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본 논문은 하이데거의 숙고가 철학사에서 가지는 위치를, 그의 ‘사유’ 개념을 통해 밝히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그의 ‘사유’ 개념을 하이데거의 사유 지평 내에서 명료화하는 다른 연구들과는 달리, 하이데거를 전후한 존재론들과의 연속선 위에서 고찰한다. 이 논문은 존재론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두 가지에 유의했다. 먼저 ‘사유’와 그 ‘너머’와의 관계에 천착함으로써 인식론과 존재론의 경계에서 숙고한 존재론들을 선별했고 하이데거의 사유와 관련된 다른 해석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그리고 ‘사유’를 강조하는 입장에 흔히 주어지는 ‘인간주의’의 혐의나 이를 넘어서려는 ‘반인간주의’의 시도를 현대 철학의 주요한 흐름으로 보고 이러한 흐름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규정하기 좋은 존재론들을 선별했다. 다양한 선택지들 중에서 특히 들뢰즈와 메이야수에게 주목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본고는 먼저 하이데거가 기본적으로 ‘상관주의적’이면서도 기존의 주관주의와는 달리 사유와 그 ‘너머’의 관계에 대한 감각을 유지했던 칸트와 후설을 이어받아, 재현적 사유와 비재현적 사유의 구별과 함께 그 동근원성을 숙고했음을 살핀다. 나아가 사유의 외부, 근거로서의 ‘존재 자체’를 본격적 물음거리로 삼아 존재론을 펼치는 방식으로, 그의 스승들을 넘어섰음을 밝힌다.그러나 하이데거 이후 존재론자들의 관점에서는, 사유의 외부인 존재가 사유를 통해서만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사유 의존적’인 것은 심각한 결함이다. 본 논문은 들뢰즈와 메이야수를, 정반대의 전략을 행사하는 두 비판으로서 취하고, 이들 철학자들의 견해를 진지하게 검토한다. 그리고 두 철학자의 대안은 하이데거의 결함에 대한 충분한 해소책이 될 수 없음을 보이게 된다. 이들의 사유는 정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숙고와 결정으로 몰아넣은 사태 자체, 즉 ‘사유와 존재의 긴장관계’라는 사태 자체를 문제적 사태로서 견지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해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본 논문은 궁극적으로 들뢰즈와 메이야수가 가졌던 정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가 칸트와 후설에 맞서 이룩했던 독창적인 문제의식과 나름의 해법은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존재의 사유 의존성을 제시한다는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숙고해야만 할 문제를 ‘문제’로서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철학사에서 갖는 자리는 아직 과거가 아니라 생생한 현재 속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 본 논문의 최종적 목적이다 칸트와 후설의 초월철학은 우리의 사유가 현상에 대해 갖는 권리를 인정하되 현상을 단순히 주관이 고안해낸 산물로 환원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인간의 사유를 현상과 관계하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사유와 현상너머와 관계하는 초월론적인 사유로 나누어 고찰했다. 그들에게는 이 두 사유의 구분적 통일의문제가 곧 인간사유와 현상이 그 너머와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명백히 구분적 통일을 이루는 사유를 통해, 즉 현상과 그 너머의 관계가 일어나도록 지탱하는 사유의 이중적 성격을 통해 이러한 물음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초월철학을 계승한다. 그러나 그 너머와의 관계 안에 있는 ‘사유’를 숙고한다는 제한을 넘어서지 않은 초월철학과 달리, 하이데거는 사유의 ‘근거’를 긴급한 물음거리로 받아들임으로써 초월철학의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려 시도한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명백히 ‘상관주의적’인 성격을 갖는다. 물론 하이데거가 초월철학자들에 비해 명백히 사유에 대해 존재의‘외부성’을 지켜내려고 애썼다는 사실은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 이후 철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그러한 노력 속에서 존재를 여전히 ‘사유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존재의 사유 의존성을 거부하는 들뢰즈에게 하이데거의 “사유”라는 개념은 진리의 현장에서 그릇되게 재현적 사유를 보존한다. 