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유로마이단(Євромайдан [예브로마으단], 직역하여 "유럽광장"group=nb)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2013년 11월 21일 시작했고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정부의 사임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시위대들은 11월 30일 일어난 진압 사태와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더욱 많이 합세되었다고 전했다.
<heading>2013년 11월 21일 ~ 29일 </heading>
유로마이단은 2013년 11월 21일 밤 2,000명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고 소셜 네트워크의 도움으로 시위대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출발하였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2013년11월 21일 EU와의 연합 협정 체결 준비를 정지시키면서, Korrespondent.net의 유리 안드레프의 블로그에서는 22시 30분부터 시위대를 모으기 시작한다고 전했다.
11월 22일 저녁, 대략 2,000명의 시위대가 EU와의 교섭을 잠정 중단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결정을 항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다음 날, 반정부 시위대 및 친유럽 시위대가 모여 시위를 열었다.
11월 24일, 독립광장에 모인 5만명에서 10만명의 시위대가 거대한 행진을 진행했다. 친유럽 시위대가 우크라이나의 국기 및 유럽기를 들고 "우크라이나는 유럽이다"를 외치면서 우크라이나 국가를 부르며 독립광장으로 향하는 행진이 진행되었다. 뉴스 기관들은 이 시위가 오렌지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시위라고 설명했다. 작은 시위대 무리가 우크라이나 정부 청사를 점령하려는 시도 이후,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시위대는 이에 대항하여 최루 가스 및 폭죽을 이용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11월 24일부터 12월 13일까지 경찰 200명과 학생 18명을 포함하여 40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11월 25일 수감된 전 총리 율리야 티모셴코가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EU 간 깊고 포괄적인 자유 무역 협정 서명에 반대한 것에 항의하여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11월 26일 우크라이나 총리 미콜라 아자로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연합 협정의 협상 과정이 계속된다는 것에 전권으로 긍정하며, 유럽 표준으로 우크라이나를 이동시킬 일은 하루만에 멈춰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자로프가 의회 소집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는 동안 정부 청사를 봉쇄한 시위대는 진정되지 않았다. 같은 날 키이우에서는 약 2천명의 학생이 독립 광장에 모이면서 온열 텐트를 설치했다. 11월 27일, 하르키우 폴리텍 연구소에서 키이브 시위를 하러 간 친유럽 학생들을 강제적으로 출석하도록 위협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른 대학에서는 친유럽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소셜 미디어에서 정치적 논평을 게시하거나 우크라이나-EU 국기 리본을 다는 것도 금지시켰다.
11월 29일, 우크라이나 정부가 빌뉴스의 동부 파트너십 정상 회의에서 연합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키이우의 시위대는 만 명으로 늘어났다. 리비우에서는 2천명 가량 되는 시위대가 몰렸다. 이로 인해, 로이터 지 카메라맨 및 사진기사를 포함하여 총 35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른 시위대들은 체포되었다. 대부분의 시위대는 학생들이었다. 경찰청 대변인 올라 빌리크는 시위대가 크리스마스 및 연말연시의 광장 준비를 방해했기 때문에 진압한 것이라고 정당화했고, 오히려 시위대가 돌과 횃불을 던진 것을 비난하였다.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 비탈리 자카르쳰코는 나중에 사과하고 "진압 경찰이 과도하게 시위대를 진압했다는 의혹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그는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만일 대형 소란에 대한 요구가 있을 경우, 우리는 가혹하게 대처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11월 30일 오후 1시, 독립광장에서 베르쿠트가 계속하여 지키자 성 미카엘 황금돔원 근처의 문 앞광장에서 또 다른 자발적 시위가 일어났다. EU 일부 10개 국가의 대사가 우크라이나의 유럽 연합 대사인 얀 톰빈스키와 함께 시위대를 방문했다. 성 미카엘 광장에서는 시위대들이 자경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30일 저녁에는 약 만명의 시위대가 남아 있었고, 토요일 밤에 리비우에서 키이우 시위대 만 명이 증원해왔다.
11월 30일, 우크라이나의 야당인 바티키우시나, UDAR, 스보보다가 모여 "우크라이나 레지스탕스 본부"를 만들었다.
<heading>12월 1일 유로마이단 봉기 </heading>
2013년 12월 1일 유로마이단 봉기는 전날인 11월 30일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대 진압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키이우 여러 지역의 동시다발적 봉기이다. 이 날은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경찰에게 부상당한 언론인이 가장 많은 날이었다. 또한, 12월 1일은 현대 역사에서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처음으로 점령하게 된 날이기도 했다.
