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맥 (context)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외스터라이히-웅가른, 오스트라크-머저로르사르)는 1867년에서 1918년 사이 유럽에 존재했던 군주국이며 강대국이었다. 1867년 대타협으로 만들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하여 여러 조약으로 인해 국가 자체가 분해되었다.
국체의 핵심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서부 및 북부 지역인 시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이쪽)와 헝가리 왕국이 제도적으로 분리된 트란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저쪽) 사이의 물적연합으로 이루어진 이중군주제였다. 한편 1868년 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의 자치령으로 인정받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제3의 연합구성체로 보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시스라이타니아)와 헝가리(트란스라이타니아)는 1908년 합병한 보스니아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군주는 합스부르크가에서 배출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역사 자체가 합스부르크 군주정의 마지막 단계이자 입헌적 전환기에 해당한다. 1897년 개혁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동등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외무・군사・재무 정책은 통일되었으나 다른 모든 정책 및 정부부처는 분리되어 있었다.
국가의 민족 구성원은 다민족이었고, 존속 기간 동안 유럽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다. 국가의 면적은 621,538 평방킬로미터로 당대 유럽에서 러시아 제국 다음으로 컸으며, 미국과 독일에 이어 세계 제3위의 가전제품・전기공학・발전기 제조 및 수출국이었다.
국체의 존립 근거가 되는 1867년 대타협은 마자르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마자르인들은 대타협 유지파 정당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타협과 더 나아가 대타협에 기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존재 자체가, 트란스라이타니아의 비(非)마자르인 소수미족이 대타협 유지파인 자유당에 몰표를 던져줘서 간신히 유지된 것이었다.
1878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점령 1908년 완전히 직할령으로 합병된 것은 여러 강대국 사이에 보스니아 위기를 촉발시켰다. 보스니아의 무슬림 주민들 때문에 보스니아 합병을 기하여 이슬람교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교로 인정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자체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하여 시작된 것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차대전의 동맹국 중 하나였다. 1918년 11월 3일 빌라주스티 휴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미 사실상 망했고, 1919년 9월 10일 조인된 생제르맹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국체 해체가 결정되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계승한 국가로 인정받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서슬라브족과 남슬라브족들은 독립하여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한편 옛 트란스라이타니아의 루마니아인 거주지역에 대한 루마니아 왕국의 영유권 주장은 1920년 다른 승전국들에게 인정받았다.
형성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양국 사이에서 맺어진 협약인 대타협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힘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으로 잃고 1866년 프로이센 왕국에게 독일 연방의 맹주 자리를 빼앗기는데 이어 점차 제국 내에서의 위상도 떨어졌던 시대적 배경 하에 체결되었다. 대타협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재편되었으며, 헝가리 왕국은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잃어버렸던 자주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변화의 발생은 합스부르크가의 통치가 헝가리인들의 불만을 초래하였고,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의 국민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점점 세력을 얻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인들의 오스트리아 당국의 통치에 대한 불만은 고조되어 1848년에서 1849년까지 전개된 헝가리 혁명으로 폭발하였고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를 탄압하였다. 사실, 헝가리에서의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대한 반발은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지 계속하여 제기되어 왔었다.
1850년대 후반, 헝가리 혁명을 지지하였던 많은 수의 헝가리인들이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1713년 국사원칙하에서 헝가리 왕국이 완전한 자치를 할 수 있는 한 외교권과 국방권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이 공통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는 헝가리와 제국의 통치를 양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새로운 외무부 장관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는 교착상태에 빠진 마자르인들과의 협상을 종결하고 싶어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데악 페렌츠가 이끄는 헝가리인 귀족들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1867년 3월 20일, 헝가리 혁명으로 사라졌다 페스트에 재설립된 헝기리 의회는 제국을 재편하기 위한 새로운 입법안을 3월 30일까지 통과시키기 위하여 의논에 들어갔다. 그러나 논의는 길어졌고 그 과정에서 헝가리의 지도자들은 같은 해 6월 8일에 새로운 입법안이 헝가리 내에서 통과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의 국왕으로써 즉위해야 한다고 통보받있다. 7월 28일,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헝가리의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동시에 공식적으로 이중제국을 탄생시킬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표하였다.
