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육우당(六友堂날짜=2020-02-13, 한자=尹賢碩, 1984년 8월 7일 ~ 2003년 4월 26일)은 대한민국의 학생 운동가 출신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 시민운동가이자 시조 시인, 작가, 평론가이다.
<heading>주요 이력 </heading>
아마추어 연극 배우이자 성악가이기도 했던 그는 2003년 4월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동성애자의 인권을 요구하며 목을 매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2004년 2월 대한민국의 청소년 보호법에서 동성애를 유해단어에서 삭제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어, 2004년 4월 20일 대한민국 국무회의에서 동성애는 청소년 보호법의 유해 단어와 인터넷 금지 단어에서 삭제되고, 4월 29일 동성애는 음란물 지정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시발점이 되었다. 본명은 윤현석이고, 육우당(六友堂)은 그의 아호 이자 가명이고, 필명은 설헌(雪軒), 미동(美童), 동화(童花), 항아(姮娥), Catholic84 등이며, 천주교 교명은 안토니오이다. 인천광역시 출신이다.
중학교 재학 중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자각, 중,고등학교 내내 학생들의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다 2000년 12월 고교를 자퇴하였다. 그는 시조시인이 되기를 원했고, 동성애자에 대한 대한민국의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였다. 학생 시절부터 시와 작문을 시작, 2002년 1월에는 정식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한편 2001년 1월부터는 동성애 커뮤니티 및 동성애자 단체를 청소년 유해 매체로 지정해야 한다는 여론에 맞서 동성애 혐오를 비판, 동성애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객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2001년 홍석천, 하리수 등의 고백 이후 홍석천, 하리수 등을 격려하며, 이들을 지지하는 카페들을 개설, 운영하였다. 2001년에는 서울의 모 극단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성악과 연극을 지도받았으나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탈퇴하고, 2002년 5월경 경기도 부천시의 다른 극단으로 들어가 연습하였다.
2002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동성애자인권연대(약칭 동인련)에 가입하여 학생 운동가로 활동을 시작, 2003년 청소년 보호법 제정 시 서울에서 동성애 혐오단어, 금지단어 지정 반대 운동, 동성애자 차별 철폐 운동, 소수자 차별 철폐 운동 등을 벌였다. 2003년 3월부터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상근 직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반전 평화운동,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그해 4월 5일과 4월 7일 동성애자에 대해 소돔과 고모라라는 비난과 인신 공격이 계속되자 이를 비판했고, 4월 26일 그는 "아비규환 같은 세상이 싫다"며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나를 받아줄 것이다” 는 구절을 남겼다. 당시 그는 6장의 유서와, 34만원의 현금 그리고 묵주를 유품으로 남겼다. 작품 활동으로는 시조와 평시, 가사 등을 창작했고 시조동호회와 문인단체의 회원이었으며 직접 청소년 시조, 시인 모임인 화랑을 조직하고 카페 매니저로도 활동했다. 사후 2006년 4월 유작 <내 혼은 꽃비 되어>가 출간되었다.
사망 직후 동성애자도 사람이라는 주장과 반대 견해가 팽팽히 대립하였다. 4월 29일 동성애가 음란물에서 지정 해제되고, 사후 1년 뒤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심의기준에서 동성애 조항은 삭제되었다., 부평에서 성장하였다. 본명은 윤현석이었으나 필명인 육우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녹차와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를 자신의 여섯 친구로 여겼다 하여, 스스로 필명을 육우당이라 하였다. 또한 사춘기때부터 우울증에 시달려왔다.
그는 시와 소설 등을 창작, 작문하여 일기와 수첩 등에 기록해두다가 1999년 인터피아98(interpia98.net)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자신의 글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홈페이지는 각종 악플과 해킹 등의 테러로 2002년 폐쇄되었다.
<heading>청소년기, 정체성 갈등 </heading>
2000년 3월 그는 인천 세일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재학 중 연극부에서 활동했고, 하교 후에는 학원 외에도 직접 극단을 찾아가 연기 지도를 받기도 했다. 시인 외에도 연극 배우와 가수에도 관심있었던 그는 나중에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에도 극단에 찾아가 연극 강습을 받았다. 또한 중학교, 고등학교 재학 중 성악부에서도 활동했으며, 카운터 테너로 주로 활동하였다.
그는 초등학교 재학시 까지도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 ‘이반’(동성애자)임을 자각한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부터였던 것 같다. 묵주를 가장 좋아할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더 고민스러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등학교 시절은 성적 지향 때문에 학교 생활도 평탄치 않았다.' 하였다.
주변 사람에 따르면, 그는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고등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잦아지자 부모는 그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게 했다. 그는 1∼2주일에 한 번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았다." 라고 썼다.
작문과 시 짓기를 좋아했던 그는 다음, 네이버에 화랑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다년간 운영하였다. 그러나 2003년 3월 24일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상근활동자가 되기 전 카페를 폐쇄하려 했지만 폐쇄는 아깝다는 카페 회원의 반대로, 카페 운영자직을 넘겨주었다. 또한 홍석천의 커밍아웃 이후 그를 지지하는 모임과 홍석천 팬클럽 등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문학, 역사 등의 서적을 읽었고 그 중에서 안네의 일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인상깊게 읽었다 한다. 특히 그는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 프랑크가 자신의 일기장에 키티 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한 것을 두고, 한때 안네 프랑크를 정신병자로 여겼다고 했으나, 후일 그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고 하였다.
