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설탕의 역사(history of sugar)는 과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설탕의 발견, 재배, 제조, 확산, 대중화 과정과 그 영향들에 대해 기술한다. 설탕은 1세기 이후 인도 북부의 사탕수수 식물로부터 처음 생산되었다. "설탕(sugar)"이란 단어는 산스크리트어 "sharkara"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추정되며,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쓰여진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학에는 인도 벵골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제조한 최초의 기록이 등장한다. 투박하게 만들어진 설탕에 대한 산스크리트 이름은 "공이나 덩어리를 만들다"라는 뜻의 "구다(guda)"였다.
설탕의 역사는 5가지 주요 단계로 나뉜다.
동남아시아 섬들로부터 동쪽으로 퍼져나간 ''Saccharum officinarum'' 은 약 3500년전에 오스트로네시아 항해자들에 의해 폴리네시아와 미크로네시아로 퍼져나갔다. 또한 ''Saccharum officinarum'' 은 오스트로네시아 상인들에 의해 약 3000년전에 서쪽으로는 인도로, 북쪽으로는 중국으로 퍼져나갔으며, 그 곳에서 ''Saccharum officinarum'' 은 ''Saccharum sinense'' 와 ''Saccharum barberi'' 와 잡종교배 되었다. ''Saccharum officinarum'' 은 유라시아 대륙 서부와 지중해까지 퍼져나갔다. 마찬가지로 중국어에서는 "자갈 설탕(gravel sugar)"이라는 뜻의 용어 "砂糖(사탕)"을 사용한다.
1792년에 영국에서 설탕 가격이 엄청난 가격으로 올랐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본국의 설탕 가격을 낮추는데 도움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792년 3월 15일 영국 정부의 장관들은 영국령 인도에서 정제된 설탕 생산과 관련된 보고서를 제출했다. 벵골의 설립자인 J. 패터슨(J. Paterson) 부관은 인도에서 생산될 수 있는 정제당이 여러 가지 면에서 우위에 있으며, 서인도 제도에서 보다 더 싸게 설탕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세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서의 설탕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식품으로써가 아닌 수입 의약품으로써 설탕에 대해 기록했다. 예를 들어 1세기에 그리스의 의사 디오스코리데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세기에 로마의 대플리니우스는 설탕을 다음과 같이 약용으로 기록했다.
중세에 아랍 사업가들은 인도로부터 설탕 생산 기술을 받아들이고, 설탕 산업을 확대했다. 중세 아랍인들은 경우에 따라 현지에 제당소를 갖춘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세웠다. 열대성 기후대에 세워지는 사탕수수 설탕 공장은 많은 양의 물과 열을 필요로 한다. 인공적인 관개시설의 사용을 통해 중세 아랍 세계 전역에 사탕수수 재배가 퍼져나갔다. 사탕수수는 9세기경부터 시칠리아 토후국 시기동안 중세 남부 유럽에서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재배되었다.p=30 시칠리아 외에도 알안달루스(현재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는 10세기 초에 설탕 생산의 주요 중심지였다.
설탕은 아랍 세계로부터 유럽 전역으로 수출되었다. 중세 후기 서구의 저작물에서 설탕 소비에 대한 언급이 증가하는데, 이는 중세 후기에 설탕의 수입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설탕은 여전히 값비싼 수입품이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영국에서 무게당 설탕의 가격은 인도양을 가로질러 운송되어야 했던 육두구, 생강, 정향, 후추와 같은 열대 아시아에서 수입된 향신료와 거의 같을 만큼 비쌌다.
