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개화파(開化派)는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를 지지한 정치 세력이다. 개화당(開化黨)이라고도 한다.
개화파의 본격적인 활동은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 이후이지만 그 사상적 뿌리는 18세기의 북학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위정척사파가 전국의 다양한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과 달리 개화파는 소수의 선각자들로부터 확산되는 모양새였다.
개화파의 선구자로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가 손꼽힌다. 이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배우거나 이들의 의견에 공감한 김옥균, 박영교, 김윤식, 유길준, 박영효, 서광범 등이 초기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개화파는 정치 참여 이후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화된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는 1880년 무렵 충의계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어 별도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였다. 개화파는 흥선대원군의 하야 이후 외척인 여흥 민씨와 손잡고 위정척사파와 대립하는 구도를 보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의 처리 과정에서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자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 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 조약이 채결되는 한편 민영익이 개화파와 관계를 끊자 급진개화파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쿠데타를 준비하였고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급진개화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온건개화파는 정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갑신정변 실패의 여파로 개화 정책의 추진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온건개화파는 직접적인 정책 변화 보다는 교육 사업과 한성주보 등의 언론 사업으로 개화 여론 조성을 시도하였다.
1894년 갑오년은 여러모로 조선에 숙명적인 한 해였다. 2월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은 봉건적 악습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외세에 대한 반대도 분명히 하여 개화파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고종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조선이 다시 청의 세력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내우외환 속에 고종은 개화파와 손잡고 갑오개혁을 시작하여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한 편 흥선대원군 복권을 시도하는 청나라의 입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새로 설치된 군국기무처는 김홍집을 비롯한 어윤중, 김윤식 등의 온건 개화파 주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을 둘러싼 내분으로 약화되었고 일본은 10월 이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는 준식민지 정책을 추진하면서 군국기무처를 방해물로 여겼기 때문에 갑오개혁은 별 다른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을미의병 뒤로도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정부의 핵심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고종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개화파를 일괄 해임하였고 그 와중에 김홍집은 성난 군중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갑신정변으로 망명하였던 서재필 등이 돌아와 독립협회를 세웠다. 이들은 만민공동회 등의 집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조병식이 독립협회가 공화국 수립을 추진한다고 무고하자 이를 계기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서재필은 다시 망명지였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박영효와 같은 개화파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도 친일파가 되었다. 한편 김가진과 같이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도 있었고 자강과 독립을 주장한 애국계몽운동 역시 개화파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개화파 와해 이후로도 근대 문화의 수용은 시대적 과제였다. 안창호 등이 참여한 신민회는 독립과 함께 상공업 진흥과 근대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고, 최시형은 동학을 천도교로 바꾼 갑진혁신운동을 통해 그 동안 반외세적 입장이었던 동학의 사상을 근대 개혁적 사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명칭
조선에서 개화(開化)라는 말은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를 줄여 만들어진 말이다. "개물성무"는 만물의 뜻을 통하여 천하의 일을 완수한다는 의미로 역경 〈계사상전〉 제11장이 출전이다. 조선에서는 왕의 경연에서 종종 다루어져 왔다. "화민성속"은 군왕이 모범을 보여 백성들의 풍속을 가꾼다는 의미로 예기의 〈학기〉가 출전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실록〉에는 백성을 덕화로서 다스리려 하나 인륜을 저버리는 사례가 있음을 개탄하는 내용에서 인용된 바 있다.
그러나 개항 시기 조선에서는 당시 일본에서 문명화의 의미로 사용되던 문명개화(文明開化)의 줄임말인 개화의 의미로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영어 Civilization 에 해당하는 번역어인 문명개화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체택한 것이다. 후쿠자와는 당시 청나라에서 사용되던 용례에 따라 문명개화를 번역어로 채택하면서 서양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후쿠자와의 문명개화는 1870년대 일본의 지식층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갔으며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을 방문한 박정양 등이 이를 받아들여 조선에 전하였다.