차이 자체는 재현적 사유에 대응하는 존재에 앞서는 것으로 숙고되어야 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자신의 차이 개념을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존재”를 다름 아니라 재현적 사유의 활동에 대응하는 것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은 분명히 재현적 사유의 산물인 존재자의 존재 이상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재현적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존재가 아니라 차이에 더 가깝다. 결국 두 철학자의 차이는 재현적 사유에 대한 평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는 재현적 사유를 비재현적 사유와는 전혀 같지 않은 것으로서, 차이 자체의 발생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차이 자체의 발생을 사유의 규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물리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사유를 제거함으로써 차이의 발생을 물리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식은 만족스럽지 않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첫째, 모순 때문에 수용하기 어렵다. 여기서두 종류의 사유를 구분하고 그 중 하나를 구하려는 그의 전략은 실패한다. 재현적 사유를 차이의 발생에서 제거할 수 있도록 차이에 부여한 성격 때문에, 그의 숙고에서는 비재현적 사유 역시사실상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여 유명무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재현적 사유를 제거하기 위해 비재현적 사유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이처럼 사유 없는 차이의 발생을 숙고하는 그의 대답은 애초에 우리가 직면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태 자체가 우리의 ‘사유’와 그 ‘외부’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상관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사유를 제거함으로써 사유와 외부의 긴장된 경계라는 문제가 되는 그 현장을 회피하고 ‘자동적인’ 발생만을 다루기 때문에, 하이데거를 대체할 만큼 효과적인 비판일 수가 없다. 메이야수 역시 하이데거를 상대로 삼아, 상관주의와 형이상학에 묶이지 않은 ‘즉자’를 숙고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즉자를 어떤 식으로든 실체화하지 않기를 원하며, 무한히 발생하는 차이라는 들뢰즈의 개념 역시 거부한다. 그에게는 들뢰즈의 차이 역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존재의 이유를 갖는다는 이성의 원리에 입각한 일종의 근거로서, 결코 ‘즉자’가 아니다. 있는 것은 이유 없이 있고 따라서 항상 다를 수 있다.그렇다면, ‘즉자’는 존재자들의 존재가 필연적이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비이성의원리에 입각하여 즉자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을 획득하게 된다. 헤겔에서 보듯 모순적인 것은 필연적이므로, 필연적 우연성의 원천인 즉자 역시 비모순적이어야 하며, 불가피하게 “우리가 사유하는 대로” 존재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과학과 수학적 진술을 복권한다. 그러나 첫째, 절대적 즉자에 대한 지식은 정당화되지 않은 ‘비이성의 원리’를 전제로 추론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이유 없이’ 있다는 이 원리는 인간의 무지를 객관화함으로써 얻어진다. 물론 우리의 사유 너머를 사색하고 있는 모든 형이상학이 그 무지를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 원리를 내놓으면서 메이야수는 경계의 감각을 잃는다. 그는 표상적, 재현적사고의 한계를 절대적인 지식으로 전환시키고 있으며, 그 ‘한계’의의미를 치열하게 숙고하려는 형이상학의 노력을 가볍게 여긴다. 그 대가로 그는 철학과 재현적 사고의 간격을 제거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들뢰즈와 정반대로, 재현적 사고를 구하는데 그치게 된다. 둘째, 이렇게 숙고된 즉자가 상관주의의 틀을 벗어난 즉자인지는 의문스럽다. 메이야수가 우연성의 ‘필연성’을 숙고한 것은, 실질적인 결정을 내리는 재현적 사유를, 비판을 통해 복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재현적 사유에 의해 포착되는 필연성이 과연 즉자의 것인지, 혹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것은 아닌지 따져보아야 한다. 메이야수의 존재론은 상관주의를 넘어서려는 정당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즉자를 즉자로 견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상관주의의 또 다른 전도된 사례가 될 뿐이다.이렇게 볼 때, 오늘날 하이데거의 고유성은 무엇보다 사유의 동근원적 이중성을 변주하는 방식으로, 사유와 그 근거 사이의‘긴장’을 참된 물음거리로 견지했다는 데 있다. 