<heading>고등학교 재학과 자퇴 </heading>
세일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2001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잠실 근처에 있는 모 극단에 들어가 강습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일부 단원들의 기피와 구타, 괴롭힘 등으로 2001년 8월 서울의 다른 극단으로 옮겼다가<!--극단 칼레오--> 다시 2002년 5월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심곡3동에 있던 다른 극단으로 옮겼다.<!--믈뫼 극단--> 동시에도 틈틈이 작품활동을 하면서 시를 지었다.
그는 시조 창작 활동과 함께 인터넷상에서 동성애를 질병, 유해단어로 규정하려는 일부 기독교인 회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2001년 그는 홍석천의 커밍아웃 이후 소수의 팬들 및 동성애자들과 함께 다음에 홍석천 팬카페를 하나 조직하여 운영했다. 그러나 그가 창작 활동 및 극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카페 활동이 어려워졌고, 2002년 카페를 다른 회원에게 넘기고 탈퇴하였다. 고등학교 무렵에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이 동급생들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일부 친구들은 그를 괴물 취급하며 기피하였다. 자원봉사와 각종 봉사활동 등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멸시와 폭언과 수근거림은 계속되었다. 학교에 자신의 정체성이 알려진 뒤 자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 뒤 자리를 잡기 힘들어 많은 고민을 해왔었다. 그의 어머니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대학 가서 공부해야 한다”며 아들의 성적 정체성을 인정했다. 이어 2001년 5월 다음커뮤니케이션 내 동성애자 카페 '81CLUB'과 세이클럽(sayclub.com) 내 동성애자 동호회 '조금만 사랑했다면' 등이 폐쇄조치되었다. 그러자 그는 인터넷에서 동성애자 카페, 커뮤니티 폐쇄 주장에 맞서, 폐쇄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단어, 유해매체로 지정하려는 것은 곧 상류층과 기득권층이 성을 무기삼아 대중을 통제하려는 일련의 행동이라 봤다. 성매매, 동성애 등을 성범죄로 취급하고 엄벌을 가하는 것은 성적 억압으로, 성 문제에서 자유로운 상류층, 기득권층이 성을 통해서, 성으로 민중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성적 억압을 깨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돈 없으면 사랑도 마음대로 못하는 시대가 오리라고 전망했다.
2002년 3월 14일 서울행정법원 제11부(재판장 한기택)는 게이 웹커뮤니티 '엑스존(http://exzone.com)'url=http://exzone.com)'/ 운영자가 엑스존을 청소년유해매체로 결정하고 고시한 행정처분이 무효임을 확인해달라는 청구를 기각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부터 동성애와 동성애 관련 모임을 음란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하려는 일부 기독교계의 주장에 반대하여 이들을 논박하기도 했다. 육우당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범죄로 몰고 가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모든 동성애자가 아무 사람을 보고 음흉한 성욕을 품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는 시조 짓기와 가사, 작문 짓기, 학교에서 규정된 봉사활동 시간 외의 노인 요양원과 고아원 자원봉사활동 등의 활동을 병행하였다.
2001년 홍석천의 커밍아웃과 하리수 성전환 등이 방송과 언론에 공개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악플 등이 쏟아졌다. 육우당은 홍석천의 커밍아웃과 하리수 등을 지지, 격려하며,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라,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며 악플러들과 논쟁하였다. 동시에 2001년 1월 초 그는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카페와 하리수를 응원, 격려하는 카페들을 다음 넷에 개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등학생이었고, 학업 문제 및 미성년자 문제, 성악, 연극 활동, 시조 짓기와 작문 등 작품 활동 등으로 카페 운영이 어려워 수개월 후 다른 회원에게 카페들을 양도하였다. 그 밖에 그는 시조와 일반 시를 짓는 카페인 화랑 카페를 네이버에 개설하였으나, 화랑 카페 역시 자주 접속이 어려워 다른 회원에게 양도하였다. 이때 그는 허난설헌에서 호를 따서 난설헌이라 하다가 줄여서 설헌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그밖에 실명으로도 인터넷과 각종 뉴스 매체에 의견, 덧글 등을 남겼다.
<heading>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논객 활동 </heading>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상경하여 자취하면서 아르바이트와 노동으로 생계를 계속 하였다. 2002년 그는 고등학생으로 있을 때 동성애자인권연대에 발을 들였다. 이후 성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동인련의 인터넷 회원으로 후원 활동만 하다가 후에 거리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 무렵 알게 된 한겨레신문 대기자 곽병찬이 그에게 육우당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동료들은 그의 본명보다는 시조시인으로 사용하던 '육우당'이란 필명으로 그를 기억한다. 시조시인, 작가 활동 초기에는 설헌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육우당이라는 아호로 더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죽기 전까지 실명을 공개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그는 게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가 오히려 비토와 왕따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2002년 12월 졸업을 몇달 앞두고 세일고등학교를 자퇴하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당시 연극반에서 활동했던 그는 2002년 12월 고등학교 자퇴 직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로 올라가 서울의 극단에 가입하여 연기 강습을 받았다.