개화파의 기원
개화파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크게 보아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북학파였던 박지원의 후손인 박규수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 실학의 계승을 강조하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역관이었던 오경석이 중국 등을 왕래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상의 수입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두 주장이 대치하는 지점은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가 누구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는 지에 대한 것이나 박규수, 오경석, 김옥균 등이 1870년대에 들어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개화당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은 일치한다.
서울대학교의 김명호는 박규수의 역할을 보다 중요하게 평가하면서 실학과 연계한 자발적 근대화에 촛점을 맞추고 서울대학교의 김종학은 오경석 등 중인 출신 인물들의 보다 급진적인 개혁 욕구에 촛점을 맞춘다. 따라서 김옥균이 누구의 영향을 더 받아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는 지와 별개로 개화파의 정치세력화 중심에 김옥균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흥선대원군의 하야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가장 큰 이유는 서원 철폐 정책으로 위정척사파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1873년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이 국왕의 권위를 침범한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다. 고종이 이 상소를 받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은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20세였던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단행하고자 하였고 마침 위정척사파의 상소가 올라오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고종은 자신의 친정을 도울 조력자로 위정척사파가 아니라 척족인 여흥 민씨와 개화파를 선택하였다. 고종의 개화파 기용은 스스로 성군이 되려거나 개혁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끌어내렸다는 비난에 대한 의식과 고종 자신의 친정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흥선대원군의 시대 인식과 외세에 대한 대응은 위정척사파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실제 목표는 개화가 아니라 왕권의 강화였기 때문에 이후 개화파 일부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을 때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훙선대원군 하야 당시 김옥균 등은 아직 나이가 어린 실무 담당자였고 실제 국가적 정책의 수립은 민영익 등의 척족 출신의 몫이었다.
개화파의 득세
고종의 친정 이후 일어난 운요호 사건과 이에 따른 1875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 정국으로 접어들었다. 고종은 청나라 이홍장 등이 추진하던 변법자강을 참조하여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기존의 관제와 혼용하여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주일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오자 이를 간행하여 전국에 회람하는 한 편 조선의 새로운 외교 방침으로 삼고자 하였다. 조선책략의 간행과 회람은 위정척사파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 영남만인소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을 지속하였고 개화파는 동도서기론으로 자신들의 개화 사상을 정당화하였다.
1882년 개항 이후 새로 편성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고 몇 달째 급여조차 받지 못하던 오군영의 군사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개화 정책의 추진 책임이 척족 여흥 민씨 세력에게 있다고 보고 명성왕후 민씨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명성왕후가 간신히 목숨을 건져 피신한 사이 임오군란의 주도 세력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복권시켰다. 이미 변법자강 정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던 청나라는 흥선대원군의 복귀로 인한 쇄국을 경계하는 한 편 조선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이로 인해 임오군란 정국 역시 막을 내린다.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는 점진적 정책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개화파와 시급히 제도를 개혁하여야 한다는 급진개화파로 분화되었다.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여전히 동도서기론을 주요 근거로 삼아 동도개화파로도 불리며, 김옥균을 대표로 하는 급진개화파는 변법자강을 주요 근거로 삼아 변법개화파라도 불린다.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는 별도의 비밀결사인 충의계를 조직한다.
강화도 조약
메이지 유신이후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1868년 조선에 서계를 보내 근대적 동등한 수교를 요구한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의 서계가 기존의 격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였다.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는 일본의 서계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서계를 황제가 발행하는 칙서로 표현하는 등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과 성리학의 화이론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문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근대 국가를 지향하는 메이지 정부의 내각은 조선의 서계 거부를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정한론이 일었다. 결국 정한론은 시기상조로 결론났으나 이로 인해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직하고 이후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지는 내분을 겪는다. 일본은 청일수호조약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황제국과 번국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자주 국가로서 국교를 맺고 다시 조선에게 같은 요구를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하야 이후로도 서계의 문구에 대한 조선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당시 영의정 이유원을 비롯한 정부 주요 문신이 여전히 척화론자이었기 때문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유원이 탐욕이 많다고 비판하면서 박규수의 인품을 칭찬하였다.
