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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document_id A22062313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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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鄭道傳, 1342년 10월 6일 ~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이다. 본관은 봉화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의 부패 정치와 이에 기생하는 불교를 비판하였고, 성리학(신유학) 이념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인 조선 왕조 성립에 핵심적인 공헌을 하였다. 개요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1347년에서 1348년까지 그 자신의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 선생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 선생의 딸이다. 고려 시대 시절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월)과 제2차 요동 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이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생애 >> 생애 초반 >> 출생과 가계 삼봉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주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여 양주 삼각산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정운경은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유년기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 곳은 영주와 양주 삼각산이다. 정도전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따라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정도전은 그 뒤 성균관에서 대사성이자 성균박사 이색을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학과 소년기 유년기 그는 가학과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을 통해 기초학문을 배우고, 개경으로 올라와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과 교류하면서 그는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 설장수(偰長壽), 박상충 및 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 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대사성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보,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또 이와 반대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을 이야기했고 여기에 대해 정몽주는 깊이 감격, 공조하였다.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조선 개국과 관련하여 정적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기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 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1365년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우 씨가 1366년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1367년 성균관을 중영하고 그해 목은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1370년 그는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의 무모한 전횡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정도전은 등용되었다. 1374년(공민왕 24)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 1375년(우왕 1년)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북원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 개혁 정치와 정변 기도 >> = 이성계와 역성혁명 =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生長靑山幾萬重 / 청산에서 자람은 어찌 만 배나 중하지 않으랴만.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4년 가을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복직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양국간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우왕의 승습(承襲)과 공민왕의 시호를 받아 귀국하였다. 1385년 귀국 후 성균관 제주(祭酒)와 지제교를 거쳐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뒤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과 권력 장악([[1388년]] 음력 6월) = 1388년 음력 6월 제1차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이어 우왕의 장인인 최영, 이인임, 염흥방, 조민수 등 구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같은 해, 우왕을 내쫓고, 이색의 주장으로 창왕을 세웠고,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를 제거하였다. h> 우창비왕설 >> 귀양 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 이어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 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 등을 신우와 신창(우왕과 창왕을 말한다)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정도전은 거듭 그들을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다. 그해 9월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 등은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케 하여 봉화로 유배당하였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그는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당해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그를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유배되자 정몽주는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강력 상소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공양왕 4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해 4월10일,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뒤 6월 10일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복직하였다. 역성혁명과 조선 건국 >> = 조선의 건국([[1392년]]) =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 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정도전이 경복궁을 설계할때 근정전(勤政殿)이라 지은 것이다. 또한 한성의 사대문과 사소문의 첫 이름과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 년간 궁중에서 연주되었다. [[조선]] 건국([[1392년]]) 이후 정권 투쟁 >> = 세자 책봉 문제 =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 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은 바로 세자시강원이사(世子侍講院貳師)의 한사람이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갈등 =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6월에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업무와 인사 행정 및 실무를 논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 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태조는 그의 상소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395년 3월에는 다시 판삼사사로 복직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되었다. [[한성부]]의 도시 정비 천도가 확정, 단행될 무렵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394년부터 2년간 그는 한성부의 도시 정리를 추진했다. 1395년(태조 4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 측량을 하게 했으며, 총책임자는 정도전이 되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 외국의 사례로는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을 빌려왔다. 그는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경영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 들인 후에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 살해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후에 이르러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승자에 입장에서 이방원이 비열한 인물로 조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의 최후를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호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 정도전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鄭游) 그리고 조카 정담(鄭澹)은 부친과 숙부를 구하러 달려가다가 살해되고, 얼마 뒤 조카 정기(鄭淇)는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맏아들 정진은 당시 태조의 안변군 석왕사 삼성재(三聖齋)발원을 위한 밀접 수행 중이었으므로 해를 당하지 않고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후 평가 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유형원(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그의 가묘가 있다. 