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이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외교에 있어서 특필해야할 점은 현재 분단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스스로를 중화민국에 대하여 "중국의 정통 정부"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구도 하에서, 건국 당시에는 완전히 공산 진영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 사망한 후 중소 대립을 거쳐, 1964년 1월에 프랑스와 수교 하였고, 1971년 10월 25일에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로 유엔에 가입과 동시에 상임이사국으로 인정받으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인 1971년 8월부터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진 결과, 1972년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국가주석 간의 정상회담이 이뤄진 이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보다 점차 국제무대의 주인공으로 부상하였다. 1979년부터 미국과 전격적으로 수교하는 등 자유 진영과의 관계회복을 이루었다. 또한, 냉전 하에 있어서 서방측 여러국가와 소련과의 대립 등 미묘한 관계 속에서모호,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 정부는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다"라는 주장을 다수의 서방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하나의 중국 원칙도 성공을 거두어 중화민국에 대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함으로써 소련-중국 간의 오랜 대립이 종지부를 찍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경제개혁으로 여러 나라와의 교류 관계도 강화하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도 가맹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을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며 중화민국 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 유엔 가맹국 중 14개국과 바티칸 시국은 현재까지 중화민국을 인정하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부탄은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화민국 모두와 외교 관계가 없다. 폴란드는 1949년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고, 양국은 10월 7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
주요 국가와의 관계 >> 중화민국
현재 분단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스스로가 ‘중국의 정통 정부’임을 주장하고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섬을 자국 영토인 23번째 타이완 성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중국 공산당이 차지하고 있는 중국 대륙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재수복 의지를 보이고 있다. 국공 내전으로 인한 분단과 냉전을 거치며 타이완 해협을 둘러싼 양안 관계는 항상 긴장과 완화를 반복해오고 있다.
대한민국
냉전 당시 대한민국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을 지원한 적성국이었다. 이런 과거사 문제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상호 보완적인 경제적 필요성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하여 활발한 민간 교역을 하면서도, 공식적인 외교 라인의 부재는 양국의 교역을 증대시키는 데 사실상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 관계를 맺기 이전의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한국 사람과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소련과 비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정치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에, 중국과 대한민국간의 무역량 증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관계의 향상은 더뎠다. 중국은 북한과 미국간, 북한과 일본간의 중재, 북한, 대한민국, 미국 3자간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1980년대 중공민항기 사건 이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민간 계약은 더욱 활발해졌다. 양국은 1980년대 말이 되면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다. 200만명에 가까운 한민족들, 특히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들(조선족)은 대한민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소동이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예상대로 중국 공산당의 억압적인 조치를 도왔다.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은 더욱 침묵했으나 1989년 톈안먼 사건을 부추긴 것도 그렇다고 비난한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교역은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1989년 12월 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 수교의 성공이 중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 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로 인해 한중 관계가 악화되었다. 1992년 8월부터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9년 10월 6일 양국은 정식으로 수교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였고, 1970년대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지를 어렵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1953년 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후 복구 과정도 도우면서 사상적 동지로서의 우호선린관계를 다짐하게 되었다.
미국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의 주력으로서 대한민국을 지원했던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1년 리처드 닉슨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시작으로 중미 양국의 고위급 인사가 상호 방문을 시작했고, 1979년에는 공식 관계를 수립하였다. 베이징 시에 미국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일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은 중화민국을 침략하였다. 이런 과거사 문제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의 관계는 초기에는 소원하였으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위해 서로 협력을 꾀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접근에 자극을 받은 일본 국내에서는 일중 국교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기본적으로 대중 자세를 바꾸지 않았으나, 이윽고 자민당의 총재 선출에서 일중국교정상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승리하였다. 다나카 총리는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함께 1972년 9월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과 회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는 것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국교정상화에 즈음하여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는데, 일본측은 "전쟁을 통하여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끼친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서술하였고, 중국측은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의 포기를 선언하였다.498 2006년 10월의 아베 총리의 방중 때에, 일중 간에는, "전략적 호혜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합의되었다. 공통의 전략적 이익에 기준을 둔 호혜관계가 그것이다. 종래, 서로 사용되지 않았던 "전략"이라고 하는 표현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 하다. 양국이 "전략"이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합의한 배경에는 일-중 관계를 양국관계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 대국적인 관점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중 양국이 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 함께 건설적인 공헌을 할 것을 통하여, 공통 이익을 확대시키고,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다. "전략적 호혜관계"는 2007년의 원자바오 총리의 방일, 후쿠다 총리의 방중, 2008년의 후진타오 방일에서도 이어지고 있어, 중일관계의 기본축이 되고 있다.
