 작용을 촉진시키는 물질을 말한다. 스털링과 베일리스는 1899년에 마취된 개를 이용한 실험으로 창자의 연동 운동을 발견하기도 하는 등 생체 실험을 통해 많은 생리학 가설을 검증하였다. <heading>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와 라이자 샤르타우 </heading> 1903년 4월 여성주의 활동가이자 생체실험 반대론자였던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Lizzy Lind af Hageby)와 라이자 카터리네 샤르타우(Leisa Katherine Schartau)는 스털링과 베일리스의 강의실로 뛰쳐 들어갔다. 두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 린드 아프 하게비의 아버지는 스웨덴 대법원장을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는 스웨덴 국왕의 시종이면서 영국 첼튼햄 여자대학의 교직원이기도 하였다. 샤르타우의 아버지는 스웨덴군의 대위였다. 이들은 당시의 일을 담은 목격담을 일기로 기록하였고, 훗날 과학의 도살장: 두 생리학도의 일기에서 발췌로 출간하였다. 두 여성은 갈색 개의 생체 실험 동안 강의실에서는 웃음 소리가 났다고 기록하면서 해당 장의 제목을 〈재미〉라고 지었다. 이 제목은 명예훼손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갈색 개는 6 Kg 가량 나가는 짧은 털의 테리어 혼종이으로 1902년 12월 이미 개복되어 췌장관을 결찰하고 관찰하는 생체실험 대상이 된 바 있었다. 그 뒤 우리에 넣어져 1903년 2월에도 또 다시 생체실험을 당했고, 두 스웨덴 여성이 뛰쳐 들어온 당일에도 생체실험을 위해 강의실에 놓였다. 스털링은 법정에서 학생들이 강의실에 도착하기 전에 이전의 실험 결과를 확인하고자 개복하였으며 시간은 45분쯤 걸렸다고 증언하였다. 개복이 완료된 후 베일리스의 강의를 위해 겸자로 개복부를 닫아두었다. 베일리스는 그날 개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였으며 6가지 약물을 혼합한 A.C.E 혼합제를 기관지를 통해 투여하여 마취하였으며 마취를 유지하기 위한 관을 실험대 아래쪽으로 연결하여 두었다고 주장하였다. 두 스웨덴 여성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들은 개가 충분히 마취되지 않아 의식이 있었고 실험대 위에서 일어서려고 하였으며, 심지어 실험실에는 마취제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생들은 개가 약하게 몸을 비틀긴 했지만 저항하는 움직임을 없었다고 주장했다. 60명의 학생을 앞에 두고 베일리스는 반 시간 가량 신경에 전기 자극을 주면서 강의하였다. 두 여성은 일기에 갈색 개의 실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위 기록은 반복되는 실험이나 불충분한 마취를 금지하는 동물학대 방지법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일기는 또한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학생인 헨리 데일이 개를 죽였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heading>테펀 콜리지의 연설</heading> 메이슨에 따르면 콜리지는 법률이 허용하는 예외 때문에 기소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대신하여 그는 1903년 5월 1일 전국반생체실험협회의 연례 모임에서 분노에 찬 연설을 하였다. 그는 피카딜리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에 모인 2 - 3천명의 청중을 향해 이 사건을 과학자들이 행한 고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이것이 고문이 아니라면, 베일리스 씨와 그의 친구들은 .... 우리에게 무엇이 고문인지를 신의 이름을 걸고 얘기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더 데일리 뉴스에 연설 전문이 실렸다. 더 데일리 뉴스는 1846년 찰스 디킨스가 창립한 급진적 논조의 언론이었고 하원 의원 페더릭 밴뷰리를 통해 공개적인 생체실험을 금지할 것을 청원중이었다. 베일리스는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5월 12일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다. 어니스트 스털링은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주간 의학 잡지로 콜리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더 랜센트는 "법률 위반으로 판명될 경우 ... 