십자군은 성지에서 "달콤한 소금"을 운반하던 대상과 마주쳤는데, 군사행동이 끝난 후 설탕을 유럽으로 가지고 왔다. 12세기 초에 베네치아는 티레 부근의 일부 마을을 획득하고, 유럽으로 수출할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토지를 개간했고, 이 곳에서 또 다른 감미료인 꿀을 보충했다.p=[https://books.google.com/books?id=wOenYGilfd8C&pg=PA481 481] 12세기 후반에 쓰여진 십자군 연대기의 저자인 티레의 윌리엄은 설탕을 "인류의 사용과 건강에 매우 필수적인 가장 귀중한 생산품"이라고 평했다. 설탕에 대한 최초의 영어 기록은 13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폰팅은 유럽의 초기 설탕 사업가의 노예에 대한 의존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6세기에 유대교 율법서인 슐칸 아루크(Shulchan Aruch)의 저자인 유대교 지도자인 요세프 카로(Joseph Karo)는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레모네이드를 만들기 위해 레몬 주스와 물을 혼합한 다음 설탕을 사용한다고 언급했다.
1625년 이후에 네덜란드인들은 남아메리카에서 카리브해 섬까지 사탕수수를 가져갔고, 바베이도스에서 버진 제도까지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18세기 동안 설탕은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설탕 소비량은 1710년보다 1770년에 5배 증가했다.p=510 1750년에 이르러서 설탕은 곡물을 제치고 유럽 무역에서 가장 가치있는 상품이 되었다. 설탕은 모든 유럽 수입품의 5분의 1을 차지했고, 18세기 후반에 설탕의 5분의 4는 서인도 제도의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부터 나왔다.p=510 설탕 시장은 일련의 호황을 겪었다. 많은 유럽인들의 식습관이 크게 바뀌어 수요가 증가하고, 설탕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예를 들어 유럽인들은 잼, 사탕, 차, 커피, 코코아, 가공 식품, 다른 달콤한 식품들을 훨씬 더 많이 섭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증가하는 수요 열풍에 발맞추어 서인도 제도의 설탕 생산지에서는 더 많은 설탕을 생산하는 것에 착수했다. 실제로 서인도 제도는 서유럽인들이 소비한 설탕의 90%까지 생산했다. 일부 섬들은 다른 작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설탕을 생산하는 것이 보다 성공적임을 입증했다. 바베이도스와 영국의 리워드 제도에서 설탕은 각각 수출의 93%와 97%를 차지했다.
농장주들은 나중에 설탕 생산을 더욱 늘릴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작물 재배시 보다 생산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보다 발전된 제당소를 건설하고, 더 나은 품종의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프랑스 식민지 특히, 생도맹그가 가장 성공적인 설탕 생산지였는데, 새로운 품종의 사탕수수 재배와 함께 더 발전된 관개시설, 수력 및 기계 장치를 이용하여 이익이 증가했다.p=510 이러한 개선에도 불구하고 설탕의 가격은 특히, 네덜란드에 대항한 반란과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사건 발생동안 급등했다. 설탕에 대한 수요는 많았고, 설탕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익으로 활용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카리브해의 더 큰 섬들에 설탕 플랜테이션을 설립함에 따라 특히, 영국에서 설탕 가격이 하락했다. 18세기에 이르러서 과거의 사치품이었던 상품을 일반 소비자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처음에 대부분의 설탕을 차에 타는데 사용했지만, 후에 사탕과 초콜릿에 설탕을 사용하였다. 많은 영국인들(특히 어린이들)이 잼을 먹었다.2011 설탕 공급업체들은 보통 설탕봉의 형태로 설탕을 판매했으며, 소비자들은 플라이어와 비슷한 공구인 슈거 닙스(sugar nips)를 사용하여 설탕 조각을 뜯어내야 했다.
아이티 혁명으로 아이티 공화국이 세워진 후에 아이티의 설탕 생산량은 감소했고, 쿠바는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인 생도맹그를 대체하였다.