베트남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 대륙에는 한나라가 들어섰다. 그러자, 기원전 203년 진나라의 장수였던 찌에우 다가 번우(현, 광저우)를 수도로 하여 남월국을 건국하고, 남월 무왕(南越武王)을 자칭을 하였다. 독립 세력으로 성장한 찌에우 다는 남쪽으로 눈을 돌려 안드엉브엉의 툭판 왕조를 물리치고 아우락 부족을 남월국에 통합시켰다. 남월국은 최전성기에 오늘의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의 대부분과 푸젠성, 후난성, 구이저우성, 윈난성의 일부와 베트남 북부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고 있었다. 남월국은 기원전 111년 한나라의 한 무제에 의해 멸망하였으므로 베트남 북부 지역도 한나라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이로부터 10세기까지 간헐적인 독립 운동을 제외하고는 중국 세력의 통치가 지속되었다. 후한(23년~220년) 초기, 베트남에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했는데, 이것이 쯩 자매의 운동이다. 한나라를 재건한 광무제는 41년 복파장군 마원(馬援)을 보내었다. 마원은 42년에 쯩 자매를 처형하고 베트남 내의 중국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하였고 잔당 토벌 중 쯩 자매의 무리를 토벌하려던 41년의 전쟁 때 걸린 열병으로 49년 진영 내에서 사망했다.
938년 전쟁 끝에 중국에서 독립한 이래, 재복속을 노리는 몽골 제국, 명나라와 계속 전쟁을 벌여왔다. 939년 베트남의 응오꾸옌이 바익당 강(v=Bạch Đằng River)에서 남한(南漢)을 물리치고 10세기 이후에는 중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또한 한 세기 후에는 완전한 자치권도 얻어냈다. 나라 이름은 다이비엣이라 하였고, 리 왕조와 쩐 왕조 시기에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쩐 왕조 통치 동안 쩐흥다오는 원나라에 의한 몽골인의 침입을 무려 세 번(1285년과 1288년)씩이나 물리쳤다.
타이
타이족은 언어학적으로 중국 남부에 있는 여러 집단과 관련이 있다. 6세기와 7세기에 거쳐 중국 남부에서로부터 동남아시아로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캄보디아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캄보디아에는 기원전 2000년~1000년대 사이에 신석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은 주로 중국 동남부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13세기에 들어 원나라의 크메르 제국 침공이 시작되었다.
론 놀의 쿠데타 이후 시하누크는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해 캄푸차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반론놀 공동투쟁을 호소하였다. 그를 도와 캄보디아 귀국시킨 세력은 당시 모택동주의(마오이즘)에 심취한 폴 포트, 큐 삼판, 이엔 사리 등이 지휘하는 공산주의 세력 즉, 크메르루주였다. 10월 폴 포트는 시하누크를 옹립하고 론 놀 정권과의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1979년 2월에는 중국군이 캄보디아 침공의 보복으로 베트남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국은 실전 경험 풍부한 베트남군에 참패해, 3월에 철수하게 된다.
유럽 >> 러시아
청나라의 강희제(재위: 1661~1722년) 때, 러시아 제국이 강점한 네르친스크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을 체결하고, 스타노보이 산맥과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하였다.
영국
영국은 청나라와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적이 있으며,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 국교를 수립했다. 1971년에는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내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을 지지하였다. 1997년 영국령이었던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하였다.
파푸아 뉴기니
파푸아뉴기니와 중화인민공화국은, 파푸아 뉴기니가 독립하고 얼마 뒤인 1976년에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양국은 외교.cw경제적, 그리고 미약하나마 군사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관계는 우호적이다. 중국은 파푸아 뉴기니에 대한 중요한 투자국이자 개발 지원국이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서로의 영토에 대해 어떠한 관계를 주장하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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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 서로의 영토 및 정통성에 대해 주장하는 관계를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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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중화인민공화국의 주장과 중화민국의 주장을 각각 추출한다.
-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을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며 중화민국 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
-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스스로가 ‘중국의 정통 정부’임을 주장하고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섬을 자국 영토인 23번째 타이완 성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중국 공산당이 차지하고 있는 중국 대륙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재수복 의지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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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양측의 영토 및 정통성 주장에 관한 핵심 구절을 선별한다.
-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스스로가 ‘중국의 정통 정부’임을 주장하고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섬을 자국 영토인 23번째 타이완 성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중국 공산당이 차지하고 있는 중국 대륙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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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양측이 서로를 정통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점유한 지역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는 대립 관계임을 통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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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양측의 상호 부정적 관계와 영토 주장의 내용을 정리한다.
-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섬을 자국 영토인 23번째 타이완 성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중국 공산당이 차지하고 있는 중국 대륙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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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두 국가의 상반된 주장을 명확히 기술한다.
-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스스로가 ‘중국의 정통 정부’임을 주장하고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섬을 자국 영토인 23번째 타이완 성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중국 공산당이 차지하고 있는 중국 대륙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
최종 답변 (final_answer)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모두 스스로가 '중국의 정통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관계이다. 영토 측면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섬을 자국의 23번째 타이완 성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중화민국은 중국 공산당이 점유하고 있는 중국 대륙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며 재수복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스스로가 중국의 정통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영토적 입장에서 대립하는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