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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게이시 document_id A220623100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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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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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게이시(鈴木 啓示, 1947년 9월 28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별명은 ‘쿠사’(クサ), 혹은 ‘스즈’(スズ, 鈴). 좌우명은 ‘초혼’(소우콘). 에 재학 중이던 1964년 2학년 때 하계 고시엔 효고 현 예선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시바이케 히로아키 투수를 앞세운 다키가와 고등학교에게 0대 1로 패했다. 이듬해 1965년 춘계 야구 대회(제37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2차전(첫 경기)에서 도쿠시마 상업고등학교의 도시미쓰 다카아키 투수(닛폰 생명)에게 막혀서 1대 3으로 졌다. 같은 해 하계 효고 현 예선 결승에서는 호토쿠가쿠엔 고등학교와 맞대결을 펼쳐 에이스 투수인 다니무라 도모히로와 투수전을 펼친 끝에, 0대 1로 끝내기 패배를 당해 하계 고시엔 대회 출전은 무산됐다. <heading>프로 야구 선수 시절 >> 입단 초기 ~ 1977년 </heading> 이쿠에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2순위로 긴테쓰 버펄로스에 입단, 당초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1순위 지명이 유력하다고 했지만 한신은 스즈키를 지명하지 않았다(이시도코 미키오를 지명). 신인이던 1966년에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같은 좌완 투수이자 대선배이던 가네다 마사이치(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에게 커브를 던지는 방법을 배울려고 하자 ‘배우고 싶으면 돈을 갖고 와라’는 말을 듣고 그때까지의 존경심에서 일전하여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다. 가네다가 롯데 오리온스의 감독이었던 1973년부터 1978년까지의 6시즌은 롯데전 통산 26승 8패의 좋은 성적을 남길 정도로 ‘롯데 킬러’가 됐다. 입단 1년째인 1966년에 10승, 이후 15년 연속 두 자릿수 이상 승리, 다음 시즌부터는 5년 연속 20승 이상(67년 20선발승, 69년 23선발승으로 선발 20승 기록)을 올리는 등 긴테쓰의 에이스 투수로 군림했다. 1968년 8월 8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경기(닛폰 생명 구장)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 1969년에 시즌 24승을 기록하여 다승왕 타이틀을 석권했다. 1971년 9월 9일 니시테쓰 라이온스와의 경기(닛폰 생명 구장)에서는 통산 두 번째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젊은 시절에는 에나쓰 유타카와 함께 ‘센트럴의 에나쓰, 퍼시픽의 스즈키’라고 불릴 정도로 탈삼진이 많은 투수였다. 1967년부터 1972년에 걸쳐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에나쓰도 똑같은 기간에 6년 연속 최다 탈삼진을 기록) 1972년경부터 탈삼진수가 절반으로 감소돼 투구 내용의 질도 점점 저하되기 시작했다. 스즈키 본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 후 1974년에 감독으로 취임한 니시모토 유키오의 지도에 따라 힘으로 밀어붙이는 직구 중심의 투구를 고치면서 제구와 볼배합을 중시하는 두뇌적인 피칭을 구축해 나갔다. 처음에는 니시모토에게 불만을 느낄 정도로 거세게 반발해 1974년 시즌 종료 후 팀내 주포였던 도이 마사히로가 트레이드됐을 때 ‘다음은 내 차례’라는 생각에 한신의 요시다 요시오 감독에게 트레이드를 지원한다는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1975년 3월에 열린 한신과의 시범 경기에서 4이닝 4실점으로 강판되자 니시모토는 “저쪽 투수(야마모토 가즈유키)를 조금이라도 본받아라!”하고 벤치에서 격노하는 등 호되게 질책했다. 그러나 마침내 니시모토는 자신과 팀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고 나서는 감독의 지도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포함한 역대 NPB 좌완 최다 선발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그 해에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이었던 10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했는데 훌륭한 투구에 힘입어 왕년의 강속구가 되살아나면서 최다 탈삼진과 최다 완봉승도 동시에 기록하는 등 ‘투수 부문 5관왕’을 달성한 선수 가운데 승률을 제외한 4개 부문에서 리그 최고 성적을 남겼다. 