인터넷 회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2002년 12월 31일 동성애자인권연대 송년의 밤에 처음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무실에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 하여 휘경동 근처의 서울 동대문구의 한 자취방으로 독립하였다.
그는 스키니진에 딱 붙는 재킷을 즐겨 입었다. 한번은 곽이경이 하고 온 귀걸이를 탐내며 “나한테 줘”라고 떼쓰기도 했다고 한다. 성격도 밝고 쾌활했다. 송년회에서 먹을 걸 권하는 사람들의 말에 “제 깜찍한 위장이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는데요”라고 받아쳤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 동성이든 이성이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는 것을 범죄처럼 취급하는 금욕주의 역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심각한 폭력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프리챌 등의 소설방 커뮤니티에도 시와 단문 등을 작성하여 올렸다. 한편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일부 선배 문인들의 옹호에도 그는 심리적 좌절감, 주변의 수군거림 등으로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그가 게이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을 읽지도 않고 비판과 욕설을 가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 시간이 흐른 뒤에나 시인으로서, 작품으로서 평가받으리라 전망하였다.
2002년 11월 그는 설헌이라는 필명으로 커밍아웃 후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살한 오세인의 추모시를 지어,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 및 시조동호회 등의 카페에 직접 올리기도 했다. 본래 난설헌이라는 필명을 잠시 사용하다가 다시 설헌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허난설헌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시를 짓고 작문을 할 때만큼은 뭔가 모를 희열을 느낀다고 하였다. 시조 시인과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창작, 동성애자 인권 운동, 반전 평화 운동과 함께 스스로 생계를 준비하면서 대학 진학을 꿈꾸었다. 그는 투잡을 뛰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존재를 말하며 피로를 견뎌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의 꿈은 좌절되었다.
<heading>인권 운동, 시민 운동에 참여 >> 청소년 보호법 수정 운동 </heading>
2002년 고등학교 재학 중 동성애자인권연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그는 청소년 보호법이 발의될 때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 단어로 지정하는 것을 비판, 이를 수정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7조의 청소년 유해매체 심의 기준에 동성애를 유해 단어로, 동성애자 카페, 커뮤니티를 유해 매체로 지정했다. 그는 해당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성소수자 운동에 그는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이를 비판, 반박하며 성적 소수자가 죄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그는 글과 칼럼 등을 통해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는 동인련 토론방에 올라오는 수많은 질문과 논쟁, 특히 종교와 관련된 토론에 지치지 않고 답변했다.
2002년 12월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서울 동대문구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편견과 배타성에 찌든 좁은 바닥이 숨막혀서 서울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자취 초기에는 다른 성소수자 친구들이 생활비를 지원하였으나, 그는 다른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며 그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200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기간에도 그는 아르바이트로 하루를 보냈다. 2003년 1월, 그는 서울의 한 게이바(동성애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3월부터 그는 인터넷 실명제나 네트워크 감시 시스템 제정 반대 운동에도 참석하였다. 육우당은 인터넷 실명제와 네트워크 감시 시스템을 사실상의 검열이라 규정했다. 그는 인터넷 실명제가 범죄예방, 악플 예방보다는 국민들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리라고 전망하였다.
그는 결국 사회적 편견에 좌절,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평소 육우당은 동성애자도 사람이라며,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동성애가 금지 단어에서 해제될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2003년 3월 그는 죽기 전에 “(내가) 죽은 뒤에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라는 말을 지인에게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성 소수자를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무서운 발언이라 하면서도 그들에게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가호와 사랑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heading>차별 철폐 운동에 참여 </heading>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2002년 서울의 동대문과 명동성당, 마포·영등포의 성소수자 모임 등을 방문, 노동자 집회에도 참가하였고, 성노동자 권리 보호 운동, 성매매 여성들의 성매매 불법화 반대 운동 등에도 동참하였다. 그는 성매매 역시 정당한 노동이라는 의견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장애인 차별 반대 운동에도 동참하였고,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장애인 차별은 비인간적인 행동이라며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스스로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이를 두고 언론인 곽병찬은 "성노동자·장애인·이방인을 더 감싸고 사랑했던 예수의 뒤를 따르고자 했지만, 교회는 앞장서 그에게 돌을 던졌다."며 차별과 억압, 통제를 당연히 여기는 일부 기독교인에 대해 저항하였다.
육우당은 학벌 사회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그는 학력 차별, 출신 학교 차별 등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그는 인터넷의 칼럼과 글 기고를 통해 출신 학교나 학벌로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하였다.
