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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 document_id A220623167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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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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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context)
''조선 천주교 박해''는 조선 말기에 천주교가 정치 권력에 의해 종교적 박해를 받은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개화기 천주교를 접한 조선의 반응은 유학의 한계성을 극복할 새로운 사상으로서 취급됨과 동시에 박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조상 제사 거부라는 천주교의 교리는 박해의 좋은 명분이 되었고 정치 권력 집단은 정적 숙청과 권력유지의 수단으로써 천주교 박해를 악용했다. 조선 말기 천주교 순교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병인박해의 주인공인 흥선대원군은 본래 천주교를 탄압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자 사교에 대한 금지령을 내려 전국을 피바다로 물들게 하면서 천주교도들을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의 원인중 하나는 로마 교황청의 교리혼선에 있다. 1656년에 허용되었던 제사문화가 1715년에 불허된후 1939년에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칙서가 발표될때까지 혼란은 지속되었다. 또한 천주교 박해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프랑스 등 서양열강에 의해 제국주의 확장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초기 한두차례의 박해사건으로 인해 천주교가 종교적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자 많은 양반 출신 신자들이 배교를 통해 빠져나갔다. 그 틈새는 중인과 평민, 여성들이 메워나갔는데,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도(천주학 죄인) 색출 임무를 맡았던 해미읍성에서는 끌려온 인원이 너무 많자 시체 처리의 편의를 위해 1,000여명을 대상으로 집단 생매장이라는 잔인한 방법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1866년에는 먼저 처형후 조정에 보고하는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이 내려진터라 처형을 집행한뒤 보고를 누락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로인해 이름없는 순교자들이 많아 정확한 순교인원은 헤아릴수 없는 실정이다. == 천주교 전래 == === 천주학의 보급 ===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초기에는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 이런 연유로 인해 [[18세기]]에 조선 사대부의 서가에는 [[도덕경]]과 같이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기독교]] 변증서 [[천주실의]]가 꽂혀 있었다. 보유론(補儒論)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 전교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다. 점차 천주학이 종교로 받아들여지며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1784년 이승훈에 의해 조선 최초의 신앙모임이 만들어진 이래 탄압과 박해가 있었음에도 경기와 충청 내포(內浦)지방,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증가하였다. === 문화 충돌 === [[조선 정조|정조]](1776~1800)는 정도(正道)인 [[유교|유학]]이 흥하면 사교(邪敎)인 천주교는 소멸될것이라 하면서 천주교를 묵인하였다. 이런 관대한 정책으로 인해 천주교는 점차 민중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제사를 금지하는 천주교 문화는 관혼상제 문화가 매우 발달한 조선의 장례문화와 정면충돌을 일으켰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지난 1656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알렉산데르 7세]] 교황의 선언을 뒤집으며 일대 혼란을 야기하는 조치로, 이후 조상제사 거부라는 항목은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로 십분활용되었다. === 천주교의 시초 === 천주학은 주로 관직사회에서 소외된 남인의 소장파 학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탐구했다. [[정약용]], [[이승훈 (1756년)|이승훈,]] 권철신 등은 외딴 절에 함께 들어가 강학회를 열기도 했으며 이를 계기로 실천학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료 부족으로 항상 연구의 한계를 절감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던중 [[1783년]](정조 7) 이승훈이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가게 되었다. 여러날 북경 남천주당에 찾아가 [[교리]]를 배우던 이승훈은 신묘한 가르침에 끌려 세례까지 받았다.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매우 놀라와했다. 선교사가 가서 찾아보지도 않은 미교화국의 젊은 청년이 자진하여 찾아와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사례는 로마 카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 (1756년)|이승훈]]은 [[1784년]] [[4월 13일|4월]], 성서, [[성상]], [[묵주]]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귀국후 [[이승훈 (1756년)|이승훈]]은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전교에 힘썼다. == 명례방 사건 (1785년) == 1786년 [[이승훈 (1756년)|이승훈]]은 자치교회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790년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사도적 계승을 받은 성직자 없이 [[가성직제도|가성직제]]하에 교회를 운영하는것은 교회법 위반이라는 것을 알려왔다. 아울러 지난 1715년 교황의 선언을 근거로 하여 조선 천주교도들에게 제사금지령을 내렸다. 