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데이터 · 한국어 지식관계

조선시대 太白山 제사의 변화 양상 document_id A220623169743

분류
인문학
라벨 상태 (label_status)
approved
문맥 (context)
그동안 조선시대의 국가제사 연구는 왕조실록 등의 관찬 사료를 중심으로 하여 연구가 진행되어 태백산 제사에 대한 구체적 양상을 알 수가없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 변화가 나타나 가뭄이 계속되자 중종이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영험이있는 곳에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태백산이 국가 사전에 올라 지방관들이 태백산과용담에 기우제를 지내고 기우제문을 남겼다. 삼척부사 허목은 무당들에의해 이루어진 기우제를 음사로 홀대하지 않고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하여 행하여졌다는 사실을 보이고 있다.또한 신후재가 안동부사 시절에 지은 이 규정집에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태백산이 국가 사전에 올라있어서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예조 정랑을 지낸 이 유가 남긴 태백산 이 그의 유고집인 용포선생문집에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용담이 국가의 사전에 있어서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적어도 17세기에는 태백산과 용담이국가 사전에 올라 국가 제사의 편제속에서 제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있다. 백두산,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 계룡산 등을 조선의 5 대 명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고종 29년 6월 17일부터 윤 6월 6일까지 안동도호부사인 김가진이 20일에 걸쳐 모두 아홉 번의 기우제를 지냈으나 다른 곳의 기우제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태백산 기우제에서는 큰비가 내려안동도호부사의 권위도 서고 백성들이 매우 흡족해하였다 하였으니 조선말기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태백산 제사에 대한 영험성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태백산에서 천제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진 전통이 개화기를 거쳐일제시대에도 천제를 지냈으며, 광복이후 현재까지 천제가 이루어지고있는 것이다.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사직단과 선농단 등 유교적인 제장뿐만 아니라 관왕묘와 같은 도교적인 제장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는 점이다. 또한학가산 기우제는 애련사 윗편에 있는 국사봉에서, 태백산 기우제는 각화사 윗편에 있는 제단에서 제의를 거행하였다. 이는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유・불・선 삼교의 제장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가산의 국사봉과 갈라산의 문필봉은 산의 정상이므로 민간뿐만 아니라 관에서도 산 정상에서 국가적 제의를 지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 변화가 나타나 가뭄이 계속되자 중종이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영험이 있는 곳에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중기에는 안동도호부사 정구가 선조 4년 기우제를 직접 지내지는 않았지만 제문을 짓고 유생들로 하여금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태백산이 국가 사전에 올라 지방관들이 태백산과 한강의 발원지인 용담에 기우제를 지내고 기우제문을 남겼다. 허목은 무당들에 의해 이루어진 기우제를 음사로 홀대하지 않고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하여 행하여졌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 이는 유자들이 민간제의를 음사로서 비판하였다는 통념과는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후재가 안동부사 시절에 지은 이 규정집에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태백산이 국가 사전에 올라있어서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태백산이 사전에 올라 국가제의의 틀 안에서 기우제가 행해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조 정랑을 지낸 이 유가 남긴 태백산 이 그의 유고집인 용포선생문집에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용담이 국가의 사전에 있어서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적어도 17세기에는 태백산과 용담이 국가 사전에 올라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태백산이 신라의 북악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영남지방의 진산이라는 것을 밝히며 비가 오기를 빌고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태백산과 용담이 국가의 사전에 올라 국가 제사의 편제 속에서 제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선친 김응균이 안동도호부사 재임시절에 기우제를 지낸 기록을 보고 그 순서대로 기우제를 지냈다. 고종 29년 6월 17일부터 윤 6월 6일까지 안동도호부사인 김가진이 20일에 걸쳐 250~300여 리를 다니며 모두 아홉 번의 기우제를 지냈으나 다른 곳의 기우제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태백산 기우제에서는 큰비가 내려 안동도호부사의 권위도 서고 백성들이 매우 흡족해하였다 하였으니 조선 말기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태백산 제사에 대한 영험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태백산에서 천제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진 전통이 개화기를 거쳐 일제시대에도 천제를 지냈으며, 광복이후 현재까지 천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사직단과 선농단 등 유교적인 제장뿐만 아니라 관왕묘와 같은 도교적인 제장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는 점이다. 유교와 불교 및 도교의 유・불・선 삼교의 제장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조선시대 기우제 수행 양상 중 유자들이 민간제의를 음사로서 비판했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배치되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유교적 통념(민간제의 비판)과 실제 조선시대 기우제 양상의 차이점을 묻는 질문임을 파악한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민간제의와 유교식 기우제의 공존에 관한 기록을 추출한다.

    • 삼척부사 허목은 무당들에의해 이루어진 기우제를 음사로 홀대하지 않고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하여 행하여졌다는 사실을 보이고 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통념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핵심 근거인 허목의 사례를 선별한다.

    • 이는 유자들이 민간제의를 음사로서 비판하였다는 통념과는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허목이 무속식 기우제를 음사로 홀대하지 않고 유교식 기우제와 공존시켰다는 점이 통념을 반박하는 근거임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허목의 사례를 통해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했음을 결론짓는다.

    •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하여 행하여졌다는 사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대해 허목의 사례를 중심으로 답변을 작성한다.

    • 삼척부사 허목은 무당들에의해 이루어진 기우제를 음사로 홀대하지 않고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하여 행하여졌다는 사실을 보이고 있다.
최종 답변 (final_answer)
삼척부사 허목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무당들에 의해 이루어진 기우제를 음사로 홀대하지 않았으며,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하여 행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유자들이 민간제의를 음사로서 비판했다는 통념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삼척부사 허목은 무당들에 의해 이루어진 기우제를 음사로 홀대하지 않고 민간의 무속식 기우제와 지방관의 유교식 기우제가 공존하여 행하여졌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