스털링 교수에게도 여파가 있을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콜리지는 두 여성에게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는 일기를 공표하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들은 1903년 7월 코번트 가든의 어니스트 벨을 통해 일기를 출판하였다. <heading>일리스 대 콜리지 >> 재판 </heading> 재판은 1903년 11월 11일 왕립재판소에서 열렸다. 대법원장 리처드 웹스터이 재판을 진행하여 4일 후인 11월 18일 마무리되었다. 영국 의학 저널은 이 재판을 "최대 중력의 실험 사례"라고 불렀다. 베일리스 측의 변호인 루퍼스 아이작스는 스털링을 첫 번째 증인으로 신청하였다. 스털링은 법률을 위반하고 두 차례에 걸쳐 실험하였다고 인정했지만, 두 마리의 개를 희생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베일리스는 당일 아침 일찍 개에게 1.5 그레인의 모르핀을 주사하였고, 6 온스의 알콜, 클로로포름, 에테르 혼합 마취제를 개의 기도와 연결한 삽관을 통해 투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베일리스는 삽입한 관이 깨지기 쉬워 개의 머리를 고정하였다고 말했다. 베일리스 측의 증인으로 나선 네 명의 학생(남성 셋과 여성 한명이었다)은 개가 의식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heading>판결 </heading> 재판 후 데일리 뉴스는 4개월에 걸쳐 콜리지의 비용에 대한 모금 운동을 벌여 5,700 파운드를 모금하였다. 베일리스는 자신의 피해 배상금을 유니버시티 컬리지 런던의 연구 자금으로 기부하였다. 데일리 슈스가 베일리스에게 그 돈을 “스테펀 콜리지 생체실험 기금”에 기부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베일리스는 이를 무시하였다. 2004년 발간된 그래쳐의 책에 따르면 베일리스의 기부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물을 구입하는데 쓰이고 있다고 한다. 더 타임즈는 만족스러운 판결이었다고 평하면서도 의대생들이 보인 훌리건 행위를 비난하였다. 썬, 스타, 데일리 뉴스 등은 콜리지를 지지하며 부당한 판결이라고 평했다. 1903년 린드 아프 하게비는 동물 보호와 반생체주의 협회를 창립하고 책을 복간하였다. 과학의 도살장은 이후 1913년의 제5판까지 출간되었다. 논란이 되었던 장 〈재미〉는 〈갈색 개의 생체실험〉으로 제목을 바꾸어 생체실험과 재판 과정을 서술하였다. 소설가 토머스 하디는 이 책 한권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방문객들이 보도록 하였다. 역사가 힐다 킨에 따르면 1908년 연구 보호 협회가 창립되어 반생체실험 캠패인에 맞서 로비를 벌였다고 한다. 소설은 명예훼손 재판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쓰였으며, 책이 출간되자 콜리지는 3천권을 주문하였다. <heading>생체실험에 대한 2차 왕립 심의회 </heading> 1906년 9월 정부는 생체 실험에 대한 2차 심의회를 개최하였다. 심의회는 청문을 통해 과학자들과 생체실험 반대론자의 의견을 들었고, 1906년 12월에는 사흘 동안 어니스트 스털링을 불러 청문하였다. 심의 보고서의 공표는 매우 늦게 이루어져 1912년 3월에야 이루어졌는데 그 사이 심의 위원 열 명 가운데 둘은 몇 차례의 병환 끝에 사망한 뒤였다. 애초 두 명이었던 상임 조사관은 네 명으로 늘어났고 보고서의 분량은 139쪽이었다. 보고서는 생체 실험 동안 동물을 마비시키기 위해 쓰이는 독성 물질인 쿠라레의 사용 규제, 실험 실패를 의미한다고 할 지라도 고통 받은 동물에 대한 안락사 의무화, 그리고 척수 절개술에 대한 확고한 정의 등을 규정하였다. 보고서는 또한 동물학대방지법의 개선을 위한 세부 사항들을 장관에게 조언하였는데, 이는 1986년 동물에 대한 과학적 실험에 관한 법률에 의한 동물과학실험위원회 설치의 근간이 되었다. 개는 죽음을 맞았다. 또 다시 생체실험대에 올려졌구나. 232 마리의 개가 생체실험을 당했다. 재판이 끝난 뒤 세계생체실험반대연맹의 창립자 애너 루이사 우드워드(Anna Louisa Woodward)는 120 파운드의 기금을 모아 공공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위에는 청동으로 갈색 개를 조형하였는데, 조각가 조지프 화이트해드가 제작하였다. 기념비는 2.29 미터 크기의 돌로 만들어져 사람과 개, 말 모두에게 식수를 제공하는 샘물가에 세워졌다. 기념비에 새겨진 명판은 또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1910년 뉴욕 타임즈는 이 문구에 대해 "생체실험 반대론자들의 신경질적이고 상투적인 언어"이며 "모든 의료 종사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평하였다. 랜스버리는 자신의 책에 기념비가 세워진 배터시 규역을 프롤레타리아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집합소로 묘사하면서 늘 자욱한 연기가 뒤덮혀 있는 빈민가라고 하였다. 