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완전한 명칭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었다.
다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통용되었던 언어들로 제국의 명칭을 표기한 목록이다.
구조
대타협으로 인하여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제국 의회에 대표된 영토들", 시스라이타니아)과 헝가리 왕국("성 이슈트반 왕관령", 트란스라이타니아) 양국간의 연방국으로 변하였다. 양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써 공통의 군주를 섬겼다. 국제적인 외교와 국방은 양국간의 협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양국은 관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와 헝가리 왕국간의 차이가 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 공통의 시민권은 없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시민권자이거나 헝가리 시민권자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은 개별적인 여권을 발급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통 여권 역시 없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권도 헝가리 왕국의 여권도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크로아티아어와 프랑스어로 작성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자체적인 여권을 발급했고, 여권에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 달마티아 왕국의 국장이 그려져있었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또한 귀화와 시민권에 관한 행정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모두 관할하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에서 어떤 여권을 사용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헝가리 왕국은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탄생한 이후에도 헝가리 왕국은 항상 별도의 의회를 유지했다. 헝가리 왕국의 행정부와 정부는 1848년 헝가리 혁명 전까지 대부분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부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헝가리 중앙 정부는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로부터 잘 분리되어 있었다. 프레스부르크에 있었고 이후 부다페스트로 이동한 헝가리 중역 위원회와 빈에 있는 헝가리 왕실 위원회가 헝가리 왕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와 헝가리 의회는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폐쇄되었고, 1867년의 아우스글라이히 이후에 회복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이 공통의 통화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은 국가 재정을 각자 독립적으로 운용하였다. 1527년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이 시작된 이래로부터 헝가리 왕국의 정부는 오스트리아의 정부와는 분리되었고 그 결과 독립적인 재정 및 자율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헝가리 정부의 예산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예산과 통합되었고, 헝가리는 1867년의 대타협 이후에 이르러서야 예전과 같이 독립적인 예산을 확보했다. 1527년부터 1851년까지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세관을 통제하였다. 1867년 이후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관세 동맹 협정이 맺어졌고 매 10년마다의 재협상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은 서로 독립적으로 외국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빈은 이중제국의 사실상의 수도 역할을 했다. 시스라이타니아에서 전체 인구의 약 57%을 차지하였고 트란스라이타니아에 비해 경제 자원의 비중이 더 컸다.
공동 정부
각료위원회 (미니슈테라트 퓔 게마인자메 앙겔레겐하이텐)가 이끄는 공동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통수권이 있었으며, 외교 정책과 관세 동맹에 대한 권한도 있었다. 공동 정부는 3개의 제국과 왕국 합동 부처로 구성되었다.
상기에 언급한 3개 부처의 장관 외에 헝가리의 총리, 시스라이타니아의 총리 및 각 지역의 대공들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도 각료위원회에 포함되었다. 이외에 총참모장도 주로 참석했다. 각료위원회의 회의에는 황제가 참석한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 내무부 및 외교부 장관이 의장을 맡았다. 이 각료위원회 외에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의회는 각각 60명의 의원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선출했고, 이들은 각각 따로 만나 양국 정부 공통의 행정 영향력이 있는 각료회의의 지출에 대해 투표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외교와 군사 정책의 최종 결정권이 있었기 때문에 장관들은 최종적으로 황제를 알현하여 결정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동 부처와 각국의 부처 간의 중첩되는 업무로 인하여 마찰과 비효율성이 초래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과 해군이 부처의 중첩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공동 정부가 전체적인 군사적 방향과 큰 틀을 결정했지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가 각각 모병과 보급, 훈련을 담당했다. 각 정부는 공통적인 정부에 대하여 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은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공동 정부의 활동을 방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867년 이후 반세기 동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은 공유된 외부 관세 협정과 공동 재정에 대한 각 정부의 재정 분배에 대한 반복적인 논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1867년 대타협에 의해 발생하였는데, 대타협으로 공동 예산 중 70% 오스트리아에, 30%는 헝가리에게 할당되었고 이렇게 정해진 예산 분할안은 10년마다 재협상을 통하여 그 분할 비율이 갱신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협정을 다시 개정할 때마다 정치적인 혼란이 있었다. 1907년, 헝가리인의 예산 점유율은 36.4%까지 상승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장기화된 구조적 위기로 1900년대 초에 절정에 달했다. 1900년대 초 헝가리 군부에서 어떤 언어를 지휘 체계의 언어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으로 구조적인 위기가 촉발되었고, 1906년 4월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민족주의 연정이 집권하게 되면서 문제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공동 협정의 갱신은 1907년 10월에 있있고 1917년 11월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1917년의 협상은 이중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전하여 해체되면서 일어날수 없었다.
