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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정변 document_id A22062319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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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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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context)
5·16 군사혁명(5·16 軍事革命)은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961년 5월 18일 정오 무렵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김포, 부평, 수색, 포천 등에서 임시적 군정 실시를 목적으로 일어난 군사 반란 성격의 정변를 말한다. 제6군단 포병단 5개 대대 3,000여 명과 제5사단(사단장 채명신 준장이 이끌고 서울 진주), 제12사단(사단장 박춘신 준장과 부사단장 및 작전참모가 이끌고 춘천 진주), 제30사단(부사단장, 작전참모, 헌병부장이 사단 이끌고 서울 진주), 제33사단(작전참모, 연대장 등이 이끌고 서울 진주), 그리고 2군을 비롯한 지방에 있던 여러 장교들까지 수만 명에 이르렀다. <heading>혁명의 원인 </heading> 5.16의 발단은 정군 운동이었다. 이는 곧이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5.16 주체세력의 핵심 멤버 육사 8기생 9명이 분열된 상태로 무능한 국정운영을 펼치고 있는 민주당 세력을 제거해 군정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그해 말에 이르면 박정희 장군을 혁명의 지도자로 세우자는 데에 합의하였다. 박정희 장군은 만주군관학교 인맥, 군내 인맥 등을 이용해 장경순, 한웅진, 채명신, 이주일 등 자신과 알고 지내던 육군 장성과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등을 거사에 끌어들였고 김형욱 등이 육본에서 동지들을 작전참모로 추천하면 부관감실에서 근무하던 오치성이 인사발령을 내는 방식과 포섭한 동지의 인맥을 이용해 2차·3차 포섭하는 방식으로 제30사단, 제33사단장, 문재준과 6군단 포병단, 공수특전단 등을 포섭해 나갔다.이 과정에서 제1201야전공병대 포섭은 실패해였다 따라서 조직은 포섭될만한 이들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조직되었다. 그러는 동안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였던 장면은 이러한 정보를 조금씩 보고받거나 입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형욱 등은 전라도 국회의원들이 육군 장성들과 결합해 서울 인근 부대들을 포섭하려 한다는 소문, 족청계 장성들을 중심으로 일선 부대가 거사할 것이라는 소문 등 역정보를 3중, 4중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2군 부사령관 박정희와 육본과 후방 부대들을 동원해 거사하는데 육군참모총장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유포되어 장도영과 장면에게 각각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5.16혁명 세력은 전화, 모임에서 사장, 전무, 공사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사업으로 위장함으로써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막연한 혁명설만으로 장성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러려면 장도영이 장도영 스스로를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면과 장도영은 각각 검찰과 군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근거를 잡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나 근거는 전무하였다. 오히려 군경합동수사 결과 체포된 김덕승은 허위진술을 해버렸다.장도영 역시 백운상 대령을 대구로 내려보내 근거를 수집케 하였으나 혁명을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 정보국과 장총리의 고문이였던 위태커는 정보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거라 보았지만 실상은 장도영도 육군방첩대장 이철희 준장에게 속아넘어가고 있었다. 이후 박정희는 해병대를 끌어들이는 한편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의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 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5.16은 발각되지 않고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된다. 4.19항쟁 이후의 정치권과 사회의 불안정함, 기득권과 이익집단 및 군의 애국적이며 개혁적인 경향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장군을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있다고 했다. <heading>전개 >> 정변 초기 </heading>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3-5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부사관과 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박정희 소장이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는 의원내각제이었던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국군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새벽 4시경 미국 대사관으로 향해 군사 세력을 진압하려 했지만 직원이 부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카르멜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수차례 미국에 사태 진압을 요청했다.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하였다. 혁명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heading>윤보선 대통령의 행동 </heading> 윤보선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합법 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장도영 등 혁명 주모자를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고 한다.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비롯한 각 부서의 장관, 차관, 처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가택에서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형식으로 청와대에 끌려왔다. 이때 민주당 신파의 각료인 정일형, 현석호 등은 윤보선의 발언을 듣고 경악한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윤보선의 사임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 밤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임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 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임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당일 오후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 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혁명세력은 특수범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heading>국가재건최고회의 </heading>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미국과의 동맹강화·구악일소·경제재건 등을 공약으로 5·16 군사 혁명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의 마침표를 찍었다. 5월 16일 직후 박정희 소장은 혁명 초기 상황이 유동적일 때 혁명 주체들에게는 든든한 의지처였고 反혁명세력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치하한 공수특전단을 덕수궁에 주둔시킨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18일 혁명 발생 이후로 생도들의 외출도 금지시키던 육군사관학교장은 전두환 대위가 앞장서며 연금을 당하고 사관생도들은 모두 강제로 트럭에 태워져서 탑승한 채로 시내 중심가에서 국회 앞을 지나는 차량 시가 행진을 하였다. 혁명 후반에 저명한 군인은 아니었던 박정희가 대표자로 나타났다는 이유 등으로 혁명이 군부로부터 거의 저지를 당했던 상황이었으나, 이 퍼레이드는 혁명이 군부에 지지를 충분히 받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이 날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혁명 이후 혁명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heading>5·16 군사 혁명 직후 </heading> 정변 당시 수많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혁명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 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혁명 직후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복권시켰다. 이후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에 지장이 생기자,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heading>후문 </heading>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국제연합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고 주장했다. 혁명 직후 허정은 정부에 전화하였지만 연결되지 못했다. 허정에 의하면 국제연합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국제연합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당초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북한 당국이 중공 외교관에게 전한 회의 내용에는 "우리는 경계를 강화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문맥에서 질문과 관련된 사실을 찾아 답하라. 핵심 내용을 완결된 설명형 문장으로 작성하라. 사건이나 변화의 시간적 순서를 고려하라.
질문 (question)
5·16 군사혁명 과정에서 정변 초기 설치되었던 군사혁명위원회는 이후 어떤 기구로 개편되었으며, 해당 기구는 언제 해체되었는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1. 1과제 해석task_interpretation

    군사혁명위원회의 개편된 기구 명칭과 그 기구의 해체 시점을 묻는 질문이다.

  2. 2정보 추출information_extraction

    군사혁명위원회가 개편된 기구와 해체 시점에 대한 정보를 본문에서 탐색한다.

    •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3. 3근거 선택evidence_selection

    개편된 기구 명칭인 '국가재건최고회의'와 해체 시점인 '1963년 12월 17일'을 핵심 근거로 선택한다.

    •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4. 4논리 통합logical_integration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뀌었으며, 이 기구는 제3공화국 수립과 함께 해체되었다는 시간적 흐름을 연결한다.

  5. 5결론 도출conclusion_formulation

    개편된 기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이며, 1963년 12월 17일에 해체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6. 6답변 생성answer_generation

    질문에 명시된 두 가지 정보를 결합하여 최종 답변을 작성한다.

    • 국가재건최고회의
    • 1963년 12월 17일
최종 답변 (final_answer)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으며, 이 기구는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5·16 군사혁명 이후 통치 기구의 명칭 변화와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역사적 변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