이들은 생체실험 반대 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가 1896년 개원한 배터시 종합병원은 앨버트 브리지 길과 웨일스공 로가 교차하는 모퉁이에 있었는데 1972년까지 운영되었다. 이 병원은 1935년까지 생체실험을 거부하였으며 이와 관계된 의사는 고용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배터시 지역에서 이 병원은 "안티비브"(antiviv, 반생체실험(anti-vivisection)의 줄임말)나 "올드 안티"(old anti)로 불렸다. 1860년 창립하여 1871년 배터시로 이전한 뒤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동물보호단체 배터시 도그즈 앤 캣츠 홈(Battersea Dogs & Cats Home)의 1907년 당시 의장이었던 윌리엄 캐번디시-벤틴크는 버려진 개들을 구입하겠다는 생체실험 연구실의 제안을 "끔찍할 뿐만아니라 황당한 일"이라며 거부하였다. 배터시 의회는 래츠메어 놀이 공원을 기념비 설치 장소로 제공하고 매 주당 6-7 펜스의 임대료를 받았다. 1906년 9월 15일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기념비의 제막식이 열렸고, 조지 버나드 쇼와 아일랜드 여성주의 활동가 샤롯 데스파르(Charlotte Despard)가 연설하였다. 몇몇의 학생들이 배터시에 있는 런던 남서부 경찰서에서 즉결 심판을 받았고 치안 판사 폴 테일러는 이들에게 벌금 5 파운드를 부여하였다. 이 사건은 방아쇠 역할을 하여, 이후 두 달 동안 천여 명의 의대생들이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런던의 여러 의대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은 지팡이에 작은 갈색 개 모형을 매달고 거리를 행진하며 실물 크기의 개 모형을 끌고 다녔다. 의대생들은 "폴 테일러를 신 사과 나무에 매달러 / 우리는 행진한다네"라고 소리쳤다. 더 타임즈는 이들이 개 모형을 불태우려 했지만 실패하자 템지 강에 던져버렸다고 보도하였다. 여성 참정권론자 모두가 생체실험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란 점을 알면서도, 의대생들은 여성 참정권 모임을 공격하였다. 1907년 12월 5일에 밀리센트 포우셋이 주최한 여성 참정권 모임은 책상과 의자가 날아다니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이날의 사건에 대해 "의대생들이 여성을 상대로 용감히 싸우다"라고 보도하며 비꼬았다. <heading>1907년 12월 10일 </heading> 의대생과 여성 참정권자가 충돌한 후 5일이 지난 1907년 12월 10일 목요일, 백여명의 의대생들은 갈색 개 동상을 끌어 내리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옥스퍼드 대학교와 캠브리지 대학교가 해마다 벌이는 럭비 시합 당일에 맞추어 일을 벌였는데, 거기에 모인 군중을 선동하여 동상을 템즈강에 버리려고 하였다. 이들은 드라팔가 광장에서 선동하여 2-3천 명의 군중을 모았다. 거기서 보리라, 우리의 습격을. 작은 갈색 개, 이 싫은 것. 오후가 되어 시위대는 곧 바로 배터시의 동상으로 향했지만 도로가 봉쇄되어 갈 수 없었다. 의대생들은 그 대신 생체실험을 반대하는 배터시 종합병원을 습격하려 하였지만 그 마저도 가로막혔다. 이 와중에 학생 한 명이 전차 위에 올랐다 떨어지자 노동자들은 "갈색 개의 복수다"라고 외치며 그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거부하였다. 영국 의학 저널은 아무리 생체실험 반대 병원이라도 군중들은 인도적인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고 비판하였다. 두 번째 학생 그룹은 백파이프를 연주하고 갈색 개 모형을 흔들며 런던 중심가로 행진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보호하였다. 천여명의 시위대가 트라팔가 광장에 도착하여 400 여명의 경찰관과 15명의 기마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대는 넬슨 기념탑을 둘러싸고 자리잡아 연설을 하였다. <heading>이상한 연대 </heading> 한 달이 넘게 여기 저기서 폭동이 일어나는 사이 의대생들과 수의생들이 연대하였다. 1906년 12월 11일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가 주최한 생체실험 반대 집회는 백여명의 학생들이 난입하여 의자를 집어 던지는 통에 무산되었다. 데일리 클로니클은 "분노에 찬 린드 아프 하게비 양이 남겨진 뒤로 집회장엔 아름다운 ‘달걀’들이 가득했다. 한 학생은 ‘양말이나 갈아 신어!’하고 외쳤다."라고 보도하였다. 집회장의 가구는 부서졌고, 참가자들의 옷은 찢겼다. 