행정 구역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였던 부분을 시스라이타니아(치스라이타니엔)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의 대부분이 라이타 강(라이타, 러이터) 안쪽(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본토 외에도 여러 영토로 구성되었는데, 1915년 이전에는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을 부르는 공식 명칭이 없었으나, 1915년 이후로는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이란 공식 명칭을 사용되었다. 제국 회의(라이히스라트)는 시스라이타니아의 의회 역할을 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였던 부분 외에 헝가리 왕국이 지배하였던 영토를 트란스라이타니아(트란스라이타니엔)라고 부르는데 트란스라이타니아도 헝가리 왕국 외의 영토들이 많았고 공식적으로는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 불렸다. 여기서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의 첫 기독교도 왕이자 성인으로 추대받은 성 이슈트반 대왕(센트 이슈트반 키라이)을 말한다.
군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근대화에 반대하는 테첸의 공작인 알브레흐트 대공(1817–1895)의 지휘를 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 체제는 양국에서 모두 유사했으며, 1868년 이후 시민들의 무기 보유의 보편적, 개인적 의무의 원칙에 따라 이어졌다. 그 군대는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와 헝가리 혼베드와 같은 특수 부대와, 별도의 국가 기관으로 구성된 연합군, 그리고 국민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공통군은 합동군사부 장관 직속이었고, 특수군은 각 국방부 직속이었다. 육군의 연간 모집인수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의회가 의결한 군사 법안에 의해 결정되었고, 전체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인구를 기준으로 결정되었다. 1905년에는 103,100명에 달했고, 오스트리아는 59,211명을, 헝가리는 43,889명을 징병하였다. 그 외에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에는 연간 10,000명이, 헝가리 혼베드에는 12,500명이 배치되었다. 복무 기간은 2년(기병 3년), 예비군이 7년 또는 8년, 란트베어가 2년이었다. 현역 군대에 징집되지 않은 병사들의 경우, 같은 기간 동안 다양한 특별 예비군에서 복무했다.
공통의 전쟁부 장관은 오스트리아 랜드베어와 헝가리 혼베드를 제외한 모든 군정의 수반으로서, 두 국가의 국방부에 헌정되었다. 그러나 군대의 최고 지휘권은 명목상 전군에 대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군주에게 주어졌다. 실제로 황제의 조카인 알브레흐트 대공은 그의 수석 군사 고문이었고 정책 결정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주로 해안 방어군이었으며, 다뉴브강의 정찰 소함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전쟁부 해군성에 의해 관리되었다.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문화
오스트리아는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며 오랜 세월 동안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비스마르크가 소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통일독일제국을 수립함에 따라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 자리를 독일 제국에게 내줬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어 여러 나라로 분열됨에 따라 제국의 문화적 유산 역시 국경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기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문화'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것들이 각국의 독립된 문화로 분리되어 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 평가되어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세기 당시 유럽의 주요국가(유럽 대륙에서 면적은 2위, 인구는 3위)이자 열강으로서 1867년 ~1918년 존속하면서 수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철학
이 시기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사상가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을 발전시킴으로써 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문트 후설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신칸트학파에 대항하여 독일-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프란츠 브렌타노도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경제학
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카를 멩거,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비저가 활동했다.
건축학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대표적이다. 그는 유럽 근대 건축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음악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활동하였다.