하이데거 이후의존재론이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의 사유 의존성을 문제로 제기하고 이에 맞서 소위 현상 이전의 객관을 숙고했다는 점에서 이룬 진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해결책은 ‘문제’를 ‘문제’로서 견지하지 못하고 그 문제의 현장에서 상호 공속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각자 인간의 사유를 반쪽짜리로 만드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의 사유는 그들이 그려내는 것보다 복합적이고 그런 한에서만 사유 너머와의 관계다. 그래서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해가는 철학사에서 하이데거의 위치는 우리가 흔히 가정하는 것보다 더 현재적이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편에서 하이데거의 해법과 싸워야만 한다. 더 이상 형이상학적 규정에 묶이지 않고 근거의 존재 방식을 숙고하는 것, 그러나 인간에게 현상하는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사우에 가능한 일과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돌아보는 일이, 하이데거가 던진 문제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들뢰즈와 메이야수의 존재론적 대안이 하이데거의 결함에 대한 충분한 해소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
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들뢰즈와 메이야수의 철학적 대안이 하이데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파악해야 한다.
- 두 철학자의 대안은 하이데거의 결함에 대한 충분한 해소책이 될 수 없음을 보이게 된다.
-
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두 철학자가 공통적으로 취하고 있는 전략적 오류를 추출한다.
- 이들의 사유는 정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숙고와 결정으로 몰아넣은 사태 자체, 즉 ‘사유와 존재의 긴장관계’라는 사태 자체를 문제적 사태로서 견지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해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
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왜 부적절한지에 대한 핵심 근거를 선별한다.
- 그들은 각자 인간의 사유를 반쪽짜리로 만드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다.
-
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들뢰즈는 사유를 제거함으로써, 메이야수는 재현적 사고를 복권함으로써 각각 사유와 외부의 긴장 관계를 해체한다는 점을 연결한다.
- 사유를 제거함으로써 사유와 외부의 긴장된 경계라는 문제가 되는 그 현장을 회피
- 그는 표상적, 재현적사고의 한계를 절대적인 지식으로 전환시키고 있으며, 그 ‘한계’의의미를 치열하게 숙고하려는 형이상학의 노력을 가볍게 여긴다. 그 대가로 그는 철학과 재현적 사고의 간격을 제거하고 만다.
-
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두 철학자가 문제의 핵심인 '사유와 존재의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문제를 구성하는 요소(사유 등)를 제거하거나 변형하여 문제를 회피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사유와 존재의 긴장관계’라는 사태 자체를 문제적 사태로서 견지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해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
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정리된 답변을 작성한다.
- 이들의 사유는 정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숙고와 결정으로 몰아넣은 사태 자체, 즉 ‘사유와 존재의 긴장관계’라는 사태 자체를 문제적 사태로서 견지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해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들뢰즈와 메이야수의 대안은 하이데거가 직면했던 '사유와 존재의 긴장관계'라는 사태 자체를 문제적 사태로서 견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들뢰즈는 사유를 제거함으로써 사유와 외부의 긴장된 경계라는 현장을 회피하고, 메이야수는 재현적 사고의 한계를 절대적 지식으로 전환하여 철학과 재현적 사고의 간격을 제거함으로써 결국 문제를 해소하려 한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들뢰즈와 메이야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한계인 사유 의존성을 비판하면서도, 문제의 핵심인 사유와 존재의 긴장 관계를 문제적 사태로 견지하지 못하고 구성 요소를 제거하는 해법을 취함으로써 충분한 해소책이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