뉴잉글랜드 대학교의 수전 맥휴가 동상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을 때, 거기엔 다양한 정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동상 앞에서 방어진을 갖추고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가,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여성 참정권 주의자들이 배터시에서 의대생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여성 참정권자들은 남성 노동자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서 어떤 환대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수전 맥휴는 그들 앞에 "갈색 테리어 개가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남성 과학도들이 있었고 이 하나만으로 그들 모두가 단결하는 데 충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와 샤롯 데스파르는 이 사건을 여성주의와 마초의 대결로 바라보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학자 코럴 랜스버리(Coral Lansbury)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 참정권 운동이 생체실험 반대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의 부위원장 가운데 4분의 3이 여성이었다. 랜스버리는 갈색 개 사건이 여성의 생체실험 반대 운동 참여를 가져온 상징적 사건이라고 보았다. 생체실험을 위해 실험대 위에 묶여 있는 개의 이미지는 브릭스턴 교도소에 수감된 여성 참정권 운동가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혹은 여성 히스테리를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되었던 난소나 자궁 척출과도 겹쳐졌다.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영국의 역사학자 힐다 킨은 스웨덴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젊은 여성이었고 반체제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과학자들에 대해 구체제의 유물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했고, 수전 해밀턴은 그들이 고등 교육을 받았기에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점은 "새로운 형태의 증언"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랜스버리는 의대생들이 자신들 스스로와 그들의 선생들을 "새로운 사제"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여성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미신과 감성주의를 대변한다고 여겼다고 쓰고 있다. <heading>종결 </heading> 동상의 경호 비용이 연간 700 파운드에 달하게 되자 영국 하원은 경찰 당국에 비용의 타당성을 질의하였다. 런던 경찰 당국은 배터시 의회에 이를 전달하였고, 훗날 배터시의 시장이 되는 당시 시의회 의장 존 아처는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배터시는 이미 22,000 파운드의 비용을 들여 경찰을 지원하고 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영국의 개보호협회는 배터시가 연구소들을 허가하고 있는 한 연구소에게 이 비용을 청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제안자는 더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보호가 용이하지 않으면 반생체실험 병원의 부지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영국 의학 저널은 이에 대해 "배터시의 집 잃은 개가 갈 곳이 없다면 해머를 들고 명판에 쓰인 그대로 죽임을 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들이 너무 감상적이라면 의심할 바 없이 마취한 상태에서 이를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배터시 의회는 계속되는 논쟁에 지쳤다. 1909년 11월 선거 이후 새롭게 구성된 의회는 동상의 철거를 결정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500여 명의 동상 지킴이가 출범하였고, 2만 명 이상의 시민이 시의회에 탄원서를 내었으며, 1910년 2월에는 런던 중심가에서 1,500 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시위에는 린드 아프 하게비, 샤롯 데스파르, 그리고 자유주의자 조지 그린우드 등이 하이드 파크에서 연설하였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개 가면을 쓰고 집회에 참석하였다. 열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상은 1910년 3월 10일 철거되었다. 