이로인해 순교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선 영조|영조]] 때에도 천주교도가 된 양반중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자들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무지의 소치로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1791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정쟁의 대상이 되며 천주교 탄압(신해박해)으로 이어졌다. == 신해박해 (1791년) == [[조선 정조|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참수한후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신해박해를 필두로 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 탄압은 [[을묘박해]], [[신유박해]], [[을해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가 자행되어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천주학 죄인' 또는 '천주학 쟁이'라고 비난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리는 불행한 역사로 이어졌다. 제사거부는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고 천주교는 정치 권력다툼의 희생양으로 악용되기 시작했다. 천주교가 박해의 대상이 되자 양반계층 교인들은 배교하였다. 그 공백은 중인계층이 메워나갔는데, 이는 견문과 지식이 양반 못지않았음에도 사회적 지위 상승의 한계에 부딪친 중인들이 평등을 내세운 천주교에 쉽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한편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점차 성장하자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선교사 영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 을묘박해 (1795년) == 1795년 6월, 은밀하게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가 있다는 제보를 받은 포도청은 그를 체포하려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사건 관련자인 최인길, [[윤유일]], 지황 3인을 끌고가서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했으나 이들이 끝까지 함구하자 모진 매질을 가하여 끝내 옥사하게 만들었다. 포졸들이 선교사의 은신처를 덮쳤을때 그 집의 주인인 역관 최인길이 선교사 행세를 하며 대신 체포되었고 그가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선교사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최인길이 가짜임을 알았지만 도망친 선교사 [[주문모]]의 행방은 알수 없었다. 주문모는 중국교회에서 조선에 파송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였는데,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조선 천주교도들이 중국교회에 요청하여 영입에 성공한 중국인 신부였다. 1791년 [[신해박해]]로 선교사 영입이 보류된적이 있었으나 역관 [[윤유일]]이 1792년에 중국에 세번째로 밀파되어 재차 요청하였고 1795년이 되어서야 성사되었다. 1795년 1월에 서울에 잠입하는데 성공한 주문모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 숨어지내며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은밀하게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중 밀고로 인해 체포령이 떨어지면서 도망자 신세가 된것이다. 조용히 지나가는듯하던 사건은 2개월 뒤인 1791년 8월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 체포의 기회를 놓쳤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 (1756년)|이승훈]]·[[이가환]]·정약용이 주문모 도주사건에 연류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마침내 정조는 이들에 대한 심문을 허락하였는데, 그 결과 이승훈은 유배되었고, 이가환과 정약용은 좌천되었다. 한편 포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숨어지냈으며 [[정약종]]과 [[강완숙]]의 도움을 받으며 은밀하게 전개한 전교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1794년에 4,000명이었던 교인수가 1800년에는 1만명을 육박하게 되었다. == 신유박해 (1801년) == == 을해박해 (1815년) == == 기해박해 (1839년) == == 병오박해 (1846년) == == 병인박해 (1866년) == 흥선대원군은 1866년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였다.^{[7]} 2월에 베르뇌를 비롯한 홍봉부, 남종삼, 김면호를 포함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다.^{[8]} 1872년까지 6년간 진행된 탄압으로 전국에 걸쳐 약 8천여명 이상이 순교했다.^{[9][10]} 박해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더욱 심해졌는데 특히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남연군 분묘 도굴]] 만행이 벌어지자 박해의 정도가 더욱 거세졌다. == 신앙의 자유 == == 각주 ==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조선 초기 천주교가 전래되었을 당시, 천주교는 어떤 개념으로 인식되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조선 초기 천주교가 종교가 아닌 어떤 개념으로 불리고 취급되었는지 정의를 확인해야 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천주교 전래 초기 단계에 대한 설명 부분을 탐색한다.

    •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초기에는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천주교의 초기 인식에 대한 직접적인 문구를 선별한다.

    •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추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초기 인식의 성격을 정리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종교가 아닌 학문 및 서양문물로 여겨졌음을 결론 도출한다.

    •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한 답변을 문맥에 맞게 작성한다.

    •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조선 초기 천주교는 종교가 아니라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조선 초기 천주교는 종교가 아니라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