브라질에서 오랫동안 설탕을 생산해왔는데, 남아메리카의 다른 지역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새로운 유럽 식민지에도 설탕 생산이 퍼졌고, 특히 피지에서 중요하게 되었다. 모리셔스, 나탈(Natal),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주에서 설탕 재배가 시작되었다. 설탕 생산지들은 이제 전세계에서 흘러 들어온 노동자들과 노예가 아닌 계약 노동으로 노동력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45만명 이상의 계약 노동자들이 인도에서 영국령 서인도 제도로 갔고, 나머지 인도 노동자들은 나탈, 모리셔스, 피지로 갔고, 이들은 나중에 이들 지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주에서는 태평양 섬들로부터 노동자들이 이주했다. 하와이에는 중국과 일본 출신 노동자들이 이주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자와섬에서 수리남으로 이주시켰다.p=[https://books.google.com/books?id=wOenYGilfd8C&pg=PA739 739] 설탕 플랜테이션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없었다면 번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설탕 재배가 매우 일찍 시작되었고, 사업가들은 많은 아프리카 노예들을 수입해서 작물을 경작시켰다. 콜롬비아의 산업화는 라트비아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인 제임스 마틴 에더(James Martin Eder)가 남미 최초의 증기 동력식 제당소인 마누엘리타(Manuelita)를 설립함으로써 1901년에 시작되었다.
사탕무의 부상
1747년에 독일의 화학자인 안드레아스 마르크그라프(Andreas Marggraf)는 사탕무 뿌리에 수크로스가 존재함을 확인했다. 이러한 발견은 얼마동안은 그저 호기심이 있는 정도로 남아있었지만, 결국 마르크그라프의 제자인 프란츠 아샤르(Franz Achard)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재위: 1797년~1840년)의 후원하에 슐레지엔의 쿠네른(오늘날 폴란드의 코나리)에 사탕무 가공 공장을 건설했다. 수익이 거의 나지 않았지만, 이 공장은 1801년부터 나폴레옹 전쟁(기간: 1803년~1815년)동안 파괴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영국의 봉쇄에 의해 카리브해의 상품을 수입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영국 상인들과 거래하기를 원치 않았고, 1813년에 설탕의 수입을 금지했다. 사탕무 설탕 산업은 특히 장바티스트 케루엘(Jean-Baptiste Quéruel)이 벤자민 델레세르(Benjamin Delessert)의 사업체를 산업화시킨 후에 나타났다.
선진국에서의 설탕 산업은 인력 수요가 낮은 기계 장치에 의존한다. 하루에 약 1,500톤의 설탕을 생산하는 대형 사탕무 정제 공장은 24시간 생산 가동을 위해 약 150명의 상주 인력을 필요로 한다.
사탕무는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약 30%를 차지한다.
기계화
18세기 후반부터 설탕의 생산은 점점 더 기계화되었다. 증기기관은 1768년 자메이카에서 처음으로 제당소에 동력을 공급했으며, 발생한 증기는 열처리 공정 과정에서 직접 불을 떼는 것을 대체하였다.
1813년 영국의 화학자 에드워드 찰스 하워드(Edward Charles Howard)는 개방된 용기가 아닌 밀폐된 용기에서 증기로 사탕수수 추출액을 가열하고 부분적인 진공 상태로 유지되는 설탕 정제 방법을 발명했다. 압력을 감소시키면 물은 더 낮은 온도에서 끓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은 연료를 절감시켰고, 캐러멜화로 소실되는 설탕의 양을 감소시켰다. 미국의 기술자 노버트 릴리외(Norbert Rillieux)에 의해 설계된 다중효용 증발기(multiple-effect evaporator)는 연료 효율성을 더욱 향상시켰다. 다중효용 증발기는 일련의 진공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전의 진공솥보다 낮은 압력으로 유지된다. 각 솥의 증기는 최소한의 열을 소모하면서 다음으로 열을 공급한다. 현대 산업은 물을 증발시키기 위해 다중효용 증발기를 이용한다.
