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문묘(文廟)는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孔子)의 신위를 받드는 묘우(廟宇)를 말한다.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묘(廟)는 무덤 묘(墓)가 아니라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祠堂)을 뜻하며, 동아시아 전반에 분포해 있다.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4성(四聖)을 배향하고, 공문 10철(哲) 및 송조 6현(賢)과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동방 18현을 종향(從享) 하였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례 의식인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고 있다. 태학생(太學生)들의 사표로 삼았다.
연혁 >> 신라 >> 고려 >> 조선 >> 현대 >> 종사 대상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므로 문묘 종사의 기준은 당연히 공자의 도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만큼 공헌했느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었던 문묘 종사는 대부분 도학(道學, 성리학)의 실천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선비만이 당당히 공자의 옆자리에 종사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와 같이 역사가 선택한 '동방 18현인'은 권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가문이 좋다거나, 벼슬이 높다고 해서 선정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 중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벼슬과 출세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역사책에서 조차 흘려버리는 당대 석학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났느냐, 누가 더 유명하냐가 아니다. 모두 나름대로 독창적인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학자와 선비로서 양심과 도덕을 실천했느냐이다. 따라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고,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아야 선정되었던 것이다.
종사 논쟁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문묘 종사 인물을 정하는 일은 학통·당파·정치 정세 등에 따라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점향(點享)되거나 복향(復享) 되기도 하였으며, 위차(位次)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중국의 예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인 줄 알면서도 섬겼다는 이유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의심 받았다. 선조와 광해군 년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5현의 종사시에 김굉필은 절조(節操)와 경학(經學)이 뛰어났으나 짧은 생을 살다 죽어 성경(誠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다는 훈구파의 격렬한 반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 처신으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고 출처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이황 또한 소년 시절 기생과의 행적이 들춰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이는 한때 불교에 몸 담았던 전력 때문에 학문의 순정성을 의심받고, 성혼은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의 처신 때문에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둘의 위패가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때 복향 되었으며, 김장생은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될 때 출향되었다가 1717년(숙종 43)에 다시 종향되었으며, 영조 때의 송시열·박세채의 종사 때에도 많은 분쟁을 야기하였다.
또한 성리학 외에 노장 사상이나 양명학 등 이단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인물들은 철저히 배격됐다. 서경덕이 그 대표적 예였다.
그리하여 문묘 종사에 있어서 자격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인물들은 김인후 등 몇몇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문묘 종사는 단순히 선현에 대한 위패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붕당의 명분과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로까지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학문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배향
문묘 서차는 먼저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 공자를 정위로 하여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그 앞에 안자·증자·자사·맹자의 4성을 동서로 나누어 배향하였다. 공문 10철과 송조 6현 및 우리나라 동방 18현을 종향 하였다.
동방 18현 >> 제례 절차
조선조 문묘 관장은 성균관에서 하였다. 성균관의 이런 건물들을 묘우(廟宇)라고 한다. 묘우의 주요 건물은 대성전으로서 좌우에 동무·서무라는 부속 행랑을 두어 예배 대상자를 봉안한다. 그리고 향사때의 헌관과 집사들의 재계소이자 향축을 봉안하기 위한 곳으로 향관청이 있다.
향사 일자는 중춘(仲春)과 중추(仲秋)로 나누어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을 석전일(釋奠日)로 정하였으며, 그 밖에 서원에서 춘추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이나 중정일(中丁日)로 정하여 성균관·향교의 석전일과 겹치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향사일이 국기(國忌)와 상치되면 그 다음의 정일(丁日)로 잡았고, 국상(國喪)이 나서 인산(因山)이 마쳐지지 않으면 신위(神位)에 고유(告由)하고 향사를 행하지 않았다. 또한 삭망 분향일(朔望 焚香日)이라 하여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관관(館官)·유생들이 문묘에 나아가 분향 의식을 올리는 행사일이 있었다. 이 밖에 공자(孔子) 탄강일(誕降日)인 음력 8월 27일에 올리는 향사는 가장 컸으며, 왕이나 세자가 직접 향사에 참례하는 친림석전(親臨釋奠)·친림작헌·왕세자석전 등이 있고 고유제(告由祭)·위안제(慰安祭)가 있다.