2001년 11월 30일에는 학벌사회, 학력차별을 풍자하는 시 차별가를 지어 발표하였다. 그의 시 차별가가 발표되자 한때 차별받아온 저학력 노동자들의 호응이 있었다. 육우당은 인간에게 앞선 세대의 지식, 지혜를 가르치고 생존 방법을 익히는 곳이 학교이고 이상과 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곳이 대학인데, 지금의 학교와 대학들은 신분을 나누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 학교에서 이탈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날 것이고, 학교에 등교한다 해도 수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이탈은 필연적이라고 전망했다. 그에 의하면 학교는 그냥 인간에게 최소한의 지식과 학문을 전달하는 기관이 되어야 하지, 학교가 신분, 위계서열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노동자 집회, 장애인 차별 반대 집회, 성노동자 인권 집회, 반전 평화 집회에도 항상 참석하였다.
2003년 3월 26일에는 동대문구 혜화동 로터리 버스정류장에서 개최된 장애인 차별 철폐 집회에 참석하였다. 3월 29일 오후 3시에는 종묘공원에서 개최된 장애인 차별 반대 민중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동인련 회원 곽이경 등과 함께 서울 동대문 시장을 찾아 무지개 깃발을 만들기 위해 색색의 천을 사기도 했고, 그 천을 들고 당시 최대 이슈였던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도 참가했다. 그 깃발을 들고 반전집회에 나가던 날, 육우당은 남은 빨간 천을 “예쁘다”며 몸에 둘렀다. 그리고 동성애를 유해 매체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육우당은 청소년보호법상 ‘동성애자 차별조항’의 삭제를 권고했던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을 누구보다 반겼다. 그는 동성애를 유해 매체, 유해 단어로 지정한 것이 인권 침해라는 결정과 유해매체, 유해단어 삭제 권고를 환영한다는 칼럼을 기고하였다. 이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4월 7일 ‘국가기관이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를 권장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때문에 유황불 심판을 받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일부 언론사도 인권위를 비난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heading>생애 후반 >> 신앙 포기와 회심 </heading>
2003년 4월 5일 당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성명을 냈다. 성명서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동성애자를)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로 심판해야 한다”고 했다. 청소년 보호법 시행령 7조의 ‘(청소년) 유해매체 심의 기준’에서 ‘동성애’를 명시한 조항이 헌법상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반발한 성명이었다. (레 18:22, 20:13, 롬 1:27) 인권위는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육우당은 즉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이 지옥에 떨어질 죄악이냐고 항변하였다. 또한 그는 성을 금기시하는 문화는 사실 기득권자들이 성 도덕을 무기삼하 아랫것들을 통제하려는 야비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육우당에 의하면 인간의 성, 성적 지향을 혐오스러운 것, 기피 대상으로 본다면 왜 결혼을 하고 자녀를 임신해야 하느냐, 그것 역시 타락이고 범죄가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방송에서는 육우당의 주장을 외면하였고, 일부 기독교 언론에서는 비난 사설과 칼럼을 쏟아냈다. 일부 언론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로 심판해야 하고, 창조질서에 어긋나며 에이즈를 퍼뜨린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이어 기독교 단체들과 기독교 인사들은 시국성명서를 발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국가와 사회를 지탱해 나갈 가정의 붕괴뿐만 아니라 에이즈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배태하고 있는 '동성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선교적 접근과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4월 7일 육우당은 인터넷 카페와 언론, 조인스 디국 등에 성이 잘못된 것이라면 결혼과 출산도 범죄가 아니냐,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라는 내용이 있는지 근거를 대라고 반박했다. 또, 육우당은 동성애와 에이즈 전염은 전혀 상관이 없다며,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퍼뜨리는 것처럼 악의적으로 매도한다고 항변하였다. 그는 이성애자들 중에서도 성관계를 통해 에이즈가 전파되는데 어떻게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만들어 유포시키는 것처럼 왜곡하느냐고 분개했다. 4월 8일 그는 동대문 시장에서 헝겊을 구입, 이라크 자이툰 파병철회 집회에 쓸 대형 무지개 깃발을 손수 제작하였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만든 무지개 깃발에는 "Stop the war!"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십자수를 잘 하던 육우당이 직접 바느질로 새긴 것이었다.
4월 11일 육우당은 여섯 친구 중 ‘묵주’와 절교를 선언했다.
그의 글은 4월 14일자 한겨레신문 지면 신문의 사설로 소개되었다.
윤군은 자살전 한기총의 반박성명에 큰 충격을 받아 유서에 ‘평소 동성애자로서의 삶도 힘들었는데 이제 소돔과 고모라, 하느님의 유황불 심판까지 들어야하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라고 썼다. 그는 또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이 나라가 싫고 이세상이 싫다’ ‘동성애자인권연대는 나 같은 이들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동성애자의 차별을 없애는 데 힘써달라’고 하였다. 그는 "죽으면, 이젠 내가 동성애자라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서에 마지막 글귀를 남겼다. 또 “형, 누나들의 수고가 다음 세대 동성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몰지각한 편견과 씹스러운 사회가 한 사람을 아니, 수많은 성적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반 성경적인지.. 6장의 유서에는 그가 동성애자로서 겪었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특히 성적 소수자들을 죄악시하는 기독교에 대한 깊은 원망 또한 담겨 있었다. 그는 사무실 책상 위에 써놓은 유서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한국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 밝혔다. 평소 그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왜 죄가 되어야 하느냐며,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짐승 취급을 받은 것이 너무 서럽고 마음이 아프다고 거듭 호소했다. 유서에서 그는 자신이 죽어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성 소수자들이 마음껏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하였다. 그는 유서에 "난 여러분들이 유황불 심판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도 '하느님의 자녀'니까요"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나를 받아줄 것이다” 는 구절을 남겼다. 'NEIS 중단' 각계각층 1천인 선언문이 작성되자, 그는 동성애자인권연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에 동참하고, 반대 성명 발표에 참석하였다.