당밀로부터 설탕을 분리하는 과정 또한 기계적인 공정의 대상이 되었다. 데이비드 웨스턴(David Weston)은 1852년 하와이에서 이러한 작업에 원심분리기를 처음으로 적용시켰다.
타 감미료
미국과 일본에서는 고과당 옥수수 시럽이 특히 청량음료와 가공식품과 같은 일부 용도에서 설탕을 대체했다.
고과당 옥수수 시럽을 생산하는 과정은 1957년 리처드 O. 마셜(Richard O. Marshall)과 얼 R. 쿠이(Earl R. Kooi)에 의해 처음 개발되었다.1957 산업적인 생산 공정은 1965년~1970년에 일본의 경제산업성 산하 산업과학기술원의 타카사키(Y. Takasaki) 박사에 의해 개발되었다. 고과당 옥수수 시럽은 1975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의 여러 가공식품 및 청량음료에 급속히 도입되었다.
미국에서 1977년에 부과된 설탕 관세와 설탕 쿼터는 설탕의 수입 비용을 크게 증가시켰고, 미국의 제조업자들은 더 값싼 감미료를 찾았다. 미국의 설탕 가격이 전세계 가격의 두 배이고, 옥수수 재배자들에게 지급되는 정부의 보조금을 통해 옥수수의 가격이 낮게 유지되기 때문에 옥수수로부터 추출한 고과당 옥수수 시럽이 보다 경제적이다. 고과당 옥수수 시럽은 매력적인 대용품이 되었으며, 대다수의 미국 식품 및 음료 제조업체들은 설탕보다 고과당 옥수수 시럽을 더 선호한다. 코카콜라와 펩시 같은 청량음료 제조사들은 다른 나라에서는 설탕을 사용하지만, 미국에서는 1984년에 고과당 옥수수 시럽으로 설탕을 대체했다.
미국인들은 평균적으로 2008년에 고과당 옥수수 시럽을 약 17.1 kg 을 섭취했으며, 수크로스를 21.2 kg을 섭취했다.
최근에는 가공식품에서 고과당 옥수수 시럽의 사용 증가가 대사 증후군,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지방간, 인슐린 저항성 및 비만을 비롯한 다양한 건강 상태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과당 옥수수 시럽이 수크로스나 다른 단당류들보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증거는 현재까지는 거의 없다. 고과당 옥수수 시럽의 과당 함량과 과당 대 포도당의 비율은 사과 주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 연구자들은 과당이 다른 단당류들보다 지방을 합성하는 과정을 더 촉진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고과당 옥수수 시럽의 조합은 수크로스와 마찬가지로 과당과 포도당의 비율이 거의 1 : 1이며, 따라서 고과당 옥수수 시럽은 과당과 포도당으로 분해되는 수크로스 대사의 첫 단계 이후의 대사과정이 동일하다. 고과당 옥수수 시럽의 보급이 증가함에 따라 식품 중에 당류의 칼로리가 증가하게 되어, 관련 질병의 발생을 증가시킬 수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산스크리트 문학에서 투박하게 만들어진 설탕을 지칭했던 '구다(guda)'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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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산스크리트어 명칭인 '구다(guda)'의 의미를 정의하는 내용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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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본문에서 '구다(guda)'와 관련된 문장을 검색한다.
- 투박하게 만들어진 설탕에 대한 산스크리트 이름은 "공이나 덩어리를 만들다"라는 뜻의 "구다(gud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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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명칭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을 선택한다.
- "공이나 덩어리를 만들다"라는 뜻의 "구다(g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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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추출된 의미를 질문의 형식에 맞춰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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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구다의 의미가 '공이나 덩어리를 만들다'임을 확인한다.
- "공이나 덩어리를 만들다"라는 뜻의 "구다(gu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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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 "공이나 덩어리를 만들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공이나 덩어리를 만들다"라는 뜻이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에서 투박하게 만들어진 설탕을 지칭했던 '구다(guda)'라는 이름은 '공이나 덩어리를 만들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