향사 절차는 성균관 대사성을 헌관으로 초헌관(初獻官])ㆍ아헌관(亞獻官)ㆍ종헌관(終獻官)과 축(祝)ㆍ찬자(贊者)ㆍ알자(謁者)ㆍ찬인(贊引)ㆍ사존(司尊)ㆍ봉향(奉香)ㆍ봉작(奉爵)ㆍ전작(奠爵) 등의 여러 집사들이 선임되어 향사 3일 전에 재계(齋戒)에 들어간다. 제복을 착용하고 제물을 차린 뒤 전폐례(奠幣禮)ㆍ초헌례(初獻禮)ㆍ아헌례(亞獻禮)ㆍ종헌례(終獻禮)ㆍ음복례(飮福禮) 및 망예례(望瘞禮)의 단계로 진행한다. 서원으로 내려오면 더욱 간략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의식이 끝나면 음희례(飮禧禮)를 하고 강론(講論)함이 보통이다.
의의와 평가
문묘는 공자와 4성(四聖)을 비롯한 공문 10철 및 송조 6현과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에서 공인한 최고의 정신적 지주에 오른 동방 18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따라서 문묘 종사는 유학자로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상이며 최고의 명예로운 자리이다. 따라서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들 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으며, 만인의 칭송을 받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다.
옛말에 "정승 10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문묘 배향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十政丞이 不如 一 大提學이요, 十大提學이 不如 一 文廟 配享(賢人) 이라.】 그리하여 문묘 배향 현인을 배출한 각 가문은 그 어느 권문 세가를 뛰어 넘는 국반(國班)으로서 대대손손 더 없는 영예로 알았다.
기타 사항
문묘가 있었던 교육기관은 다음과 같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문묘 배향 현인이 누렸던 명예의 수준과 그에 따른 사회적 위상은 어떠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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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문묘 배향 현인이 가지는 명예의 정도와 그로 인해 가문이 얻게 되는 사회적 위상을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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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문묘 배향이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보다 높은 명예임을 확인하고, 관련 격언을 추출한다.
-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들 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으며
- 정승 10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문묘 배향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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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명예의 구체적 비교 대상과 가문의 위상을 나타내는 구절을 선별한다.
-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들 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으며
- 문묘 배향 현인을 배출한 각 가문은 그 어느 권문 세가를 뛰어 넘는 국반(國班)으로서 대대손손 더 없는 영예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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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문묘 배향이 유학자로서 최고의 가치이자 명예이며, 이것이 가문의 위상으로 이어진다는 논리 구조를 파악한다.
- 문묘 종사는 유학자로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상이며 최고의 명예로운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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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문묘 배향은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보다 높은 명예이며, 이를 배출한 가문은 권문 세가를 뛰어넘는 국반으로서 영예를 누렸음을 정리한다.
-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들 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으며
- 그 어느 권문 세가를 뛰어 넘는 국반(國班)으로서 대대손손 더 없는 영예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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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명예의 수준(정공신/종묘 배향 공신보다 높음)과 가문의 위상(권문 세가를 뛰어넘는 국반)을 포함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들 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으며
- 그 어느 권문 세가를 뛰어 넘는 국반(國班)으로서 대대손손 더 없는 영예로 알았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문묘 배향은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들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리는 것으로, 유학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상으로 여겨졌다. 또한 문묘 배향 현인을 배출한 가문은 그 어떤 권문 세가를 뛰어넘는 국반(國班)으로서 대대손손 더 없는 영예로 여겨질 만큼 매우 높은 사회적 위상을 가졌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문묘 배향은 유교 사회에서 유학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보다 더 높은 절대적인 명예와 사회적 위상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