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이석문''(李碩文, [[1713년]] - [[1773년]])은 [[조선]] 후기의 무신, 군인이다. 본관은 [[성산]], 자는 사실 (士實), 호는 돈재(水+豚齋), 별호는 북비공(北扉公)이다. 임오화변 당시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죽게 되자, 세손 산(후일의 정조)을 도와 궐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1739년]](영조 15년) [[과거 제도|권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 행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별호 북비공은 그가 집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북비(北扉)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응와 [[이원조]]의 증조부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
== 생애 ==
이석문은 1713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 출신이다. 일찍이 전양군 이익필이 그의 재주를 높이 사 천거하였다. 뒤에 1739년(영조 15년) 권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742년 부장(部將)이 되었다가 1744년 병으로 사직하고, 1747년 다시 부장에 임명되었다. [[김상로]], [[홍계희]] 등이 그를 만나보려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이들을 거절한 일로 평안도 [[강계군]] 추파진(楸坡鎭) [[권관]]으로 발령되었다.
추파진 권관 재직 중 직속상관 안주진관 병마사 채삼의 비리에 분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1750년]](영조 26년) [[4월]] 신방구비만호로 승진하여 변방으로 갔고, 그해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에게 특별 발탁되어 어모장군 행무신겸 [[선전관]]에 기용되었다가, 금부도사가 되었다.
[[1756년]] 강계군 추파진 만호로 승진하여 다시 돌아갔다. 이때 김상로, 홍계희 등이 그에게 사람들을 보내 시의를 따르면 [[병마절도사]]직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그는 나는 시골 사람이라 시류를 모른다며 거절했다.
"나는 영남에 사는 사람이라 시의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뒤에 선략장군 행[[군자감]]주부로 강등되었다.
[[1762년]](영조 38년) 봄 다시 무겸선전관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음력]] [[윤 5월 13일]]에 [[영조]]가 [[조선 장조|사도세자]]를 [[뒤주]]에 들어가라 하자, 그는 어린 [[정조|세손 산]]을 도와 입궐하려 했으나, [[수문장]]들이 이를 저지하였다. 그는 세손을 등에 업고 수문장들을 밀친뒤 세손을 궁으로 들여보냈다. 세손이 영조에게 가서 아비를 살려달라고 구원을 청하였다. 세손은 곧 끌려나갔고, 그는 5월 14일 삭탈관직당하고 의금부로 끌려갔다. 영조는 [[의금부]]에서 그를 친히 직접 국문한 뒤, 곤장50도를 가하고 쫓아냈다. 이 일로 그는 모든 도구를 버리고(盡散宦具),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지어 바치고 낙향하였다.
이후 그는 북비라 하는 집에 은거하였다. 그의 사촌 이석구가 건너편에 살았는데, 후일 김상로, 홍계희의 무리가 이곳을 지나가거나, 이석구의 집을 방문할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그의 집앞을 지나가자 그는 이들을 피하고자 문을 뜯어 북쪽으로 여닫이문을 냈다고도 하고,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여닫이 문을 북쪽으로 옮겼다고도 한다.
사도세자 처분을 후회한 영조는 그를 다시 [[훈련원]][[주부]]로 제수하고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뜻을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구차하게 굴복된다면 무엇이 그 사람에게 귀하겠습니까? 나는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무공도 세우지 못하였고 사헌부를 드나들며 간신을 베어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지도 못했으니 저의 뜻은 끝내 펼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초야에 묻혀 편안히 쉬면서 유유자적하겠습니다'라며 거절하엤다.
영조는 [[병조판서]] [[채제공]], 이지억 등이 여러번 편지를 보내, [[한성]]에 올라오면 승진을 약속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였다.
그는 무괴심(無愧心),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이라는 글을 짓고 평생 은거하였다. 만년에 그는 북쪽으로 옮긴 문을 향해 절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1773년]] 한개마을 정침에서 사망하자, 채제공은 직접 경상도 감영을 찾아 그의 장례식을 지원하고, 수백 명의 인파가 문상하였다. 후에 그의 손자 [[이규진]]이 [[성균관]]의 제과에 선발되자 [[정조]]는 이규진을 특별히 입시하게 하여 직접 이규진을 만나 북비 대문의 일을 물어보았다.
=== 사후 ===
1849년 증 어모장군 훈련원정에 증직되었다가, 1871년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다시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로 여러번 증직되었다.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성주군|성주]][[군수]]를 보내 그의 가묘에 치제하고, 그의 6대손 기진에게 특별히 [[효릉]][[참봉]]직을 제수하였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이석문의 별호인 '북비공(北扉公)'은 무엇에서 유래하였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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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이석문의 별호인 '북비공'의 정의와 그 유래를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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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본문에서 '북비공'이라는 별호와 관련된 내용을 탐색한다.
- 별호는 북비공(北扉公)이다.
- 별호 북비공은 그가 집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북비(北扉)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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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별호의 유래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을 선택한다.
- 별호 북비공은 그가 집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북비(北扉)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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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이석문이 집 문을 북쪽으로 옮긴 행위와 '북비'라는 명칭 사이의 인과관계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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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문을 북쪽으로 옮긴 행위가 별호의 근거임을 정리한다.
- 그가 집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북비(北扉)라 부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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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유래를 명확하게 서술하여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 그가 집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북비(北扉)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이석문의 별호인 북비공은 그가 집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이를 북비(北扉)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이석문의 별호인 북비공은 그가 집 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북비라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