미술
'입맞춤' 등이 대표작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 나라 출신으로서, 빈 아르누보 운동을 이끌었다.
문학
프란츠 카프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 출신이다.
과학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인 란트슈타이너에 의해 ABO식 혈액형과 Rh인자가 발견되었다. 그는 1930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민족 >> 종교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국기 및 국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사용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국기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이며,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해군기는 패턴이 현재의 국기와 같으나 가운데에 문장이 들어있는 기를 사용하였다.
공식적인 국기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나,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기가 합쳐진 국기를 사용한다.
국기 >> 황기 >> 1915년 이전 >> 1915년 이후 >> 군기 >> 장군 및 제독의 기 >> 장군의 기 >> 제독의 기 >> 국장 >> 1915년 이전 >> 1915년 이후 >> 육해군 휘장 >> 대외 관계 >> 대한 관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기 전까지의 조선은 서양과의 수교를 강경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1876년에 맺어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서양 열강들과 수교하게 되었다. 1892년 6월 23일에는 오스트리아와도 조오수호통상조약(朝奧修好通商條約)을 맺으면서 양국간의 정식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민영익이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1900년 6월 이진범이 참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제국에 빼앗기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대 독일 관계
독일(당시 프로이센)과는 같은 민족이지만 경쟁 관계였다. 그래서 프로이센과 전쟁을 했지만 지고 말았고, 1914년에 전쟁을 준비하던 독일과 삼국 동맹을 맺으며 관계가 회복됐다.
대 러시아 관계
러시아와의 관계는 양호하여 1848년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에 원군을 요청하여 헝가리군을 진압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1854년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의 기대와 달리 비우호적이었으며, 항구를 찾아 발칸 반도로 남하하려는 오스트리아와 범슬라브주의를 기치로 든 러시아는 점차 대립하게 된다.
대 루마니아 관계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때 전 국토가 동맹국에 유린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합국이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얻어냈다.
지시문 (instruction)
주어진 원문을 읽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여, 원문에 근거해 질문에 답하라.
질문 (question)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체의 핵심을 이루는 이중군주제의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
추론 과정 (compact_reas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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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제 해석
task_interpretation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체의 핵심인 이중군주제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정의를 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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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보 추출
information_extraction본문에서 '국체의 핵심'과 '이중군주제'가 언급된 부분을 찾는다.
- 국체의 핵심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서부 및 북부 지역인 시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이쪽)와 헝가리 왕국이 제도적으로 분리된 트란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저쪽) 사이의 물적연합으로 이루어진 이중군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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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거 선택
evidence_selection이중군주제의 구체적인 구성 요소인 시스라이타니아와 트란스라이타니아의 관계를 선별한다.
- 오스트리아 제국의 서부 및 북부 지역인 시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이쪽)와 헝가리 왕국이 제도적으로 분리된 트란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저쪽) 사이의 물적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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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논리 통합
logical_integration시스라이타니아(오스트리아 제국 지역)와 트란스라이타니아(헝가리 왕국 지역)가 물적연합을 통해 이중군주제를 형성함을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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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결론 도출
conclusion_formulation이중군주제는 시스라이타니아와 트란스라이타니아 사이의 물적연합으로 정의됨을 정리한다.
- 국체의 핵심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서부 및 북부 지역인 시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이쪽)와 헝가리 왕국이 제도적으로 분리된 트란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저쪽) 사이의 물적연합으로 이루어진 이중군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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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답변 생성
answer_generation질문에 대해 구성 요소를 명확히 포함하여 답변을 작성한다.
- 오스트리아 제국의 서부 및 북부 지역인 시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이쪽)와 헝가리 왕국이 제도적으로 분리된 트란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저쪽) 사이의 물적연합
최종 답변 (final_answer)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체의 핵심인 이중군주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서부 및 북부 지역인 시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이쪽)와 헝가리 왕국이 제도적으로 분리된 트란스라이타니아(라이타강 저쪽) 사이의 물적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심 해석 (core_interpretation)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이중군주제는 시스라이타니아와 트란스라이타니아 간의 물적연합으로 구성된다.