12월 1일 키이우 지방 법원에서 독립광장 및 유럽광장을 포함하여 키이우 구역에서 시위를 금지시켰으며 대통령 행정청사 및 내무부 건물 앞은 2014년 1월 7일까지 이 같은 조치가 시행되었다. 시위 세력은 12월 1일 집회가 금지된 장소가 아니었던 성 미카엘 광장에 모여 독립 광장 향해 진군하는 집회를 계획했다. 12월 1일 행진 기간 동안, 시위대들은 이를 통해 금지령을 무시했고, 성 미카엘 광장에서 독립광장으로 재수복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들은 키이우 이의건물 유리창 여러 개를 깨트렸으며, 독립광장으로 향하던 시위대가 다른 곳으로 이탈하여 반코바 가의 대통령 행정 건물을 장악했고, 흐루셰우스키 가의 내각 건물을 장악했다. 사람들은 "도적을 쫓아내자"라고 외치고 우크라이나 국가를 불렀다. 야당인 바티키우시나는 이 행진에 시위대 50만명이 참여했다고 말했으며, 야당 대표 페트로 포로셴코는 독립광장에 35만명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기타 다른 뉴스 기관에서는 독립광장에 10만명이 도착했다고 말했으며, 총 시위대의 숫자는 40만명에서 80만명으로 어림했다.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11월 30일 폭력적인 진압으로 시위대에 참여하겠다는 비율이 70%가 넘었다.
14시에, 시위대들이 불도저 LongGong CDM 833을 징발하여 독립광장에서 대통령 관저 주변을 둘러싸는 울타리를 파괴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벽돌을 던졌다. 대통령 관저 밖에서 적어도 3명 이상이 날라오는 벽돌로 인한 머리 부상을 입었다. AFP 기자는 보안군이 대통령 관저 밖으로 수류탄 수십 개를 던져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으며, 시위대는 연막탄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경찰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고 말했다. 시위대들은 앞서 경찰 병력들과의 대결은 앞잡이들이 조직했으며, 시위대는 반코바 가에서의 충돌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대의원 중 한 명인 페트로 포로셴코를 포함하여 다수의 운동가들이 트렉터를 멈추고 시도했다.
우크라이나 내무부는 300명 이상의 급진적인 조직인 브라츠트보 조직이 대표인 드미트로 코르쳰스키(Dmytro Korchynsky)에 따라 대통령 관저 외부에서 진입을 시도하라는 명령을 내려 따랐다고 말했다.
시위대가 키이우 시의회와 빌딩을 경찰에게 내줬지만 이 건물은 여전히 시위대의 통제 하에 남아있었다. 시의회 건물은 시위대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내부로 진입하여 점령했다. 창문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계양하고 "우크라이나는 우리 것"이라는 메시지를 적었다.
우크라이나 행정부 및 내무부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하루의 대부분 30만명의 법 집행 요원이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역 언론에서는 군이 책임을 지진 않았지만 해커가 원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시위대는 국가적인 파업을 선포하고 독립광장에서 천막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작가 이레나 카르파도 파업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고 러시아 제품 불매운동 및 시위를 계속했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 사임 당시 "그들은 꿈을 훔쳤다. 정부가 사람들의 뜻을 성취하지 못하게 막고, 그러한 정부가 없어진다면 이러한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이제는 새 정부와 새 대통령이 되었다," 라고 군중 앞에서 연설했다. 한편, 스보보다의 대표 올레 타녠보크는 국가적 파업을 선포하고 공식적으로 "사회와 국가적 혁명"이라고 말하면서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혁명이 시작했다고 말했다. 시위대 대표 유리 루첸코는 혁명을 위해 일어나라고 요구하면서 "우리의 계획은 분명하다. 이것은 행진이 아니며, 행동도 아니다. 이것은 바로 혁명이다"라고 말했으며, 1991년과 2004년과 같이 혁명을 일으키자고 말했다.
<heading>12월 2일 ~ 7일 </heading>
봉기 다음 날 수 십 만 명이 키이우 독립광장에서 평화로운 시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수 천 명이 키이우 주요 정부 청사 건물을 점령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뉴욕 타임즈의 데이비드 M. 헤르세호른에 따르면, 광장은 "이상한 축제와 같다"라고 설명했으며 "시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느끼고 그들의 작전을 위한 인프라를 계속 추가하고 텔레비전 모니터를 데려왔으며 일종의 작은 텐트 도시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한편, 르보프, 테르노필, 이바노프란코프스크의 시위대는 단결하여 총파업을 선포했다.group=nb, 아자로프는 키이우 시의회를 장악한 시위대에게 무력을 동원해서 진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2월 3일, 유로뉴스는 키이우의 입을 "아침에는 상황이 진정되었으나, 아직도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의회 건물 바깥에서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서로 충돌했다. 오후 들어 위축된 상태에서 독립광장에서 수 천명의 시위대가 모인 채 야당 지도자들이 합동 연설을 가졌다. 우크라이나 내무부에 따르면 12월 3일 저녁 독립광장에는 약 만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이 때에는 어떠한 충돌도 없었다. 시위대는 광장에 텐트 10개, 흐레샤티크에 텐쉬 띅 세웠다. 텐트가 세워지는 와중에 연출가들이 나와 공연을 했다. 다음날에 이 3명은 키이우 독립광장에서 독일의 외무부 장관 기도 베스터벨레를 만나 대화를 가졌다.
