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박진(朴晉,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은 무신, 군인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 벼슬을 지냈다. 초기의 밀양성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영천성에서 의병 주도로 벌어진 영천성 전투를 지원하여 승전을 거두었고 이후 왜적 111명의 수급을 베어 왕에게 올렸으며, 제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159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순천부사,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596년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냈다.
아버지 박인수는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호군(行義興衛副護軍)과 병마절도사를 지냈은아 후일 그의 공적으로 여러번 추증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밀흥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규정공 박현의 후손으로, 충정공 청재 박심문의 5대손이다. 증조부 박백령은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할아버지 박언은 세자익위사부솔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후일 정승을 지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 급제와 군인
자는 여회(汝晦),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였다. 일찍이 윤화달의 딸 파평윤씨와 결혼했으나 상처하고 계배인 김시회의 딸 안동김씨와 재혼하였다.
무관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음직으로 군관이 되었다. 여절교위(厲節校尉)로 재직 중 1583년(선조 16년) 24세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였다.
이후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무인을 불차채용할 때 심수경(沈守慶)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임진왜란 >> 전란 초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우병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진주(晉州)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부사 박진은 군(郡) 내 병사 3백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 당시 성을 빠져 나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은“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
작원관 전투
박진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려면 꼭 통과해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사야가는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다.
1593년(선조 26년) 2월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2월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일본군 수급 1백 11개를 베어 왕이 있는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 대소신려들이 그가 보내온 수급 1백 11개를 보았으며, 이는 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4월 12일 왕명으로 한 자급 특진하여 가의대부가 되었다.
생애 후반 >> 한성부 상경과 재출정
그해 4월 별장(別將)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소환되었다. 이때 그는 오랫동안 습증(濕證)을 앓아 활을 당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처럼 칼날을 무릅쓰고 싸울수는 없었으나 위엄과 명성이 이미 드러나 있어 아군들도 그를 신뢰하였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출정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1월 동지중추부사, 1594년 2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10월 순천 부사(順天府使),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1596년 11월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구타 치사 사건
1597년 1월 원균이 이순신의 군관을 내쫓은 것을 보고하였다.
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였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여 군사 훈련 등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 중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참고 있다가 사망에 이르렀다., 그의 사후 모친은 그의 묘소 근처에서 살았다.의 건의로 조정에서 유족을 구휼하였다.
그의 구타 사망 사실은 바로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에서 언급함으로써 알려졌다. 1597년 5월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장에서 그가 중국인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으며, 그의 노모를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
기타
임진왜란 당시 박진은 색깔이 있는 말을 탔었는데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으로 발라 말의 색깔을 없앴으나 여러번 승전하여 명성이 적들에게까지 났기 때문에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했다한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박진이 임진왜란 당시 승전하여 얻은 명성을 적들에게 알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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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박진이 승전 후 명성을 활용하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행동(속성/특징)을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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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박진의 말(馬)과 관련된 일화 및 명성에 관한 내용을 추출한다.
- 임진왜란 당시 박진은 색깔이 있는 말을 탔었는데
- 여러번 승전하여 명성이 적들에게까지 났기 때문에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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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말의 색깔을 숨겼다가 다시 드러낸 행위가 명성을 이용한 방법임을 확인한다.
-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으로 발라 말의 색깔을 없앴으나
-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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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적의 인지를 피하기 위해 진흙을 발랐던 것과 달리, 승전 후에는 명성을 이용해 적을 위협하고자 말의 색깔을 드러냈음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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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박진은 승전으로 얻은 명성을 활용하여, 적이 보고 놀라게 할 목적으로 일부러 색깔이 있는 말을 타고 나갔다.
-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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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문맥에 근거하여 서술형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했다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박진은 여러 번의 승전으로 명성이 적들에게까지 알려지자, 적이 보기만 해도 놀라게 할 목적으로 일부러 색깔이 있는 말을 타고 나갔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박진은 여러 번의 승전으로 얻은 명성을 적들에게 알리기 위해 일부러 색깔이 있는 말을 타고 적을 심리적으로 위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