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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신 document_id A2206231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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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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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context)
권철신(權哲身, 1736년 ~ 1801년 4월 4일(음력 2월 22일))은 성호 이익의 문하생으로 조선후기 성호학파의 학자, 세례명 암브로시오, 순교한 천주교인이다. 이승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777년 경기도 양주에서 정약용, 이벽 등 남인(南人)의 실학자들과 함께 서양의 학문 및 천주학에 대한 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이승훈, 강완숙,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 등과 같이 투옥 되었는데 66세라는 많은 나이에 너무 많은 고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였다. 천주교 전교 활동을 활발하게 하다가 신해박해때 사망한 권일신의 형이다. 생애 >> 초기생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庵), 고조부는 대군사부(大君師傅) 권적(權蹟), 증조부는 승지 권흠(權歆)이고, 할아버지는 진사 권돈(權敦)이며, 아버지는 권암(權巖)이다. 증조부때 갑술옥사로 인해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양근 땅에서 살았다. 집안은 기호 남인(畿湖南人)에 속하였고 남인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몰락한 양반가문에 태어나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였다. 권철신은 부친에게서 학문을 익혔고 천주학에 빠지기 전에는 일반 양반가 선비들 처럼 유학을 탐구하여 24세 때 성호 이익(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는 기호 남인계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성호학파의 거유가 되었다. 그의 학문 형성에 영향을 준 인물로는 이병휴, 안정복, 윤동규, 홍유한 등이 있지만 특히 이병휴의 영향이 컸다. 권철신 역시 제자를 많이 양성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홍낙민,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윤하, 이벽, 윤유일 등이 있다. 권철신의 학문은 현실 사회와 경제적 개혁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서양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권철신은 중국에 전해진 서양의 철학, 수학, 종교 등을 연구하였다. 또한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를 연구하는 모임인 서학 교리 연구회를 열어 활동하였다. 모임은 관가에 발각되는 것을 피해서 외딴 절간에서 이루어졌다. 1777년과 1779년에 경기 양주 앵자산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개최한 강습회에는 이벽, 정약용, 정약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 남인계열 실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천주학 서적을 학습하며 천주(天主)의 존재, 인생의 기본문제 등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천주교를 서양문물이나 서양학문의 일종으로 여기며 보유론(補儒論)적인 관점에서 학습을 하다가 천주교의 진리를 조금씩이나마 깨닫고 실천학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료 부족으로 항상 연구의 한계를 절감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던중 1783년(정조 7년) 이승훈의 부친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은 이승훈에게 사절단에 동행하도록 설득했다. 여비를 모아 주며 교리를 자세히 살피고 천주교 서적을 많이 구해 올 것을 부탁했다. 천주교 입교 중국에 갔던 이승훈은 세례를 받은후 많은 천주학 서적을 구해서 1784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승훈은 서울 명동에서 '명례방공동체'라는 신앙모임를 운영하며 전교에 힘썼다. 이때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이벽은 권철신과 같은 학덕이 높은 학자를 포섭하여 천주교의 기반을 굳힐 생각을 품게 된다. 이에 1784년 9월(음) 먼저 양근에 사는 권씨 가문을 찾아가 입교를 권고하였다. 셋째인 권일신(權日身)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이인 권철신은 처음에는 좀 주저했으나 결국 입교하여 그 후 동생 권일신은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으나 권철신은 직접 전도하지는 않았고 또 천주교 일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늘 집에서 학문과 종교생활에 전념하였다. 신유박해 1785년 명례방 사건직후 천주교는 사학으로 규정된후 금령이 내려졌다.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점차 증가하던중 1791년에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신해박해가 발생하고 1795년에는 을묘박해가 있었다. 이때마다 천주교 반대파들은 통문(通文)으로, 때로는 혹은 상소로 그를 천주교 두목으로 몰아갔으나 정조(正祖)의 비호로 화를 면하였다. 정조가 사망하고 이어 1801년(순조 1년) 노론벽파에 의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권철신도 이가환, 정약용 등 저명한 남인 학자들과 같이 잡혀 국문(鞠問)을 받았다. 정약종·홍낙민·이승훈·홍교만·최필공·최관천 등과 같이 사형을 언도받았다. 사망 사형 집행에 앞서 1801년 2월 22일(음) 66세로 옥중에서 장독으로 죽었다. 아울러 "클로드샤를 달레는 그의 저서 조선교회사를 통해서 권철신을 순교자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황사영의 백서(帛書)를 근거로 한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황사영 자신의 말과 같이 2월 15일(음) 이전 사건에 관한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고 밝히고 있다. 이덕일은 자신의 저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에서 권철신과 이가환은 옥사한후 그 시신이 길거리에 버려졌다고 하였다. 유산 성호 이익(李瀷)의 제자로 남인학파의 연장자이며 지도자로서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서학파(西學派)의 대가로 손꼽힌다. 저서로 동학이자 선배였던 홍유한(洪有漢)에 대한 『추도문』·『시칭(詩稱)』 2권·『대학설(大學說)』 1권 등이 있다. 또한 홍유한과 교유한 여러 통의 친필 편지가 남아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권철신이 참여했던 1777년과 1779년의 강습회에 참여한 인물들은 어떤 계열의 실학자들로 분류되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1777년과 1779년 강습회 참여자들의 학문적/정치적 계열 분류를 확인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강습회 시기와 참여 인물, 그리고 그들의 계열에 관한 정보를 추출한다.

    • 1777년과 1779년에 경기 양주 앵자산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개최한 강습회에는 이벽, 정약용, 정약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 남인계열 실학자들이 참여하였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참여자들의 계열을 명시한 구절을 근거로 선택한다.

    • 남인계열 실학자들이 참여하였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강습회 참여자 명단 뒤에 붙은 '남인계열 실학자'라는 분류를 질문의 답변과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해당 인물들은 남인계열 실학자로 분류됨을 도출한다.

    • 남인계열 실학자들이 참여하였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남인계열 실학자'로 답변을 작성한다.

    • 남인계열 실학자
최종 답변 (final_answer)
남인계열 실학자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1777년과 1779년에 개최된 강습회에 참여한 인물들은 남인계열 실학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