청나라는 일본의 타이완 침략을 알리면서 일본 군사력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며 되도록 일본과 수호를 맺으라 권하였다. 이유원과 박규수는 군비 강화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였으나 수교 문제에 대해 이유원은 여전히 척화론의 입장을 보였다. 1875년 음력 5월 일본의 서계를 처리하는 방안에 대해 이유원이 여전히 부정적 입장을 보이는 가운데 박규수가 외교적 실리를 따지는 것이 우선이라며 서계 수락을 주장했으나 고종은 결국 서계 접수를 거부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조선이 서계를 거부하자 일본은 자신들이 미국으로부터 겪었던 포함외교를 조선에 사용하였다. 1875년 9월(음력 8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이를 빌미로 배상과 조약을 요구하였고 신헌이 교섭 대표로 나서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근대 국제법을 기반으로 한 최초의 외교 조약이었으나 포함외교 뒤에 채결되었고 조선이 세계 정세에 밝지 못하여 매우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일본을 왕래하여 일본의 문물 등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외교 사절과 관련하여 일본은 조선과 일본 양국이 모두 상주하는 외교관을 두기를 희망하였으나 조선은 통신사의 전례를 근거로 사절이 왕래하되 조선의 외교관이 일본에 상주하는 것은 거절하였다. 대신 1877년 일본은 조선에 상주하는 공사를 파견하였다.
첫 수신사가 단순히 사절 왕래의 재개를 상징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과 달리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은 보다 다각적으로 일본의 정황을 살피고 일본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을 만나 조선책략을 건내 받아 돌아왔다. 고종은 조선책략을 간행하여 전국에 회람하도록 하였다. 이 일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위정척사파를 자극하여 영남만인소의 계기가 되었다.
김홍집은 수신사의 파견만으로는 일본의 실정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고종에게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척화론자의 여론을 고려하여 신사유람단이라는 명목으로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고종은 위정척사파의 이목을 속이기 위하여 이들을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동래부까지 가도록하였고 개인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조사시찰단은 일본 정부의 각 부서와 산업, 방위 현장 등을 둘러 본 뒤 귀국하였다. 고종은 통리기무아문을 설립하면서 조사시찰단의 인사들 대부분을 기용하여 개화파에 힘을 실어 주었다.
통리기무아문
개화 정책 추진을 공식화 한 고종은 1880년 기존의 정부 기구도 근대적으로 개편하기로 하고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참조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위정척사파는 영남만인소와 같은 여론을 형성하며 반대하였다. 척화론의 이러한 반대에 대해 개화파는 동도서기론으로 반박하였다. 동도서기론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이 주장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개항 초기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같은 맥락에서 기존의 세계관을 유지하면서 뛰어난 서양의 문물은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위정척사파 등의 개화에 대한 극심한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1882년 고종은 전국의 척화비 철거를 지시하면서 유학의 근본 도리를 지키면서도 발전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동도서기론을 공식화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기존의 관직 체계와 중복되는 이중적 기구였다. 통리기무아문의 총리대신은 영의정이 겸임하였고 주요 사무는 신식 무기의 수입과 외교 관계의 처리 등이었다. 처음에는 척족 세력을 중용하였으나 조사시찰단이 귀국한 이후 이들을 대부분 통리기무아문에 배속시켜 개화파가 실질적인 정책 수행을 하도록 하였다.
