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마천목(馬天牧, 1358년 ~ 1431년 3월 14일(음력 2월 1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군련(君戀), 호는 오천(梧川)이다. 대장군(大將軍)으로서 태종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도총제(都摠制),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사후 세종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綠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추증하였다.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에 위치한 마천목 묘와 재실이 전라남도 기념물 252호로 지정됐다.
생애 >> 어린 시절
충정공은 장흥의 속현이었던 회령 출신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는 공민왕 7년(1358)으로 정치적인 변화의 물결이 거센 무렵이었다. 마천목의 선대는 고려시대만 보면 마천린(馬天麟)은1361년(공민왕 10년)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 1등에 책록(策錄)되고 회성군(會城君)에 봉해졌다. 4대고조부 마희원(馬希援)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고 ,3대 고조부인 마중기(馬仲奇)는 1205년(고려 희종 원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마천목은 장흥 마씨 11세손이다. 부인은 목사 이빈(李彬)의 딸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마천목은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곡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어떻게 곡성으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머니가 평산 신씨였던 것으로 보아 곡성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그로 인해 곡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마천목의 효성은 어릴적부터 지극하고 간절하기로 유명하였고, 그런 깊은 효심이 도깨비를 감동시켰다는 섬진강 상류 두계천(杜溪川)에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리하여 도깨비들이 지은 것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보존되어 내려오는 한국 최고(最古)의 독살, 혹은 살뿌리라고 한다.
고려 말기
힘과 무예가 출중하여 23세 때인 우왕 7년(1381)에 산원(散員)이라는 정8품 무반직을 받았다.
마천목은 무관으로서 활동하면서 정지(鄭地)를 따랐다. 정지(鄭地)는 고려말 특히 공민왕 후반부터 우왕, 창왕대에 걸쳐 활동하였던 무인으로서 전라도 나주 출신이었음으로 마천목이 군인으로 활동하고 관직 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정지(鄭地)는 공민왕대 말기에서 우왕대초에 걸쳐 전라도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왜구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마천목이 군인으로 발탁되고 무관으로 진출하는 데에는 정지(鄭地)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마천목이 정지(鄭地)를 따랐던 것도 그러한 관계에서 빚어졌을 수 있다.
조선 초기
1381년(우왕 7) 산원(散員)에 초수(初授)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안군(靖安君)을 도와 공훈을 세웠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399년(정종 1) 상장군(上將軍)이 된다.
이듬해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정안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공헌,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면서 전(田) 80결(結), 노비 8구, 은품대(銀品帶) 1요(腰), 표리(表裏,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옷의 겉감과 안감) 1단, 말(丘馬, 司僕寺에서 기르는 궁중용 말) 1필, 구사(丘使, 공이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내리는 관노비, 扈從 업무담당) 3명, 직배파령(直拜把領, 임금이 공신에게 특별히 딸려준 군사) 6명을 하사받고, 회령군(會寧君)에 책봉되면서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하였다. 그에게 내려진 공신녹권(보물 제1469호)과 교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408년 11월에 회령군겸중군총제(會寧君兼中軍摠制), 이듬해 9월 감순청(監巡廳) 재직중에 전리(典吏) 고을귀(高乙貴)를 초달(招撻)하여 치사(致死)한 사건으로 사헌부의 청죄(請罪)를 받았으나 태종의 배려로 곡성(谷城)에 유배됨에 그쳤고, 그해 10월에 십일도도절제사(十一道都節制使)를 설치하면서 전라도도절제사에 복직되었다.
1411년 1월 각위절제사(各衛節制使)를 설치하면서 용기시위사절제사(龍騎侍衛司節制使)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전라도병마도절제사판나주목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判羅州牧使)로 파견되었으며, 1414년에 장흥군(長興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16년에는 도총제(都摠制)에 개수되었다가 곧 우군부판사(右軍府判事)가 되어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고, 1418년 2월에 내시위절제사(內侍衛節制使)가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좌우패(左右牌)를 좌우금위(左右禁衛)로 개편하면서 우금위절제사가 되었다.
1420년(조선 세종 2년)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병조판서 때 상소한 성보론(城堡論)에서 조선 초기에 처음으로 북방 6진(鎭)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1421년(세종 3) 명나라에 가서 조선의 승인에 공을 세워 태상왕(太上王)이 낙천정에서 치하연(致賀宴)을 베풀었다.