<heading>최후 </heading>
2003년 4월 26일 저녁 혹은 오후 3시 5분경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E빌딩 3층 305호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구 사무실)에서 자살하였다. 현장에는 그가 마셨을 참이슬 소주 2병과 눈물에 젖은 휴지들, 책상 위에 놓은 6장의 유서와 마지막 기부금 34만원이 놓여 있었다. 그의 시신은 4월 27일 아침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사무실 문 고리에 목을 매달고 앉은 자세로 숨진 채 발견됐다.', '사랑하는 형, 누나들의 한번의 노력이 다음 세대의 동성애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발견했다. 그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죄 취급을 받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밖에 육우당은 시조의 부흥과 시 쓰는 문화, 가사 문학의 부활을 염원하였다.
<heading>사망 직후 </heading>
그의 시신은 바로 부검을 마친 뒤, 동대문구의 성 바오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가 성 소수자라는 점과 그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언론, 방송에서는 의도적으로 육우당의 죽음을 언급하지도 않고, 보도하지 않았다. 국민일보 등은 육우당 사망 관련하여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육우당의 죽음을 성토하는 성 소수자들의 기고문과 항의문은 방송, 언론에서 철저히 외면당했고 지역신문에서도 사회정서를 이유로 거절당했다. 일부 언론사에서는 그의 빈소에 취재도 외면, 거부하였다. 4월 27일 오후부터 각 대학 모임과 동성애자 단체들, 인권단체에서 조문단이 찾아왔고, 그날 오후 성 바오로 병원 영안실에 있던 시신은 7시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빈소가 차려졌다. 4월 28일에 연합뉴스 기사를 인용한 YTN과, 또다른 취재 기사, 그의 빈소를 유일하게 취재한 SBS 서울방송의 보도를 통해 보도되었으나 해당 기사는 일부 기독교 단체의 항의와 청소년에게 동성애를 조장한다, 동성애를 미화한다, 자살을 조장한다는 항의 전화들이 YTN와 SBS 서울방송 게시판에 빗발치면서 YTN과 SBS등 몇몇 방송이 보도한 기사들 중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곧 삭제되었다. 바로 E빌딩 건물주는 나가줄 것을 요청, 4월 27일 오후 3시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강당 건물을 빌려 동인련 활동가들과 시민단체, 인권단체 대표자들, 육우당의 지인들이 모여서 장례를 치루기까지의 문제와 언론대응 향후 대책 논의 등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를 발견한 정욜 당시 동인련 대표는 "사무실에 짐을 정리하러 갔는데, 그가 혼자 마셨을 것 같은 술과 그 전날 함께 먹던 컵라면 그릇 등이 그대로 있었다. 목을 맨 끈과 가방도 있었다"며 생생하게 그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한편 당시 동성애자인권연대에는 성 소수자들에 대한 악플과 폭언이 달려 홈페이지를 당분간 폐쇄하였다. 사무실은 건물을 내달라는 건물주의 요구에 따라 동대문구 휘경제1동 E빌딩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2003년 4월 27일 빈소가 차려진 서울 청량리 성 바오로 병원에 영구가 도착,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들은 빈소를 지켰다. 이제 막 20대의 문턱에 도달한 윤 씨의 앳돼 보이는 영정을 대하자마자, 이들은 오열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일보의 김모 기자는 육우당의 유서와 수첩에 기재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취재하던 중, 염모, 민모 등 그의 친구들의 성적 정체성까지 추궁하다가 논란꺼리가 되기도 했다. 그밖에 육우당의 유서에 쓰인 전화번호 및 핸드폰번호, 육우당의 핸드폰 번호에 있던 전화번호로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 게이인지 아닌지 확인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각 방송과 언론사에서 성바오로 병원에 마련된 그의 빈소를 방문했는데 KBS 방송사 기자들 다음으로 기독교 언론 K일보 기자가 빈소에 찾아왔을때, K 일보에서 동성애자를 비판하는 글과 사설을 계속 실었으므로, "K일보가 동성애자를 죽였다"라며 오열하던 성 소수자 인권운동가들과 마찰이 벌어지기도 했다.
4월 29일 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보건의료단체연합,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33개 인권․사회단체들은 성명에서 "착잡함과 슬픔을 금할 길 없다"면서 "20살 꽃다운 그의 죽음은 형식적으로는 자살이었는지 모르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가져온 '사회적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인권사회단체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5월 3일에는 아시아태평양레인보우, 전미레즈비언인권센터, 인도의 동성애자단체 안첼 트러스트 등에서 각각 애도의 조전을 보내왔다. 5월 6일에는 타이완의 동성애자 인권단체 대만 젠더-섹슈얼리티 권리 협회(Gender/Sexuality Rights Association Taiwan)에서, 5월 7일에는 유고슬라비아의 라브리스 레즈비언 인권 모임(Yugoslavia Labris - Lesbian Human Rights Organization)에서 추모 조전을 보내왔다. 그러나 한국의 방송, 언론들은 이를 외면하고, 사회통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보도하지 않았다.