시 의회는 120명의 경찰관의 호위 속에 4 명의 노동자를 보내 동상을 철거하게 하였다. 3천명의 생체실험 반대론자들이 트라팔가 광장에 모여 동상의 복구를 주장하였지만, 시의회는 이를 거부하고 사건을 종결하였다. 동상은 처음엔 자치구 감정인의 집 자전거 창고에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1956년 그의 딸이 영국 의학 저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날 갑자기 동상이 공장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뒤 동상은 대장간에서 녹여졌다. 생체실험 반대론자들은 고등법원에 동상 반환을 청구하였지만 1911년 1월 기각되었다. <heading>새로 세운 동상 </heading> 1910년 3월 뉴욕 타임즈는 "동상이 다시 공공장소에 세워질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1992년 베터시 공원은 역사적인 이전의 동상을 기념하여 새 동상을 공원의 공식적 일부로 인정하였고, 이와 더불어 생체실험 반대 캠페인 역시 새로운 활기를 띄게 되었다. 1994년 공원은 동상의 위치를 보다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원 내의 우드랜드 워크로 이전하였다. 2003년 힐다 킨은 자신이 보았던 옛 동상은 지금의 것과 같이 자비를 구걸하는 비굴함을 보이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갈색 개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던 초기 동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사라졌으며, 이후에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1906년 건립된 갈색 개 동상의 철거 과정과 그 이후의 역사적 변화를 시간 순서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

    • 1906년 반생체실험협회는 배터시에 갈색 개를 추모하는 동상을 세웠지만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동상의 철거 시점, 방법, 그리고 철거 후의 처리를 추출한다.

    • 1910년 3월 배터시 의회는 동상을 철거하기로 의결하였다.
    • 의회는 동상을 대장간에 보내어 녹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동상의 소멸 과정과 재건립에 관한 핵심 정보를 선별한다.

    • 1910년 3월 10일 철거되었다.
    • 동상을 대장간에 보내어 녹였다.
    • 70년이 지난 1985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은 새 동상을 배터시 공원에 설립하였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초기 동상의 철거(1910년) -> 녹임 -> 70년 후 새 동상 설립(1985년)의 시간적 흐름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초기 동상은 1910년 3월 배터시 의회의 결정으로 철거되어 대장간에서 녹여졌으며, 70년이 지난 1985년에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에 의해 새 동상이 배터시 공원에 다시 세워졌다.

    • 1910년 3월 10일 철거되었다.
    • 의회는 동상을 대장간에 보내어 녹였다.
    • 70년이 지난 1985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은 새 동상을 배터시 공원에 설립하였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따라 철거 과정과 이후의 재건립 과정을 통합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1910년 3월 10일 철거
    • 대장간에 보내어 녹였다.
    • 1985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은 새 동상을 배터시 공원에 설립
최종 답변 (final_answer)
1906년 세워진 갈색 개 추모 동상은 1910년 3월 배터시 의회의 의결에 따라 철거되었으며, 이후 대장간으로 보내져 녹여졌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1985년에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에 의해 배터시 공원에 새로운 동상이 설립되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갈색 개 추모 동상은 1910년 배터시 의회의 결정으로 철거되어 용해되었으나, 이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에 의해 새로운 동상으로 재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