같은 해에 스즈키를 끝으로 일본 프로 야구에 25승을 기록한 투수는 현재까지도 나온 바 없다. 그해 9월 23일, ‘이기면 후기 우승’을 놓고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최종전(‘후지이데라 결전’이라고도 불린다)에서 상대 투수인 야마다 히사시와 투수전을 펼쳤지만 그 후 한큐에게 역전 우승을 내주면서 3년 만에 후기 우승을 놓쳤다. 경기 후 사퇴할 뜻을 내비친 니시모토 감독에 대해 스즈키는 “감독직에서 물러나지 말아주십시오! 저희들을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절규했다. 다른 선수들도 이에 동참하여 니시모토는 유임됐고 이듬해인 1979년에 비원의 첫 우승을 달성한 데 이어 그 다음해인 1980년에도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위에서 말한 내용 이외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는데 일본 시리즈 우승이 걸린 1980년 일본 시리즈 7차전에서는 긴테쓰가 앞서가던 상황에서 구원 등판했다가 패전 투수가 됐고 ‘남은 네 경기 중 두 번만 승리하면 우승’이었던 1969년 종반 한큐와의 4연전 첫 경기 때는 선취점을 내주고 5회에 마운드에서 내려왔다(이 경기는 긴테쓰의 패배로 끝났지만 스즈키는 패전을 면했다). 한편, 1975년 후기 우승이 걸린 한큐와의 경기에서는 3점을 앞서 있던 8회부터 구원 등판하여 헹가래 투수가 됐고 ‘비기기만 해도 상대팀에게 우승’이 돌아갔던 1980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후기 최종전에서는 던진 공을 얻어맞았음에도 소속팀의 타선이 상대 투수인 기다 이사무를 무너뜨리고 승점을 올리면서 후기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긴테쓰가 연속 우승한 1979, 1980년 플레이오프와 일본 시리즈에서는 모두 2차전에 선발로 나서 승리 투수가 됐다. 특히 일본 시리즈에서는 1979년 2차전에서 완봉 승리, 1980년 2차전에서도 완투 승리과 더불어 좋은 성적을 남겼다. 이것은 스즈키를 1차전보다 2차전에 내보내는 편이 그의 분발심을 자극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니시모토 감독의 판단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더욱이 1975년 플레이오프에서는 1차전에 선발로 나섰다(경기는 긴테쓰가 이겼지만 스즈키에게는 승리가 연결되지 않았다). 니시모토 감독의 최종전이 된 1981년 10월 4일 한큐와의 경기(닛폰 생명 구장) 때는 퇴임하는 니시모토에게 꽃다발을 건네줬다. 1983년, 스즈키 야스지로가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긴테쓰로 이적해 오면서 ‘스즈키’라는 성을 가진 투수가 2명이 됐다. 그러자 전광판이나 신문 등에 ‘鈴木啓’(스즈키 게이)라고 표기되는 것을 싫었던 스즈키 게이시가 “나는 지금까지처럼 ‘스즈키’(鈴木)로 불리고 싶다. 저쪽을 ‘鈴木康’(스즈키 야스)로 하면 될 것 아니냐”라고 말했지만 구단측은 게이시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鈴木啓’로 표기했다. 그러나 훗날 ‘鈴木啓’로 표기됨과 더불어 실황된 중계 방송이나 스포츠 뉴스 등에서 풀네임으로 불리는 기회가 늘어나서인지 “사람들이 내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해 주게 됐다”라고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heading>1984년 ~ 1985년 </heading> 1984년에 개인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 이때 구단의 주도로 ‘스즈키 투수의 300승을 올리는 날은 몇월 며칠?’라는 팬들에게 예상해 보게 하자는 기획이 있었다고 한다(1983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앞으로 4승만 올리면 됐기 때문에 1984년 시즌 중의 달성은 확실시되고 있었다). 스즈키의 300승 및 3000탈삼진 달성을 기념해서 그해 12월 9일, 모기업인 긴테쓰에서는 우에혼마치 - 도바 구간에서 특급 ‘소콘호’를 운행했다(이 열차의 담당 승무원이 전원 성이 ‘스즈키’인 사람들로 통일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해 공공광고기구(현재의 AC 재팬)의 광고 모델로 발탁돼 ‘던지면 안된데이’(投げたらアカン)라는 말이 유행어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듬해 1985년 7월 9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 3이닝 만에 강판됐다가 다음날인 7월 10일에 현역에서 은퇴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은퇴를 니시모토 유키오에게 은퇴하기로 했다고 보고하러 갔더니 니시모토로부터 “벌써 눈이 죽었구나. 그동한 수고했다”라고 말했다. 스즈키의 은퇴 소식을 들은 한큐 브레이브스의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은 은퇴를 장식할 하이라이트로 올스타전(우에다는 같은 해 퍼시픽 리그 팀의 감독을 맡아 긴테쓰의 홈구장인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처음으로 개최될 예정이었다)에 출전할 것을 스즈키에게 제안했으나 정작 본인은 고사했다. 