<heading>동성애 유해조항 삭제 </heading>
육우당은 유품으로 십자가와 성모상, 그리고 유서 한 장을 남겼다. 육우당은 유서에서 자신이 믿는 하느님이 동인련에 축복을 내려줄 거라며 자신은 비록 먼저 가지만 남아있는 동인련의 활동가들에게 동성애자의 억압과 차별의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해 끝까지 싸워달라는 주문을 남겼다. 그는 또 더이상 자신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 달라며 인권연대측에 지금까지 모아온 돈을 남겼다. 청보위 이승희 위원장은 인사말에서 "인권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청소년 유해매체물 심의기준에 '동성애'를 삭제하기로 했다"면서 "이날 토론회가 청소년 보호와 동성애 표현의 자유의 합리적인 접점을 찾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5월 5일 목원대학교의 천주교 신자 학생들이 성명서 "가톨릭 젊은이들이 육우당 형제의 죽음을 애도합니다."를 발표하였다. 이후 일부 대학의 성소수자 동아리, 천주교, 개신교 동아리에서 육우당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5월 15일에는 분당두레교회에서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동성애 문제-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개최되었으나 소수의 언론에만 보도되었다.
그러나 동성애를 청소년 금칙어, 유해 단어로 선정 여부는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사후 1년 후인 2004년 4월 20일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심의기준에서 동성애 조항은 삭제되었다. 이는 청소년보호법상 동성애, 동성애 관련 단어들의 유해 단어 지정 해체와 동시에 사랑이라는 개념을 남녀간의 애정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정으로 의미가 바꾸자는 여론이 조상되었다. 또한 학생 인권 문제에 대한 여론이 공론화되어, 2010년에는 청소년 동성애자를 비롯한 학생들의 인권, 체벌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다룬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동성애자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감과 편견은 계속되었다. 육우당의 죽음에 냉소적으로 반응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보수우익 단체, 개인들은 동성애자 인권에 반감을 드러냈다. 그해 5월에도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에게 퀴어 문화 축제에 참석을 요구하는 네티즌 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무산되었다. 2013년 4월 27일 서울 대한문앞 광장에서 열린 10주기 공식 추모행사에 서울시의원 윤명화가 참석해 차별금지법 제정과 성 소수자 인권지지를 선언했다. 이날 윤 시의원은 발언대에 올라 "최근 민주통합당이 차별금지법을 냈다가 철회하고, 군형법까지 개악하는 법안을 내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전하며 "윤명화도 여기있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민주통합당 윤명화 서울시의원은 “어느 민주당 의원이 섣부르게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내고 결국 그것을 철회했기 때문에 송구스러운 마음에 이 자리에 오기 어려웠다”면서도 “(지난 2011년 당시) 여러분이 뒤에 있어 힘을 잃지 않고 학생인권조례를 만들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heading>사후 </heading>
육우당은 죽어서라도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공개하고, 윤OO는 게이다 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지인들은 죽어서도 ‘아웃팅’을 걱정해야 했기에 한동안 세상에 본래 이름을 알릴 수 없었고 빈소에 영정조차 내걸지 못했다. 육우당과 친했던 선배, 동료, 후배들 조차도 가족, 친지들의 통제와 만류로 육우당의 빈소를 찾지 못했다. 그의 빈소에는 그와 친했던 친구 염모, 민모 등 소수의 친구, 동창들이 방문하였다. 빈소에는 영정 대신 술, 담배, 녹차, 파운데이션, 수면제, 묵주가 올라왔다."이라고 하였다. 죽은 뒤에도 한동안 인터넷에는 그의 이름이나 필명들만 언급, 소개되어도 익명의 악플과 조롱, 비방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2010년 이후에나 한국 사회에 공개될 수 있었다.