1423년 9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
1424년 3월 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곡성현으로 하향, 곧 어머니상을 치렀으며, 1428년 7월 장흥군에 복직되었다.
1429년 연로를 이유로 치사를 청하였으나 도리어 대광보국숭록대부(정1품)에 승진하여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영돈녕부사 겸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광심(廣深)하고 순근(醇謹)하며, 무략이 있어 시위와 국방에 공헌이 있었다.
사후
사후 세종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되고, 화산서원(禾山書院)과 충현사(忠顯祠)에 배향되었다.
세종실록의 장흥부원군 마천목 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전라병영성
1417년(태종 17년)에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한 강진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은 전라도의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은 조선초에 전라병영이 있던 지역이라 하여 마을 이름도 병영이라 하는데,지로·삼인·하고리 등 여러 마을이 인접해 있는 면소재지로 800여가구가 소 도읍을 이루고 있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전라도 최대의 군사주둔지였다.
조선시대 지방군제는 관찰사가 겸임하는 본영과 병마절도사가 관장하는 병영이 있었는데 전라도 본영은 전주에 있었고 병영은 오늘날 일개 면이 된 본군 병영면에 있었던 것이다.처음 전라도 병영은 광주에 있었으나 1417년(태종17년) 강진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이 무렵 국내 사정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옮겨가는 과도기로서 상당히 혼란했던 탓으로 왜구들의 침략이 잦아 연안 가까이 군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역성혁명에 의한 왕조의 전복위험성을 잘알고 있었던 태종은 가장 신뢰할만한 인물에게 군지휘권을 주었는데 심복이었던 마천목을 전라도병마절제사로 제수하였다. 마천목이 찹첩히 산을 이룬 수인산 허리에 도착해 이 일대를 둘러보며 성터를 잡기 위해 눈여겨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쉬고 있었다. 하루는 문득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백발노인이 앞에 나타나 활을 내놓으면서 활을 당겨 보라 하므로 활을 받아 시위를 당겼다. 시위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잠깐 졸고 있는 틈에 꿈을 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꿈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꿈에 화살이 날아간 자리를 찾아간 즉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마장군(馬將軍)이 이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동헌(東軒)이 앉을 만한 곳이었다. 그는 이곳을 병영의 중심으로 작정하고 성의 넓이를 요량해 보았으나 또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장군은 이 곳에서 하루 밤을 지냈는데 밤새 눈이 수북이 쌓였으나 동헌 자리를 중심으로 성터 안만은 눈이 쌓이지 않았다. 그는 「옳거니, 신이 내게 성곽 둘레를 알려준 것이다」며 병사들을 시켜 튼튼한 성(城)을 쌓아 올렸다.
이 같은 연유로 전라병영은 일명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전라병영성이 '설성(雪城)'이라고도 불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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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전라병영성의 별칭인 '설성'의 유래와 그 정의를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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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전라병영성 축조 과정에서 발생한 특이한 현상을 추출한다.
- 마장군은 이 곳에서 하루 밤을 지냈는데 밤새 눈이 수북이 쌓였으나 동헌 자리를 중심으로 성터 안만은 눈이 쌓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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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눈이 쌓이지 않은 현상이 성곽 축조의 근거가 되었음을 확인한다.
- 그는 「옳거니, 신이 내게 성곽 둘레를 알려준 것이다」
- 이 같은 연유로 전라병영은 일명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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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밤새 눈이 쌓였음에도 성터 안만 눈이 쌓이지 않은 현상 때문에 '설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음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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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눈이 쌓이지 않은 성터의 특징을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한다.
- 밤새 눈이 수북이 쌓였으나 동헌 자리를 중심으로 성터 안만은 눈이 쌓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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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문맥에 근거하여 서술형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밤새 눈이 수북이 쌓였으나 동헌 자리를 중심으로 성터 안만은 눈이 쌓이지 않았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마천목이 성터를 잡기 위해 하룻밤을 지낼 때, 밤새 눈이 수북이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동헌 자리를 중심으로 성터 안만은 눈이 쌓이지 않았던 현상 때문에 설성(雪城)이라고도 불린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전라병영성이 '설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밤새 눈이 수북이 쌓였음에도 동헌 자리를 중심으로 성터 안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던 현상에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