임오군란과 개화파의 분화
1882년 훈련도감에 속해 있던 옛 군대는 새롭게 창설된 별기군과의 차별과 13개월에 걸친 급여의 미지급에 항의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의 복위와 명성왕후 민씨의 살해를 통해 개화파의 정책을 좌초시키고자 하였다. 명성왕후 민씨가 황급히 피신한 가운데 다시 실권을 장악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명성왕후의 사망을 발표하고 장례까지 치렀다. 한성부의 하층민들 역시 임오군란에 합류하였는데 이들이 보기에 개화파의 개화 정책은 고질적인 조선 사회의 신분 격차를 오히려 크게 벌리는 일이었고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위정척사파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황급히 일본으로 피신한 가운데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함으로써 임오군란은 몇 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임오군란을 맞으면서 이미 동도서기론과 변법자강론의 차이를 보이던 개화파 내의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가 분화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은 정변 3일 만에 청이 군사 개입을 하여 실패로 끝났다. 정변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던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다 전사하였다.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는 망명하였다.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조병갑의 학정을 민란의 원인으로 보고 이용태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민란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고부군 농민들은 조병갑이 파직되어 압송되자 정부의 약속을 믿고 해산한 상태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는 고부에서 시작되어 전라도와 충청도로 확대되고 있던 농민의 항쟁을 동학의 소행이라 단정하고 참가자 모두를 역적으로 몰아 사태를 키웠다. 이용태가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하는 만행을 보이자 소강 상태였던 농민 항쟁이 다시 일어나 전주성을 함락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의 중심 세력이었던 동학군은 전봉준, 김개남 등이 이끌었다. 동학은 이름부터 서학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척화론 입장을 지니고 있었고 흥선대원군과 일정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개화파가 정적인 흥선대원군과 연계된 동학 농민군을 적으로 여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유학자들 역시 전통적인 성리학에 반하는 동학을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한 사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고종은 전주화약을 통해 농민군의 요구 일부를 수용하였으나 청나라와 일본 모두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청나라군은 아산에 주둔하였고 일본은 서울에 주둔하였다.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은 경비를 구실로 서울의 4대문을 통제하였고 7월 23일 새벽 경복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척족 여흥 민씨를 축출하였다. 이후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하는 군국기무처가 세워졌다. 일본이 궁궐을 점령한 가운데 이루어진 내각 개편으로 인해 김홍집과 온건개화파에게 친일 인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정책이 이미 자국 이익 우선으로 변하면서 일본은 개화파의 개화 정책마저 방해물로 여겼다. 군국기무처는 갑오개혁을 발표하며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구성원이 대원군의 실권에 대한 찬반으로 갈리면서 추진력을 잃었다.으로 인정하게 하고 요동을 점령하였으나 삼국 간섭으로 요동을 반환하였다.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군대는 중앙정부의 일관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조선군은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 청나라를 지원하거나 일본군을 지원하는 등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일본에 의해 실권을 다시 잡은 흥선대원군은 겉으로는 일본을 지원하는 듯 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일본 역시 이를 파악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들여온 대원군을 다시 자신들의 손으로 축출하고자 하였다.
1894년 11월 동학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진압부대를 맞아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기관총과 같은 신식 무기 앞에서 조총과 창칼로 무장한 농민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패주하였다.
을미년: 1895년
을미년인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고종은 일본의 일방적인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등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당시 일본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영국과 동맹 중이었고 미국은 필리핀을 놓고 스페인과 경쟁 중이었기 때문에 극동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 달리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후로도 미국의 지원을 몹시 고대하였다.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점차 조선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였다. 일본은 온건개화파 내각을 후원하고 있던 척족 여흥 민씨 세력을 자신들의 방해물로 보고 명성왕후 민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반외세 감정이 전국적으로 격앙된 가운데 김홍집의 온건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을 단행하여 위정척사파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온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거병한다. 을미의병은 주요 지방 도시를 점령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지만 조선군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패배한다. 이와는 별개로 고종 역시 일본의 영향력이 점차 커져가는 군국기무처에 대한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고종은 청나라의 영향력이 사라진 가운데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러시아를 끌어들이기로 결심한다.
병신년: 1896년
1896년 병신년 개화파의 첫 정책은 그레고리력 체택이었다. 이는 단순히 양력을 도입한다는 의미를 넘어 그동안 청나라의 시헌력을 체택하여 온 조선이 시간의 기준마저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상징한다.
한편, 을미사변 이후로도 다른 나라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인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경운궁(훗날 덕수궁)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아관파천과 동시에 고종은 기존의 개화파 내각이 일본과 가깝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모두 해임한다. 갑작스런 사태를 맞은 김홍집은 고종을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종로에서 성난 군중에게 살해당한다.