그가 떠난 뒤 동인련은 매년 4월 고 육우당 추모의 밤을 진행해 왔으며, 2009년부터 청소년동인련 회원들을 주축으로 그를 기리고,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문제를 알리는 거리 캠페인 '청소년 성소수자, 무지개 봄꽃을 피우다'를 진행하였다. 2006년 4월의 추모제는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개최되었다. 2006년 4월 21일 고려대 생활도서관에서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목숨을 바쳐 저항한 고 육우당을 기리는 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이후 매년 4월 20일~5월 10일 사이에 그의 추모제가 매년 서울과 인천 부평 등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었다. 동성애자인권연대는 매년 4월 故육우당 추모의 밤을 열고, 2009년부터는 ‘청소년 성소수자, 무지개 봄꽃을 피우다’라는 제목으로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을 알리는 거리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또한 그의 뜻을 기려 2013년 4월 1일~4월 14일 ‘제1회 육우당문학상’ 공모도 진행되었다. 2013년 4월 25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고 육우당 10주기 추모기도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동인련과 인권연대 외에도 인권 운동가들과 시민운동가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시민과 함께 차별금지법 제정 및 동성애 행위에 관한 처벌조항인 군형법 92조 6항의 폐지를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heading>사후 영향력 </heading>
그의 죽음을 계기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청소년 동성애자 문제 공론화에 영향을 주었다. 2003년 육우당이 세상을 떠난 후 동성애자인권연대를 비롯해 성소수자단체들은 ‘동성애는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라는 사회적 담론을 깨기 위해, 그리고 청소년보호법 상의 동성애자 차별조항의 삭제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정욜 활동가가 말하는 '계기'는 2003년 19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고 육우당의 죽음이었다. 그는 “동인련에게도 충격이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도 나름 걱정이었을 뿐더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육우당이 놓여있던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다”며 “그 사건 이후 청소년들이 당하는 차별과 요구들을 정리해나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2000년 10월 KBS 1TV 길종섭의 쟁점토론 이후 3년 5개월만에 동성애를 주제로 공중파 토론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일각에서는 한때의 실수일 수도 있으니 청소년 동성애자들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자제해야 한다는 여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단체와 개인들은 방송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항의, 비판하였다. 이후 동성애자 문제, 청소년 동성애자에 대한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과 토론 프로그램, 동성애 문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등이 대한민국의 TV 방송과 라디오 방송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의 죽음을 계기로 성적 정체성과 차별, 멸시 등으로 고통받는 동성애자 청소년 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나타났다. 이경화의 나, 이은미의 깊은 밤을 날아서 등에 영향을 주었다. 작가 이은미의 작품 ‘깊은 밤을 날아서’에는 동성애자인 도련과 소년이 등장한다. 둘은 사회적 차별과 가족 냉대를 참지 못해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나온다. 같은 고시원에 살게 된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교제를 시작한다. 작품은 두 남성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 이은미는 “2005년에 아우팅을 당한 청소년 성 소수자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녔던 이씨는 “성소수자들의 연애를 사람들은 왜 특별하게 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heading>성소수자의 적극적 입장표명 활동 </heading>
육우당의 언론, 잡지, 칼럼 기고활동은 다른 성소수자들의 공개적 입장발표, 의사 표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다가 따돌림 당하고 졸업 직전 학교를 자퇴하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성애가 에이즈와 성병을 전염시킨다는 주장은 악의적인 날조이며, 근거없는 미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육우당에 의하면 모든 동성애자가 성욕과 성충동에 중독된 자들은 아니며, 동성애자를 변태성욕자로 매도한 것은 반대 세력의 언론공작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육우당은 그 이유로 이성애자인데도 에이즈와 성병에 걸리는 케이스와, 문란한 남편 또는 부인으로 인해 성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항변하였다. 또한 육우당은 문화와 예술은 문화, 예술 그 자체로 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육우당에 의하면 한국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간섭과 검열과 탄압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그에 의햐면 과도한 검열과 탄압이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죽여왔다며, 심각한 반사회성이나 폭력성, 범죄를 미화하지 않는 한도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heading>성 소수자 차별에 분개 </heading>
그는 동성애자 카페를 유해매체, 동성애를 유해 단어로 지정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맞서 인터넷과 칼럼 등을 기고하거나 논쟁하였다. 2003년의 그의 유서에는 온갖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한 동성애자의 애끓는 절규가 담겨 있었다. 윤 씨는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은 동성애자다라구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받지도 않아요"라며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박수진은 그의 사망 관련 인터뷰에서 "동성애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동성애자임이 드러날 경우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전학을 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사례도 허다하"며 "심지어 아웃팅(본인의 동의없이 동성애자임을 폭로하는 행위) 위협을 당해 돈까지 빼앗겨도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는 평이 있다.
<heading>논란과 의혹 >> 편견과 차별에 대한 고통 </heading>
육우당은 생전 겉으로 자신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적소수자였고 자신을 옭매는 차별의 현실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여성 동성애자인 박수진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살을 '선택'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면서 "동성애자들 중에 한두 번쯤 자살 시도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주위에 의논할 사람도 하나 없는데다 동성애자임이 알려질 경우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공포에 짓눌리다 결국 자살을 시도하는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성 정체성을 자각한 뒤 자신을 혐오하거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구조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깨진 유리 조각이 널려 있는 살얼음판을 디디는 꼴이다. 커밍아웃하기 전에 숨 죽이고 다니느라 마음 고생이고, 모든 걸 다 숨겨야 하니까. 커밍아웃하고 나면 사실상 자살 행위에 가까울 정도이다. 육우당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 왔다. 경찰에 따르면 H씨는 이 단체 사무실 책상에 남긴 유서를 통해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이 나라가 싫고 이 세상이 싫다”며 “나같은 이들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동성애에 대한 차별 철폐에 애써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를 비판, 혐오하는 세력을 염려하여 그의 실명과 활동은 2010년대 이후에나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0년 4월 2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고 육우당 10주기 추모 기도회’가 열렸다. 임보라 목사는 “지금 어느 곳에선가 육우당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라는 화두를 제기하기도 했다.