스즈키에 의하면 우에다 감독으로부터 “퍼시픽 리그의 선수 모두가 함께 헹가래를 쳐줄테니까 나와 달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정말 감사한 이야기이지만 역사가 깊은 올스타전을 나 하나의 무대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마음에 거절했다”고 말했다. <heading>그 후 </heading> 골프에 관심이 없었던 현역 시절부터 아사히 방송과 관련된 ABC 골프 클럽의 회원이었다. 1995년, 개막 이후부터 주력 선수들의 부진과 잇따른 부상 악재가 겹친 탓에 팀은 침체를 겪는 등 결국 시즌 도중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같은 해 메이저 리그에 이적한 노모가 크게 활약하면서 스즈키에 대한 비난은 매우 강하게 일었다. 에나쓰 유타카는 스즈키와 노모 양쪽 모두 친분이 있어 복잡한 심경을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적도 있었다.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자신의 저서 이기는 감독, 지는 보스에서 스즈키를 ‘최악의 감독’이라고 비판했다. 이 책에서 노모는 “나는 반드시 메이저 리그에서 뛰고 싶어하건 아니었다. 다만 그 감독(스즈키) 아래에선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 뿐이었다”라고 ‘본심’도 소개했다. 당시 지바 롯데 마린스의 단장이었던 히로오카 다쓰로도 “긴테쓰는 좋은 선수가 많은데 감독과 선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선 안된다”라고 혹평했다. 오무라 나오유키는 고등학교 후배에 해당한다. 오무라가 출전한 1993년 하계 고시엔 대회의 비디오를 보다가 상대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자, “그래, 더 와 봐라”하면서 투수를 도발하는 오무라의 근성이 스즈키의 눈에 들었다. 이에 스즈키는 오무라를 드래프트에 지명하라고 구단 측에 진언했다. 자신의 감독 시절에 대해서 스즈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부족이었다. 내가 공을 던지는 기분으로 했으니까, 선수들을 제대로 사용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위축시킨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반성할 것이 너무 많다. 나시(나시다 마사타카를 이렇게 불렀다) 도(코치해서) 도와주려 했지만 그게 안 됐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스즈키 게이시와 에나쓰 유타카는 탈삼진 기록 측면에서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스즈키 게이시와 에나쓰 유타카의 탈삼진 기록에 관한 공통점을 찾는 질문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스즈키 게이시의 탈삼진 관련 기록과 에나쓰 유타카의 기록을 본문에서 추출한다.

    • 젊은 시절에는 에나쓰 유타카와 함께 ‘센트럴의 에나쓰, 퍼시픽의 스즈키’라고 불릴 정도로 탈삼진이 많은 투수였다.
    • 1967년부터 1972년에 걸쳐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에나쓰도 똑같은 기간에 6년 연속 최다 탈삼진을 기록)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두 인물이 공통적으로 달성한 구체적인 기록인 '6년 연속 최다 탈삼진'을 근거로 선택한다.

    • 1967년부터 1972년에 걸쳐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에나쓰도 똑같은 기간에 6년 연속 최다 탈삼진을 기록)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스즈키 게이시와 에나쓰 유타카 모두 1967년부터 1972년까지 동일한 기간 동안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는 점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두 투수 모두 1967년부터 1972년까지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1967년부터 1972년에 걸쳐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에나쓰도 똑같은 기간에 6년 연속 최다 탈삼진을 기록)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공통점을 명확히 기술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1967년부터 1972년에 걸쳐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
최종 답변 (final_answer)
두 사람 모두 1967년부터 1972년까지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스즈키 게이시와 에나쓰 유타카는 1967년부터 1972년에 걸쳐 6년 연속으로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에나쓰도 똑같은 기간에 6년 연속 최다 탈삼진을 기록) 1972년경부터 탈삼진수가 절반으로 감소돼 투구 내용의 질도 점점 저하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