김홍집의 사망은 개화파의 정부 참여가 끝을 맺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개화파는 친러파, 친일파,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분산되며 와해되었다. 옛 급진개화파이었다가 갑신정변 이후 망명하였던 서재필 등은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스스로 개화파의 후계임을 자처하였던 서재필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활동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서재필과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아관파천을 끝내고 환궁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고 결국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대한제국
1897년 아관파천을 끝내고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제국의 선포는 중국을 황제국으로 조선을 번국으로 상정하는 전통적 사대교린 외교 체계의 종말을 상징하였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끝낸 이후로도 러시아를 통해 날로 강해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이어갔다.
독립협회 등의 개화 운동 세력이 만민공동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고종은 황국협회를 통해 만민공동회를 방해하고 둘 사이의 충돌을 빌미로 불법화 하였다. 이로서 변법자강을 통한 자발적 개화를 추진한 개화파 세력의 직접적인 정부 참여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해 황제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여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고종은 여전히 미국에 희망을 걸고 있었지만,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 테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침탈을 용인한 상태였다.
분산과 계승
개화파는 아관파천 이후 다양한 세력으로 분산되었다. 이완용은 친러파의 대표였다가 다시 친일파로 돌아섰고 개화파의 대표 가운데 하나였던 박영효는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한편, 서재필 등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였으나 입헌군주제를 놓고 고종과 갈등하였고 결국 해산되었다. 또한 갑오년 당시 반외세를 주장하였던 동학은 3대 교주인 손병희의 갑진혁신운동을 통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며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독립협회의 일부와 천도교의 일부는 일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이들은 경술국치 정국에서 일본과의 병합을 주장하여 일본의 강점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친일파가 된 세력들과 달리 신민회와 같이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개화 사상가들은 이후 독립운동세력이 되었다. 위정척사파를 기반으로 하는 항일의병 가운데 일부가 대한독립의군부와 같은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던 것과 같이 개화 운동 세력도 흥사단과 같은 해외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1919년 3·1 운동은 조선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결집한 독립 운동으로 개화 사상을 계승한 인물들도 다수가 이에 참여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게 된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개화파가 임오군란 이후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화되게 된 배경과 각 분파가 내세운 주요 근거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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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개화파의 분화 원인과 분화된 두 세력(온건/급진)의 사상적 근거를 파악해야 한다.
-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는 점진적 정책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개화파와 시급히 제도를 개혁하여야 한다는 급진개화파로 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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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분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과 각 파벌의 명칭 및 근거를 추출한다.
- 임오군란의 처리 과정에서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자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 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여전히 동도서기론을 주요 근거로 삼아
- 김옥균을 대표로 하는 급진개화파는 변법자강을 주요 근거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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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분화의 원인인 임오군란 당시의 갈등 상황과 각 파벌의 핵심 사상을 선별한다.
- 임오군란의 처리 과정에서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자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 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 온건개화파는 여전히 동도서기론을 주요 근거로 삼아
- 급진개화파는 변법자강을 주요 근거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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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임오군란이라는 사건이 두 세력 간의 평가 차이를 야기했고, 이것이 사상적 차이(동도서기론 vs 변법자강론)로 구체화되었음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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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개입과 흥선대원군 납치에 대한 평가 차이가 분화의 원인이며, 온건파는 동도서기론, 급진파는 변법자강론을 근거로 삼았음을 정리한다.
- 임오군란의 처리 과정에서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자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 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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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요구된 원인과 근거를 포함하여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 임오군란의 처리 과정에서 청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자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 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 온건개화파는 여전히 동도서기론을 주요 근거로 삼아
- 급진개화파는 변법자강을 주요 근거로 삼아
최종 답변 (final_answer)
개화파는 임오군란 처리 과정에서 청나라의 개입과 흥선대원군 납치에 대한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평가가 엇갈리며 갈등이 발생하여 분화되었다. 이후 온건개화파는 동도서기론을 주요 근거로 삼았고, 급진개화파는 변법자강을 주요 근거로 삼았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개화파는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개입과 흥선대원군 납치에 대한 평가 차이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화되었으며, 각각 동도서기론과 변법자강을 주요 근거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