육우당의 죽음에 대해 '동성애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역겨운 저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육우당 동지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듯하다. 그는 자신이 성소수자가 아니면 아닌 것이지, 그것이 성소수자를 정죄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는 유서에서도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는 동성애자다 라구요”라며 스스로 아까운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털어놨다. 동성애자들은 그의 최후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이해된다”고 입을 모은다. 2013년 5월 14일 한국여성민우회가 매월 진행하는 대중강좌 ‘다다익선’에 연사로 초청된 기독교 목사 임보라도 육우당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적하였다.
동인련 활동가 지혜 역시 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 하였다. '그는 유언장에서 아비규환 같은 세상이 싫고, 강자도 약자도 없는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 사회에서 동성애자가 자살을 택하는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자신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상에 지쳐 죽음을 택하는 성적소수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성적지향에 관계없이 사랑할 기본적 권리조차 가지지 못하고, 가정붕괴의 원인, 에이즈의 주범, 더러운 변태로 몰려서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정신병원에 끌려가야만 하는 것이 이 사회 동성애자들의 현실이다. 실제로 동성애자들의 우울증과 자살률은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는 동성애자의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자를 냉대하고 혐오하는 사회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는 시각도 있다. 평론가 김겸은 '그를 죽인 것은 우리 안의 호모포비아이고, 편견이불러온 폭력과 억압이다.
또한 그의 죽음을 두고 "이 사회에서는 신앙의 이름 아래 수많은 폭력들이 저질러지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한국 교회의 적대적 인식과 편견과 차별이 한 신앙인이기도 했던 그의 생애를 옥죄고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고인의 죽음은 한국 교회에 의한 타살이다. 며 학교 교육이 성 소수자들을 차별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언급하였다.
육우당은 학교의 도덕, 윤리, 생물 수업 시간에 동성애를 이상한 것처럼 묘사하는 수업 내용부터 사라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김겸은 동성애를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하는 학교 수업 내용 역시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학교교육은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심어주기는커녕 비정상이라고 가르친다. 그가 죽자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약칭 한기연)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약칭 한기총)를 항의방문하였다. 한기연은 육우당의 죽음을 계기로 성 소수자 사안과 관련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동성애에 대한 내부 논의를 더 적극적으로 진행하게 됐다.
한기연 김바울 대표는 "윤현석씨의 죽음 이후 한기총 대응 활동을 전개해 오면서 동성애자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는 기독교인들이 증가했다"며 "넓어진 인식의 지반을 바탕으로 교계 내에서 동성애자 문제를 더욱 공론화하는 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또 "우리의 이러한 활동이 지금도 신앙과 자신의 성적 정체성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분들께 힘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자신이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동성애자인권연대 정욜 대표 역시 "동성애자들이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다 마지막으로 신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 교회가 이들을 오히려 밀어내고 있는 형국"이라며 교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거부되었고, 이들은 계속 한기총 건물 근처에서 한기총 및 일부 기독교 단체, 인사들의 발언 취소와 사과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 단체 및 인사들도 맞불 방문을 하여 우리가 죽이지 않았으니 사과할 이유가 없다며 맞받아쳤다.
이 시조는 영화 <헤드윅>에 나오는 노래 'Origin of Love' 가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또 '육우당 동지의 유서는 성소수자들의 사무친 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골방’ 속에 갇혀 있길 강요받는 성소수자들의 자화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밖에 '그는 죽음으로 그 자신뿐 아니라 동성애에 관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커밍아웃’시킨 셈이다" 한다.
2007년 10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든 ‘차별 금지법’이 입법예고됐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 측에서 법안에 ‘성적 지향’이 들어 있는 것에 크게 반발해 법안이 수정되었다.
지시문 (instruction)
제시된 정보에 근거하여 해당 현상이나 판단의 이유를 설명하라.
질문 (question)
육우당이 스스로의 필명으로 사용한 '육우당(六友堂)'이라는 이름은 어떤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지어진 것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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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필명 '육우당'의 명칭 유래와 그 구성 요소 간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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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육우당이라는 이름의 의미와 관련된 구체적인 대상들을 추출한다.
- 녹차와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를 자신의 여섯 친구로 여겼다 하여, 스스로 필명을 육우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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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이름의 구성 요소인 '여섯 친구'가 무엇인지 명시된 구절을 선택한다.
- 녹차와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를 자신의 여섯 친구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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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여섯 가지 대상(녹차,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을 '여섯 친구'로 정의한 관계를 통합한다.
- 녹차와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를 자신의 여섯 친구로 여겼다 하여, 스스로 필명을 육우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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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육우당이라는 이름이 여섯 가지 사물을 친구로 여긴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결론짓는다.
- 스스로 필명을 육우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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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육우당이 여겼던 여섯 가지 사물을 나열하며 관계를 설명한다.
- 녹차와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를 자신의 여섯 친구로 여겼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육우당이라는 필명은 녹차, 파운데이션, 술, 담배, 묵주, 수면제라는 여섯 가지 요소를 자신의 '여섯 친구'로 여긴 것에서 유래되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특정 명칭(필명)이 개인의 주관적 가치 부여를 통해 특정 대상들과 맺고 있는 상징적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