2013년 12월 5일, 독립광장에서 수 천명의 시위대가 움집했다. 언론사 인터팍스에서는 현재 상황이 너무 조용한 분위기이고 인스티투츠카 가와 호로데츠코호 가에는 나무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고 말했다. 인터팍스 우크라이나 특파원은 최고 라다(우크라이나 의회)로 가는 길을 경찰 버스가 막고 있으며, 스보보다의 당기와 우크라이나 적흑기를 들고 흔드는 사람 150명 가량이 우크라이나 내각이 있는 키이우 정부청사 앞에 모였다고 말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지역당과 야누코비치 지지자 수백명이 마린스키 공원에 캠프를 세우고 친정부 시위를 열었다.
Viktoria Siumar, a prominent journalist and former head of Institute of Mass Information, reported that Secretary (head) of the National Security and Defense Council of Ukraine, Andriy Klyuyev, met with TV managers on 6 December urging them to limit Euromaidan coverage.group=nb The same day the Director of the Office for Democratic Institutions and Human Rights within the OSCE Janez Lenarčič stated that the government's demand that protesters unblock governmental buildings was "lawful" and "fully consistent with the acceptable restrictions on the freedom of assembly". However, he also stated that 30 November court ban on demonstrations in central Kiev was "an unqualified ban on demonstrations, in other words on peaceful assemblies, which is disproportionate and in contradiction to Ukraine's OSCE commitments". Jailed former Ukrainian Prime Minister Yulia Tymoshenko ended her hunger strike that she had started on 25 November in protest of "President Yanukovych's reluctance to sign the DCFTA" on 6 December. The same day police and a court order blocked a planned protest at President Yanukovych's private residence Mezhyhirya.
An unscheduled meeting between President Yanukovych and Russian President Vladimir Putin took place in the south Russian city of Sochi on 6 December 2013.
Prime Minister Mykola Azarov elaborated on the matter, saying the two met to discuss the drafting of a strategic partnership agreement, eliminate disputes over trading and economic issues, and in a separate announcement told journalists that the president would soon visit Moscow on 17 December, Later, The Economist's senior editor Edward Lucas, citing his own diplomatic sources, reported on his Twitter that Yanukovych had allegedly signed a pact with Russia which included terms whereby Ukraine would receive $5 billion and a natural gas price reduction in exchange for an agreement to join their Customs Union at a later date. Upon hearing the news, opposition leaders expressed fury, and demanded that the alleged documents be made public immediately. The governments of Russia and Ukraine categorically denied any Customs Union talks took place during the meetings, however, Russian presidential spokesman Dmitry Peskov did confirm (on 7 December) that the two sides discussed financial aid and credit, and were also now "significantly" closer in talks over natural gas prices.group=nb At the same time, Yatsenyuk claimed to have information that the planned 17 December Ukrainian-Russian ''strategic partnership agreement'' would involve Ukraine's joining of the Customs Union, but added that Ukraine's parliament would be unlikely to ratify it. The Ukrainian Foreign Ministry stated on 10 December that "No documents were expected to be signed and, naturally, no documents were signed during the Sochi meeting"; it also informed that a Ukrainian delegation would attend a 13 December CIS Economic Council in Moscow were "Special attention will be given to the aspects of the realization of the treaty of a free trade zone of October 18, 2011".
<heading>014년 1월~2월</heading>
2014년, 집권당인 우크라이나 지역당 의원 바딤 콜레스니첸코와 볼로디미르 올리옌크는 유로마이단 시위대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하여 우크라이나 반시위법을 제안하였으며, 이 법은, 우크라이나 지역당 일부 및 우크라이나 공산당, 우크라이나 사회당, 일부 무소속 의원이 찬성했고, 이 가결 수 이상의 의원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새로운 법률 시행에 따라,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 비탈리 자크라첸코는 "각각의 범죄는 그것에 맞게 우리가 가혹하게 처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4년 1월 16일 최고회의를 거쳐 우크라이나 의회를 통과했고(검은 목요일), 다음 날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서명했다. 이 법은 2013년 11월부터 시작된 대규모 봉기를 노리고 통과되었다. 이 법은 흔히 유로마이단 시위대, 비정부 기구, 학자들 우크라이나 언론이 우크라이나 독재법(закони про диктатуру)이라고 불리고 있다.