반발했던 조준은 태종때 중용이 되었고, 한편 정몽주는 태종 때 가서 권근의 요구와 하륜의 지지로 받아들여져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그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 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가 죽은 후 정적들의 대거 복귀로 이색, 정몽주의 정치적 승계자인 고려 유신그룹과 사림파와 정몽주를 충신의 표본으로 현창함으로써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 의도만으로 정도전이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 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허균은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수정 삼봉집을 간행하였다. 서인 성리학자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1865년(고종 2년) 9월 대비 조씨의 건의로 다시 공신 칭호를 돌려받았다.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 양성현(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고종은 정도전의 조선 건국과 제도와 법령 마련, 체제 정비 등의 치적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4월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 1872년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고 이듬해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었다. 1873년(고종 10) 남인 인사들에 의해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복권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고종은 정도전 복권을 강행하였는데, 이는 정도전이 조선왕조건국에 끼친 공로를 추앙하여 복권을 한 것으로, 기존의 조선왕조에서 복권이 된 사람들인 김종서, 황보인등의 계유정난때 희생된 사람들과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 남이의 옥사에 희생된 남이, 기묘사화 때 희생된 기묘명헌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현대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함으로써 다시 그에 대한 폄하가 시도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3년 11월, 2007년 12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 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 정도전의 신권정치(臣權政治, 재상중심의 정치)가 독일식 총리제, 영국식 수상제, 스위스식 집정부제와 같은 정권들을 통하여 경제개혁, 토지개혁으로 이어졌듯이 토지공동체와 같은 정책으로 땅의 제 역할이 회복될 수 있는 정도전의 정전제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의 바탕이 되었으며, 한국판 토지 뉴딜(New Deal)정책이었다는 평가다. 정도전의 묘가 경기도 과천현 10리 동쪽에 있다는 전설과 소문을 근거로 과천 일대의 야산을 탐사한 결과 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과 함께 많은 양의 고급 조선백자가 함께 발견되었다. 정도전 사당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저서 >> 편저와 역서 >> 작품 >> 정도전이 등장한 작품 >> 드라마 >> 영화 >> 논란과 의혹 >> 표절 그의 저서인「경제문감(經濟文鑑)」(1395)이 남송시대 저작인 「주례정의(周禮訂義)」,「산당고색(山堂考索)」,「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의 문헌들을 상당 부분 베껴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연합뉴스 2003년 10월 27일자 기사인 "정도전의「경제문감」남송시대 책 도용"에서 연세대 도현철 교수(사학과)는 31일 `한국 중세사회의 변화와 조선건국'을 주제로 연세대 국학연구원(원장 전인초)이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정도전 사상의 재검토'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밖에 송재혁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원은 그의 논문인 '정도전은 왜 인용한 자료를 밝히지 않았나?:창업 군주를 위한 통치론의 저술과 원 제국의 유산*' 이라는 논문에서 정도전이 경제문감 뿐만이 아니라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별집'도 중국 송나라,원나라 시대의 많은 중국측 자료들을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저서들에 포함시켰음을 밝혀내었다. 계급 사상 그는 역성 혁명가로 불리지만, 혈통에 따른 신분 차별을 당연히 여겼다. 그의 저서 '삼봉집' 제13권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예전(禮典) 여ㆍ복(輿服)의 내용을 보면 신분상의 존비의 구분을 위해 벼슬,의복과 수례를 신분에 따라 다르게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면모를 보였다. 또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한계도 보였다. 정적에 대한 대량 숙청 그의 스승인 이색부터 시작해 수많은 무고한 고려측 인물들을 대량으로 죄인으로 몰아 고문들과 살인들을 일삼았다. 태만한 정적 경계 임금인 태조 이성계가 중병으로 누워 있는 상황에서 정작 정도전 자신은 신료답지 않은 처신으로 남은의 첩의 집에서 당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고, 이런 상식 밖의 행동으로 이방원 측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오해 그가 이숭인의 재능을 시기해서 죽였다라는 이야기와 권근을 집요하게 죽일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이숭인의 문집인 '도은집'의 서문을 써 주었고, 이숭인 역시 정도전과의 우정을 다지는 시를 여러 편을 썼다. 또 권근은 그의 문집인 '삼봉집'의 서문과 '불씨잡변'의 서문을 써 주었고, 정도전 자신은 '삼봉집' 제 1권 '양촌부'에서 권근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기 때문이다.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면 이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는 이성계가 한 일을 정도전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조선왕조태조실록총설서를 보면 조선측에서 무고한 고려측 인물들을 고문하고 학살할때 이성계는 늘 관련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성계 자신이 사실상 임금인데, 이럴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안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집권후 역적으로 처리되어 있다가 500여년이 지난 고종대에 회복되었다. 다만, 정몽주가 죽을 당시에 간신으로 몰려죽었을때 그의 문집인 '포은집'의 모두가 불에 태워지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극히 일부의 자료들만 수집해 만들어져 '포은집'이 매우 엉성해 이로서 정몽주에 대한 연구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비해 정도전은 그의 문집인 '삼봉집'의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정도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또 삼봉집의 서문을 권근과 신숙주가 써주었고 조선 성종때 왕명으로 편찬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대 우리나라의 시,문장,상소,묘비문,묘지문,인물 전기,여행기 등을 집대성한 조선왕조의 공식 문서모음집인 동문선에 그에 관한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그를 인정하는 모습들을 보였고, 또 심지어 정도전의 죽음을 애도하고 정도전이 조선왕조에서 잘못한 것은 세자를 올바로 옹립하지 못한 잘못밖에 없었다고 애도한 진의귀의 시도 수록해 주었고정도전의 맏아들인 정진은 태종 이방원에게 용서 받아 관직 생활을 계속 했고, 결국 형조판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대접을 해주었고, 또 태종 이방원은 당시 아버지 이성계에 '양 정'이 있었는데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였고, 정도전은 자신의 부왕인 태조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둘 다 옳았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정도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았을때 조선 고종때 공식적으로 복권을 받았다고 해도 정도전이 조선왕조 500여년 내내 매도만 당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함을 알 수 있고, 또 이것들은 조선왕조가 정도전을 500년간 역적으로 매도해도 그의 모든 것들을 다 부인,조작할 수 없었다라는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정도전의 학문적 계보에서 이색은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색의 학통은 누구를 거쳐 누구에게로 이어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정도전과 이색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색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학통의 계보를 확인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정도전이 성균관에서 이색을 만났다는 점과 이색의 학통에 관한 정보를 추출한다.

    • 정도전은 그 뒤 성균관에서 대사성이자 성균박사 이색을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 대사성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보,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이색의 스승 격인 학통의 흐름과 정도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구절을 선별한다.

    •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
    •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학통의 흐름을 정리한다: 백이정 → 이제현 → 이색 순으로 이어지며,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생이다.

    •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이색은 정도전의 스승 격인 인물이며, 학통은 백이정, 이제현을 거쳐 이색에게 전달됨을 결론짓는다.

    •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이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맞춰 이색의 위치와 학통의 흐름을 기술한다.

    •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
최종 답변 (final_answer)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이색을 만나 성리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게 된 이색의 문하생이다. 이색의 학통은 백이정, 이제현 등을 거쳐 이색에게로 이어졌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정도전의 학문적 스승인 이색은 백이정, 이제현 등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정도전은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