서방 국가들은 이 법을 개인의 항의의 자유를 뺏고, 언론의 자유 및 비정부기구의 활동을 제한하는 비민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티모시 D. 스나이더는 이 법이 효과적으로 독재 국가를 설립한다는 등 강력한 비판을 가했다. 미국 국무장관 존 케리는 이 법을 "반민주적인" 법이라고 비판하였다.
2014년 1월 16일 우크라이나 반시위법 발표 및 1월 21일 제정에 대항하여, 1월 19일부터 흐루셰우스키 가와 디나모 경기장을 중심으로 하여 키이우 전역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 대치가 시작되었다.
20만명이 유로마이단 시위에 참여하는 동안, 우크라이나 의회로 행진이 시작되었고 경찰 저지선에서 충돌했다. 교착 상태에 이어서, 경찰과 시위대 간 폭력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시위대는 정부군을 포위하고 탈출로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 시위대의 봉쇄 작전 동안 시위대 4명과 경찰 3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월 28일, 반시위법 조항 12개 중 9개가 폐지되었고, 국무총리 미콜라 아자로프가 사임하면서 충돌 태세는 완화되었고 체포 및 재판을 받은 시위대에게 사면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2014년 2월 14일, 시위 조직들은 부분적으로 교통량 복원을 위해 차단한 길을 일부 개방하는 것에 허가했지만, 바리케이드 설치 및 지속적인 시위가 이루어졌다. 2014년 2월 16일 시위대 사면령에 따라서 교통을 위한 회랑 개방과 함께 시위대와 경찰이 물려났다. 이 휴전은 2월 18일 우크라이나 의회로 다시 한번 행진하면서 끝나게 되었고, 새로운 대치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2월 19일 부터는 모든 바리케이드가 철거되었고 시위대가 행진하기 시작했다. 2월 18일 이후, 이 시위는 키예프 전국구적 봉기로 진화하였다.
결국 2014년 2월 18일 키이우에서 시민 만 명이 우크라이나 헌법을 2004년의 헌법으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날 75명이 죽고 1100명이 부상했다. 이후 이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되었으며 세계 각국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폭력 진압을 규탄했다. 다음날 정부와 야권, 시위대는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2014년 1월부터 지속적으로 폭력 시위를 주도해온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우익 섹터와 스보보다(우크라이나 자유당) 계열의 시위대는 합의안을 거부하였으며, 소총 등으로 무장하여 키이우의 시내를 장악하였다. 시위대가 키이우를 점령한 뒤 이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피난길에 올랐으며 야권이 주도권을 잡은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에 대한 지지는 국가별로 엇갈렸다. 최고 의회는 5월 25일에 조기 대선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친유럽 성향의 서부와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로 나뉘어 서로 합법 정부를 칭하는 이중권력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일부 무소속 의원, 일부 사회당 의원,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소속된 우크라이나 지역당 일부와 동부조차 야누코비치의 잠적을 비판했다. 야누코비치가 잠적함에 따라 동부에서도 서부가 차지한 정부를 따르기는 했으나, 러시아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크림 반도에서는 차라리 러시아로 돌아가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 혼란에 빠졌다. 크림 반도에서는 시민들이 행정 관청에 걸린 국기를 러시아의 국기로 바꿔다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편 2월 27일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피신하여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2월 28일,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러시아 정부는 크림 반도에 2000여명의 군을 파병하였다.(크림 위기)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를 침공으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유로마이단(Євромайдан)의 의미와 이 시위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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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유ро마이단의 명칭 의미와 시위의 발생 원인을 정의와 배경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
- 유로마이단(Євромайдан [예브로마으단], 직역하여 "유럽광장"group=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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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명칭의 직역 의미와 시위의 주체 및 목적을 추출한다.
- 직역하여 "유럽광장"
-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2013년 11월 21일 시작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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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시위가 촉발된 구체적인 정치적 요구 사항을 확인한다.
-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정부의 사임을 요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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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명칭의 의미, 시위 주체, 시위의 목적을 결합하여 정의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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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유로마이단은 '유럽광장'을 의미하며,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정부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작한 시위임을 도출한다.
- 유로마이단(Євромайдан [예브로마으단], 직역하여 "유럽광장"
-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2013년 11월 21일 시작했고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정부의 사임을 요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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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명칭의 의미와 발생 배경을 포함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직역하여 "유럽광장"
-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2013년 11월 21일 시작했고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정부의 사임을 요구하게 되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유로마이단은 직역하면 "유럽광장"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2013년 11월 21일부터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정부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작한 시위이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유로마이단은 '유럽광장'을 의미하며,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2013년 11월 21일 시작하여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정부의 사임을 요구하게 된 시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